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그 여자
두 사람이 횡단보도를 건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호가 바뀌고 김선민은 숨을 내쉬며 승우를 내려놓았다.
“흰 선! 7개 못 밟았어.”
그런데 그 순간, 계속 혼잣말하던 승우가 말릴 틈도 없이 몸을 돌려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다.
그것도 이미 수많은 차들이 달리는 8차선 도로였다.
“승우야!”
숨을 돌릴 새도 없이 깜짝 놀란 김선민은 얼른 몸을 일으켜 횡단보도로 몸을 돌렸다.
아연실색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던 그때였다.
“야!!”
두 명의 남자 목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너 이러다 큰일 나.”
“차도에 뛰어들면 위험해. 신호 바뀌면 절대 차도로 들어오면 안 돼.”
고개를 완전히 돌리자 남자 대학생 두 명이 승우를 꼭 붙잡고 있었다.
“하! 다행이다.”
김선민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며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희가 뒤에 오고 있어서 잡았지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조금 전, 두 사람이 횡단보도를 급하게 뛰어올 때 대학생들 역시 두 사람 뒤로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던 승우를 잡을 수 있던 것이다.
“정말 감사해요.”
“아니에요. 꼬마야 너 조심해.”
“그래. 항상 차 조심해라.”
“흰 선……. 7개.”
주의를 주며 인사하고 가는 대학생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승우는 여전히 자기의 루틴이 깨진 게 불안하고 불만인 모습을 보였다.
“어딜 가!”
심지어 또다시 횡단보도를 향해 몸을 돌리자 김선민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흰 선……. 흰색 선을 밟아야…….”
“누나 말 안 들려! 흰색 선을 밟긴 뭘 밟아! 너 차에 치일 뻔했잖아. 고승우!!”
“…….”
“누나가 몇 번이나 말했지? 절대 차로에 뛰어들면 안 된다고 했잖아.”
“…….”
“내 말 듣고 있어? 어딜 봐?”
아직도 흰색 선을 밟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남은 승우는 차도 쪽을 보고 있었다.
이런 적이 처음이 아니었고 그때마다 김선민은 차분하게 달래도 보고 확실하게 말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누나 보라고 했지? 너 자꾸 그러면 진짜 화낸다.”
“흐! 으아 앙!”
점점 더 높아지는 목소리에 승우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선민도 속상함과 답답함에 함께 울었다.
육체적인 게 힘든 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지만, 심적으로 힘든 건 점점 견디기 힘들었다.
눈물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지만, 눈앞에 닥친 현실이란 벽이 너무 높아 절로 눈물이 나왔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김선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 목 놓아 울고 싶었지만, 이성을 놓아 버리면 주체할 수가 없을 거 같아서 간신히 마음을 다잡으며 승우를 달랬다.
“승우야 울지 마. 소리 높여서 누나가 미안해.”
“미안해요.”
“누나도 미안. 그래도 차 올 때 도로에 들어가면 안 돼. 알았지?”
“차 올 때 도로 금지. 초록불에 건너고 빨간불에는 멈춘다.”
“그래 맞아. 잘했어. 이제 그만 갈까?”
고개를 끄덕이는 승우의 손을 잡고 김선민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매번 죄송해요.”
“죄송하긴, 공짜로 봐주는 것도 아니고 나도 용돈 벌고 좋지. 승우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 봐.”
“네. 할머니 감사합니다.”
가끔 일이 있을 때마다 승우를 봐주는 윗집 노부부에게 동생을 맡긴 김선민은 집주인에게 몇 달이 넘게 밀린 월세를 내고 사과한 뒤 부랴부랴 회사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
조심스러운 손길로 사장실 문을 노크한 김선민은 안에서 들려온 대답에 안으로 들어갔다.
“이봐! 자네 뭐 하는 사람이야? 한 잔 술집 시안 보낼 때 규격 수정 안 했어?”
사장은 김선민을 보자마자 호통과 함께 시안을 출력한 A4 용지를 앞으로 던졌다.
“……!”
실장한테 시안이 잘못됐다는 소리를 듣고 설마 술집 시안은 아니겠지 싶었다. 그런데 사장이 던진 종이를 주워 확인한 김선민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내가 김 실장한테도 몇 번이나 강조하면서 여긴 수정이 많은 곳이니까 넘기기 전에 잘 보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아까 확인한다고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던 거 같아요.”
“깜빡! 그게 지금 할 소리야? 잘못된 시안 들고 제작 다 끝내서 현장 나갔다가 점주가 쌍욕하고 난리 났어.”
사장은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거래를 유지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술집의 시안을 실수하는 바람에 회사에 손해를 입힌 것이다.
“아니, 이게 벌써 몇 번째야. 신입도 아니고 올해부터 왜 자꾸 이런 일을 반복하느냐고?”
게다가 김선민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사장이 화를 내도 할 말이 없었다.
“자네가 회사에 입힌 손해만 해도 그 금액이…….”
“정말 죄송합니다. 사장님.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하겠습니다.”
“됐고. 내일부터 나오지 마.”
“……!”
“회사 사정 어려운 건 알고 있지? 나도 돈 벌려고 회사 차린 건데 자꾸 손해만 주는 직원을 데리고 가는 건 말도 안 되잖아. 안 그래?”
“저기, 사장님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그 한 번이 벌써 여러 번이야. 나도 이 정도 했으면 기회 줄 만큼 줬다고 생각하니까 여러 소리 하지 말고 나가요.”
“…….”
“뭘 보고 서 있어. 얼른 나가라니까!”
철컥-
결국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한 김선민은 회사를 나왔다. 사실 그동안 실수를 하면서도 잘릴까 봐 마음이 불안했었다.
그래도 막상 그만두니 마음이 많이 안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닥친 현실에서는 돈이 더 절실하게 필요했다.
“민선 씨 어떡해…….”
“좋은 곳에 또 취직할 거예요.”
“그래, 나도 한번 알아봐 줄게.”
“그동안 다들 감사했습니다.”
직원들과 짧은 인사를 마친 김선민은 일주일에 몇 번 나가는 야간 알바를 위해 대형 물류센터로 향했다.
“선민 씨, 안녕.”
출근 도장을 찍고 라커룸에서 나오자 알바하면서 알게 된 여자가 친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자기, 어제 와서 오늘은 안 올 줄 알았는데 왔네. 뭐 급하게 돈 필요해?”
“네, 그렇게 됐어요.”
“하긴. 이 세상에 돈 안 필요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도 카드값 메꾸려고 부지런히 다니잖아.”
“언니는 부모님이랑 같이 살지 않아요?”
“같이 사는데 우리 부모님 대학 졸업하고는 절대 지원 안 해 주시거든. 내가 물욕이 강한지 이번 달 또 카드값을 오버해서 회사 끝나고 또 이렇게 알바 뛰러 왔잖아.”
“그래도 대단하시네요.”
“나보다는 자기가 더 대단하지. 난 부모님이 고지서 보면서 내 머리 싹 밀어 버리실 거 같아서 무서워서 나오는 거야.”
온종일 기분이 우울했던 김선민은 그래도 유쾌한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으니 기분이 좀 풀리는 거 같았다.
“선민 씨도 오늘 피킹이지?”
“네. 3층이요.”
“자! 오늘 하루도 아니지. 오늘 새벽도 하얗게 불태워 보자고. 자기 수고해.”
“네, 언니도요.”
3층으로 올라온 김선민은 피킹 작업에 열중했다.
피킹 작업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고객이 주문한 물품을 배송이 나갈 수 있도록 돌아다니며 물건을 담는 일이었다.
워낙 물류센터가 크고 주문량도 많기 때문에 생각보다 꽤 힘든 일에 속했다.
특히 오늘처럼 주문량이 급증하는 세일 기간에는 몇 배는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하! 힘들다.’
오늘따라 주문이 많아서인지 심적으로 힘이 들어서인지 김선민은 평소보다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그저 속으로 빨리 시간이 가길 바라면서 간신히 쉬는 시간을 맞이했다.
“오늘 주문량이 정말 미쳤네.”
“그러니까요. 너무 많은 거 같아요.”
“아무리 세일이라지만 너무하잖아. 나 솔직히 아까 첫 쉬는 시간에 돈이고 뭐고 그냥 도망갈까 생각했었다.”
“저도요.”
“하! 또 이렇게 소중한 쉬는 시간이 끝났네. 자기 수고하고 이따 봐.”
“네, 언니도 수고……!”
휴게실에서 쉬다가 다시 일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던 김선민이 갑자기 멈칫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래? 자기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워서…….”
털썩-
동료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며 괜찮다고 말하던 김선민은 별안간 크게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 선민 씨? 자기야?”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김선민은 눈을 뜰 수 없었다.
* * *
한 시간 반 뒤-
물류센터 휴게실에서 쓰러졌던 김선민은 응급실 베드 위에서 눈을 떴다.
‘맞다! 나 쓰러졌었지?’
천장 불빛에 눈을 몇 번 깜짝이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병원임을 확인했다.
그것도 이곳이 우리병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끔 승우를 봐주시는 할머니가 알려 준 병원인데, 김선민 역시 본인 진료 때문에 몇 번 온 적이 있었다.
집에서 아주 가까운 병원은 아니었지만, 직원들이 다들 친절했기에 진료 보기가 편했다.
쓰러졌을 때 기운이 없고 어지러웠던 느낌은 전혀 없었다. 수액을 맞아서 그런지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상체를 일으키려는데 지나가던 임정숙 간호사가 그 모습을 보고 커튼 안으로 들어왔다.
챠륵-
그리고 그녀의 상체를 잡아 주며 말했다.
“환자분, 일어나셨어요?”
“……네.”
“천천히 일어나세요. 어지럽지는 않으세요?”
“네, 괜찮아요. 지금은 어지럽지 않아요.”
“아까 여자분이 데리고 오셨는데 기억나세요?”
“네. 기억나요.”
김선민은 함께 일하는 언니가 자신을 데려온 것도 기억났다. 그리고 아까 중간에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일 때문에 먼저 간다며 미안해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났다.
“환자분 처음에 오셨을 때 몇 가지 검사를 했어요. 저희가 한 검사 항목은……입니다.”
“저기 간호사 선생님…….”
친절하게 설명하는 임정숙 간호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김선민이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어디 안 좋은가요?”
응급실에 오면 검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건 별일이 아니었다. 다만 몸에 이상이 있을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검사 결과는 선생님이 오셔서 말씀해 주실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
임정숙 간호사가 나가고 김선민은 병원까지 데려다준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저예요.”
-안 그래도 지금 쉬는 시간이라 전화 걸려고 했는데……. 자기, 괜찮아?
“네, 괜찮아요. 병원 데려다주셔서 고마워요. 언니.”
-고맙긴. 내가 옆에 더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지. 선민 씨, 핸드폰이랑 지갑은 아까 챙겨서 나와서 베드 아래 쇼핑백에 있을 거야. 그리고 오늘 일당은 일한 시간만큼 내일 입금될 거래. 병원에서는 뭐래?
“지금 의사 선생님 기다리고 있어요.”
-별일 아닐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잘 먹고 잘 쉬어.
“그럴게요. 언니 연락드릴게요.”
-그래, 잘 쉬어.
전화를 끊은 김선민은 휴대폰 배경 화면인 승우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래 이럴 때 쓰러진 게 낫지.”
김선민은 승우와 둘이 있다 쓰러지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집에서 둘이 있다 쓰러졌다면 그땐 아무것도 못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때 커튼을 젖히며 태경이 등장했다.
“김선민 환자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