318화. 그 아이
서울의 한 초등학교. 아이들은 잠시 쉬는 시간을 맞아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우리 이따 학교 끝나고 햄버거 먹으러 갈래?”
“그래. 나 피아노 학원 가기 전에 시간 좀 있어.”
어느 아이들은 방과 후 무엇을 하지 이야기 중이었고, 어느 아이들은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야! 어제 스킨 새로 나온 거 봤어?”
“어. 완전 멋있던데?”
“난 별로. 저번 게 더 멋있는 거 같아.”
교실 뒤편에 있던 또 다른 남자아이들 역시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쉬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너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그게 아니라 학교 끝나고 영어 학원 가야 하는데 숙제를 안 했어.”
“너, 저번 시간에도 안 해서 엄마한테 혼났다고 하지 않았어?”
“엄청 혼났지. 어제 엄빠 몰래 게임하느라 깜빡했어. 아! 엄마가 숙제 한 번만 더 안 하면 축구교실 끊어 버린다고 했는데…….”
“그러게 숙제 좀 하지.”
“아! 몰라. 공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불가능인데.”
“야! 얘들아?”
한참 학원 숙제로 이야기하던 아이들 사이로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남자아이가 다가와 무리에 끼어들었다.
“내가 신기한 거 보여 줄까?”
“신기한 거?”
아이들이 반문하자 남자아이는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아이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은 같은 반 아이였다.
다들 저마다 친한 아이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와중에 또래보다 작은 체구의 남자아이가 혼자 앉아있었다.
아이의 이름은 고승우.
승우는 주변에 친구도 없이 자기만 혼자 앉아있는 게 전혀 민망하거나 불편하지 않은 듯 무언가에 집중했다.
“전학생?”
“쟤가 왜?”
“야, 전학 온 지 두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전학생이 뭐냐? 쟤 이름 고승우야.”
“근데 쟤 저번에 보니까 안 건드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런 거 아니라. 내가 고승우한테 진짜 신기한 거 발견했다.”
“신기한 거? 쟤 거의 책만 보고 있잖아. 그게 뭐가 신기해?”
“그거 말고. 아무튼 내가 보여 줄게, 따라와.”
아까부터 신기한 걸 보여 주겠다는 아이는 결국 이야기하고 있던 친구들을 끌고 승우에게 향했다.
“야! 고승우?”
“…….”
남자아이가 불렀지만, 승우는 계속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이 없었다.
“야, 너 뭐 하려고 그러는 건대?”
“내버려 두고 그냥 가자.”
“아, 가만히 좀 있어 봐. 고승우, 지금 우리 반 교실에 애들 몇 명 있냐?”
“…….”
“몇 명 있냐니까?”
“…….”
“야!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을 좀 해. 지금 애들이 몇 명이냐고?”
“우리 반 교실에 애들 현재 27명.”
남자아이의 계속된 질문에 책에 심취에 있던 승우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빠르게 답을 하고 다시 책에 집중했다.
“뭐야? 이게 지금 신기하다고 부른 거야?”
“그러게. 우리 반 몇 명인지 맞추는 게 신기한 건가?”
“심지어 우리 반 총 24명이야.”
“아니, 지금 인원은 27명 맞아.”
“뭐?”
“저기 봐. 옆 반에 김인수랑 최현우 그리고 3반에 유인지도 있으니까 총 27명 맞잖아.”
질문했던 아이는 승우가 말한 27명이 맞는다는 걸 친구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네. 뭐지? 고개 잠깐 들었는데 그새 다 새어 본 건가?”
“에이, 설마! 아까 미리 봐 둔 거겠지.”
“미리 봐 둔 게 아니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그때마다 바로바로 다 말하더라니까.”
“진짜야?”
“못 믿겠으면 너희도 해 봐.”
“그럼, 내가 한번 해 볼게. 승우야. 천장에 있는 네모판 모두 몇 개야?”
“…….”
잠시 침묵하나 싶던 승우는 또 한 번 고개를 들고 천장을 슬쩍 보더니 바로 천장 석고판의 개수를 말했다.
“178.5개”
“점오는 뭐야?”
“이거 그냥 아무 숫자나 대충 말하는 거 아니야?”
“가만있어 봐. 내가 확인해 볼게.”
순식간에 천장 석고판 개수를 말하는 승우를 보며 무리 중 한 아이가 핸드폰으로 천장 사진을 찍어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내가 이쪽 세어 볼 테니까 네가 반대쪽 세어 봐.”
“오케이. 하나둘 셋 넷…….”
“……팔십칠, 팔십팔. 팔십구. 이쪽 팔십구. 넌?”
“나도 팔십 구, 아니. 여기 반쪽짜리도 하나 있으니까 팔십구 점오가 맞아.”
“그럼 팔십구 더하기 팔십구니까…….”
“178에 반쪽짜리까지 하면 178.5가 맞네.”
“대박!”
승우의 답을 믿지 않던 아이들은 직접 확인한 뒤 다들 놀라워했다.
“미쳤다.”
“고승우 너 진짜 대박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한 번에 맞췄어?”
“눈에 보여서.”
“너무 쉽게 말한다.”
“야, 더 대박인 건 고승우 얘, 날짜 물어보면 그것도 다 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봐봐!”
“승우야, 2025년 3월 5일이 무슨 요일이야?”
“2025년 3월 5일은 수요일이며 이날은 경칩이다. 경칩은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나는 날이기도 하며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로 계칩이라고도 한다.”
“와! 미쳤다.”
“고승우 너 장난 아니다.”
“저번에 수학 시험도 일등 하더니 혹시 천재 아니야?”
“천재는 무슨 천재야.”
아이들이 승우의 장기를 보며 감탄하던 그때, 앞에서 이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던 덩치 좋은 남자아이가 비웃으며 다가왔다.
그 아이는 꼭 반에 한 명쯤은 있는 그런 아이로, 자기가 아이들보다 덩치가 좋다는 이유로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천재가 다 얼어 죽었냐?”
“그러게. 전학생이 그냥 때려 맞춘 거겠지.”
덩치 좋은 아이의 친구들도 함께 비아냥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넌 왜 갑자기 끼어들고 그래?”
“끼어들긴 누가 끼어들어. 전학생이 너희 거야? 우리는 뭐 얘한테 말도 하면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덩치가 있는 아이가 인상을 쓰고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하자 아이들은 말끝을 흐렸다.
“어이?”
“…….”
“야! 전학생, 내가 문제 한 번 내 볼게. 2037년 7월 25일 무슨 요일이냐?”
“…….”
덩치 있는 아이가 질문했지만, 승우는 답을 하지 않았다. 아까 처음 아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책에 집중했다.
“어이, 전학생 내 말 안 들려?”
“…….”
“무슨 요일이냐고 물었잖아?”
“야! 안 들려?”
짝! 짝!
“…….”
함께 온 아이들이 다시 물어보고 승우의 눈앞에서 손뼉까지 쳤지만, 아이의 시선은 여전히 책을 향해 있었다.
그러자 짜증이 난 덩치 큰 아이가 별안간 승우의 책을 확 뺏어 들었다.
“야! 너 내 말 무시하냐?”
“……!”
집중해서 보고 있던 책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놀란 승우가 책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책! 내 책 돌려줘.”
“누가 안 준대. 내가 물어본 거 대답하면 줄게.”
“그래, 전학생 책 받고 싶으면 얼른 말해봐.”
“책! 내 책.”
“알겠고 2037년 7월 25일이 무슨 요일이냐니까?”
“내 책. 내 책! 내 책이야.”
“빨리 말하라고. 그러면 준다니까!”
“내 책. 내 책!!!!”
조용히 보고 있던 책을 뺏어가자 얌전히 있던 승우의 반응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덩치가 있는 친구는 계속 책을 펼쳐 보였다 줄 듯 말 듯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줄까, 말까? 야, 느림보 얼른 말해 보라니까.”
“책 내놔!!!”
그렇게 계속 덩치 큰 아이의 일방적인 놀림은 계속됐고, 주변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책 줘!!”
“……!”
여전히 책을 줄 듯 말 듯 행동이 이어지던 찰나,
“아!”
승우가 까치발을 들고 펼쳐진 책 한쪽을 낚아챘고, 순간 책 종이에 놀리던 아이가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내 책이야.”
“어! 만우야. 너 피 나.”
“뭐!”
“괜찮아?”
“진짜 피 나네. 아! 씨x.”
덩치 큰 아이는 자기 손가락의 나는 피를 보며 순간 인상을 확 구기면서 승우를 째려봤다.
“느림도 병신 새x 때문에 피 나네. 야! 느림보 너 때문에 피 나잖아. 너 어떡할 거야.”
“너 양호실 가야 하는 거 아니야? 피 계속 나는데?”
“아! 진짜 병신 같은 놈 때문에……. 야!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쾅-
피를 보고 화가 난 덩치 큰아이가 의자에 앉으려는 승우를 밀쳐 넘어뜨렸다.
“승우야, 괜찮아?”
“이만우 넌 왜 애를 밀고 그래?”
“넌 눈이 없냐? 이 새끼 때문에 내 손에 피 나는 거 안 보여? 내 손 잘못되면 네가 대신 책임 질 거야?”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따져 물었지만, 덩치로 위협하는 남자아이 때문에 아이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교실에 있는 모든 아이의 시선이 집중됐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승우는 넘어진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은 뒤 다시 책에 집중하며 혼잣말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토요일……. 2037년 7월 25일은 토요일.”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던 덩치 큰 아이는 몇 차례 나쁜 말을 내뱉은 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
OO 기획-
간판과 옥외광고를 제작하는 어느 회사. 디자인 팀 직원들은 각자 모니터 앞에서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늘 노래방 시안 넘겼나?”
“네, 실장님. 넘겼습니다.”
“카페 전체 시안도 넘겼지?”
“네, 아까 메일 보냈어요.”
“그래. 땡큐!”
“실장님. 밥 먹고 하면 안 될까요?”
“벌써 점심시간이야?”
“실장님, 벌써가 아니라 지금 한 시 반이 훌쩍 넘었어요.”
마감일을 앞둔 디자인팀 직원들은 점심시간이 넘도록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래? 쏘리. 오늘 정신이 없어서 시간 가는지도 몰랐네. 다들 밥 먹고 해요.”
“오늘 요 앞에 냉면집 오픈했는데 냉면 어떠세요?”
“냉면 좋지.”
“저도 좋아요.”
“오늘은 내가 쏠게, 다들 같이 나가요.”
“실장님이요? 와! 역시 우리 실장님이십니다. 그럼 함께 먹으면 더 맛있는 숯불 불고기도 같이 시켜도 될까요?”
“그래요. 다들 마감 몰려서 고생하고 있는데 먹고 싶은 거 다 시켜요.”
“실장님, 지갑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문제야. 법카로 해결하면 돼.”
“화끈하셔! 법카 만세.”
“다들 나가자고. 선민 씨 안 가? 밥 먹으러 가자?”
“그래요. 선민 씨 얼른 가요.”
직원들과 사무실을 나가던 실장은 안쪽 책상에 있는 여직원을 향해 말했다.
“실장님, 다녀오세요. 한 잔 술집 시안 아직 못 넘겨서요.”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아니에요. 그리고 별로 입맛이 없어서요.”
심하게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입맛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오늘도 한 시간 늦게 출근한 김선민은 급한 시안 작업 때문에 점심을 먹을 새가 없었다.
“참! 동생 아프다고 하더니 좀 괜찮아요?”
“동생이요? 아, 네.”
동생이란 말에 잠시 움찔한 그녀는 빠르게 대답을 마무리했다.
“그럼 올 때 뭣 좀 사다 줄까?”
“괜찮아요. 다들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알았어요. 아! 그리고 선민 씨 거기 마지막에 컬러랑 규격 수정 잊지 말고 그대로 제작팀에 넘기면 돼.”
“네, 잘 확인해서 넘길게요. 다녀오세요.”
직원들이 전부 나가고 디자인실에 남은 김선민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질끈 묶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며 책상에 앉았다.
탁- 탁- 탁탁-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한 손은 마우스를 잡고 한 손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정신없이 모니터에 집중하던 그때였다.
Rrrrrrrrrr
책상 위에 있는 휴대폰이 울리자 김선민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뻗어 핸드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승우 담임이에요.
“아!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학교에서 걸려 온 전화에 김선민을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기 선생님, 혹시 승우한테 무슨 일이 있나요……?”
-네. 갑자기 죄송한데, 지금 누님께서 좀 오셔야 할 거 같아요.
“지금이요? 네, 일단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급하게 작업을 마무리한 김선민은 10분 뒤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