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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321화 (320/472)

321화. 만 원 한 장

김선민은 승우와 둘이 있다 쓰러지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집에서 둘이 있다 쓰러졌다면 그땐 아무것도 못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때, 커튼을 젖히며 태경이 등장했다.

“김선민 환자분?”

“네, 제가 김선민이에요.”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아요. 그보다 선생님 저 검사 결과는 어떤가요?”

“미주신경성 실신이에요.”

“미주신경……. 그게 뭔가요?”

“보통 실신 중에 가장 흔한 유형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태경은 언제나 그렇듯 환자가 알기 쉽도록 자세한 설명을 잊지 않았다.

“지금 환자분이 뭔가 병적으로 아픈 곳이 있는 건 아니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잠시나마 큰 병이면 어쩌나 싶던 김선민은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렸다.

“다만, 현재 환자분 평소에 과로했는지 몸에 무리가 왔고 영양실조 성향도 좀 있어요.”

“아, 네…….”

다 큰 성인이 영양실조라는 말에 살짝 놀랄 법도 하지만 김선민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고민이 너무 많아 입맛이 전혀 없었다. 늘 끼니마다 먹는 둥 마는 둥 했으니 영양실조라는 말이 이해됐다.

“평소에 밥 잘 안 먹죠?”

“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앞으로는 그러면 안 돼요. 몸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영양가 있게 드시고, 지금 맞고 있는 수액이 몸에 좋은 거니까 다 맞고 가세요.”

“선생님. 죄송한데 저 바늘 그냥 빼 주시면 안 될까요?”

“바늘을 빼 달라고요?”

태경이 일정하게 떨어지는 수액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다 맞으려면 30분 정도 걸릴 거 같은데, 지금 맞고 계신 수액 성분이 좋은 거니까 다 맞고 가세요.”

태경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겉모습만 보기에 영락없는 대학생처럼 생긴 아직 한참 젊은 환자가 영양실조로 쓰러진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수액을 다 맞고 갔으면 했다.

“30분이면 너무 긴데…….”

태경의 말을 듣고 있던 김선민은 말끝을 흐리며 휴대폰 시계를 봤다. 솔직히 아까운 수액을 전부 다 맞고 싶었지만, 승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동생을 봐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힘드실 거 같아 승우를 데려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선생님, 저 그냥 갈게요.”

잠시 고민하던 김민선은 결국 그냥 집에 가기로 결정했다.

“죄송해요.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계속 병원에 있을 수가 없어서요.”

“그럼 이렇게 하죠. 5분만, 딱 5분만 더 맞고 가는 거 어때요?”

“…….”

“정확히 5분 있다 바늘 빼는 걸로 해요. 네?”

“네, 알겠습니다.”

계속된 태경의 설득에 김선민은 수액을 좀 더 맞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정확히 5분 뒤, 간호사가 들어와 수액을 정리해 줬다.

“환자분 지금 가셔야 한다고요?”

“네.”

“아까운데 더 맞고 가시는 건 힘드세요?”

“네, 지금 가 봐야 해요.”

“많이 급하신가보다. 자! 다 됐습니다. 접수처로 가셔서 수납하시면 돼요.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응급실을 나온 김선민은 병원비 결제를 위해 수납처로 향했다.

“진료비 결제하려고요.”

“응급실에서 진료 보셨죠?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네, 김선민이요.”

“검사비 포함해서 총 9만 7천 원입니다.”

“…….”

금액을 들은 김선민은 잠시 멈칫했다. 많이 나와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응급실이고 이것저것 검사와 수액도 맞았기에 비용이 좀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현재 지갑에 그만한 금액이 없어서 멈칫한 거였다. 아무래도 통장에서 돈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죄송한데 제가 인출기에서 뽑아서 결제해도 될까요?”

“그럼요. 인출기는 지금 서 계시는 왼쪽으로 쭉 가셔서 오른쪽으로 코너 도시면 중간에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김선민은 곧장 인출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돈을 인출하기 위해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잔고를 확인한 순간,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

통장에는 정확히 만 원 한 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실신한 탓에 정신이 없던 김선민은 그제야 몇 달 치 밀린 월세와 각종 고지서 요금을 내고 돈이 없다는 걸 알았다.

지갑에 신용카드가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카드가 정지 상태였기 때문에 급하게 현금 서비스를 받을 수도 없었다.

‘정말 미치겠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이도 저도 못 한 그녀의 손에는 김장감에 땀이 차오르고 있었다.

김선민은 발을 동동거리며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채 고민했다. 그렇게 점점 시간만 흘러가고 오도 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10분 뒤,

“언니, 아까 그 여자 환자분 아직 안 왔어요.”

접수처 직원은 돈을 뽑으러 간다고 했던 김선민이 돌아오지 않자 옆에 있는 직원에게 말했다.

“그렇지? 아직 안 왔지? 난 속으로 계속 결제하고 갔나 싶었다니까.”

“혹시 그냥 간 거 아니까요? 왜, 예전에 우리 병원에 왔던 노숙자도 돈 때문에 도망갔었잖아요.”

“그건 노숙자니까 그렇지. 아까 그 환자는 그럴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그리고 젊은 사람 중에 돈 안 내고 간 사람 한 명도 없었잖아.”

“그건 그래요. 제가 한 번 갔다 와 볼까요?”

“무슨 일이에요?”

때마침 접수처에 볼일이 있어 들린 태경이 무슨 일인지 물었다.

“원장님, 아까 응급실에서 나온 환자분이…….”

직원들은 태경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한 번 가 보려고요.”

“그러지 말고 조금 더 기다려 보죠.”

“네!?”

“환자분이 화장실을 갔을 수도 있고 전화를 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10분이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고 아마 그냥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하긴…….”

“좀 더 기다려 보고 그래도 안 오면 그때 저한테 알려 줘요.”

“네, 원장님.”

직원들과 대화를 끝낸 태경은 2층 병동으로 올라간 뒤, 다른 쪽 계단을 이용해 인출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인출기 맞은편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김선민이 모습이 보였다.

“저기…… 환자분?”

태경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불렀다. 그러자 계속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던 김선민이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선생님?”

“환자분 실례지만 잠시 절 따라오시겠어요?”

“…….”

“잠깐이면 돼요.”

잠시 의아하던 김선민은 이내 태경을 따라나섰다. 인출기를 지나쳐 조용한 복도를 걷던 태경은 걸음을 멈춘 뒤 말했다.

“환자분, 이쪽으로 조금만 가면 뒷문이 나올 거예요.”

“……?”

“진료비 신경 쓰지 말고 그쪽으로 가세요.”

“……!”

그 말에 김선민은 깜짝 놀랐다.

태경은 조금 전, 인출기 앞에 앉아 있는 김선민을 보는 순간 진료비가 없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의 손에는 구겨질 대로 구겨진 만 원짜리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자 아래로 보이던 당장이라도 울어 버릴 것만 같은 심각한 표정이 그 이유를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태경의 말을 듣고 있던 김선민은 민망함에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병원비가 없어서 진료비를 계산할 수가 없어요.”

“괜찮아요. 환자분 괜찮습니다.”

태경은 아무것도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굳이 그 이유를 물어 환자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서 있는 이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환자분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가 보세요.”

“제가 반드시 꼭 갚을게요. 그리고 선생님 이거…….”

잔뜩 구겨진 만 원짜리를 목숨처럼 꼭 쥐고 있던 김선민은 그 돈을 태경을 향해 내밀었다.

“받아 주세요. 그냥 가는 건 제가 너무 죄송할 거 같아요.”

그녀가 내민 만 원은 집으로 갈 차비와 승우에게 약속한 아이스크림을 살 돈이었다.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돈이었지만, 그냥 이대로 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환자분 혹시 병원 가까이에 살아요?”

“예? 아니요. 전 연하동에 살고 있어요.”

연하동은 병원이 있는 여울동과 멀지 않은 동네였지만, 그렇다고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절대 아니었다.

“그럼 시간도 늦었는데 택시 타고 가세요.”

“그래도…….”

“어서요. 더 늦으면 택시 잡기도 힘들어요. 뒷문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버스 정류장이랑 택시 승강장 보일 거예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병원비는 제가 꼭 갚을게요.”

“그래요. 언제든지 환자분이 괜찮을 때 그때 천천히 갚도록 해요.”

김선민은 땅에 머리가 닿을 듯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 뒤 병원을 나갔다.

“젊은 친구가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기운이 없을까.”

태경은 힘없이 걸어가는 김선민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한 뒤, 인출기에서 오만 원권 두 장을 뽑아 접수처로 향했다.

“아까 진료비 뽑으러 간다고 했던 환자 김선민 환자 맞죠?”

“네, 원장님 맞아요. 근데 그 환자분 아직도 안 와서 제가 지금 전화 한 번 해 보려던 참이었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여기요.”

태경은 가운 주머니에서 오만 원권 두 장을 꺼내 접수처 직원에게 내밀었다.

“김선민 환자가 주고 간 진료비예요.”

“예! 원장님께 진료비를 줬다고요?”

“그게 내가 현금 뽑을 일이 있어서 인출하러 갔는데, 김선민 환자가 급한 일이 있어서 바로 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죄송하지만 진료비를 대신 전달해 달라고 하길래 알았다고 했죠.”

상당히 그럴듯한 말에 직원들은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

사실 태경이 진료비를 사비로 납부한 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전에 큰 기부금을 받은 우리병원은 그 돈을 진료비를 비롯해 환자들에게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부금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 안에서 절차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같이 그렇게 크지 않은 비용은 기부금으로 계산을 할 수 없기에 태경이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엄청 급해 보이긴 하더라고요.”

“그래요.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요.”

“어! 그런데 그 환자분 진료비 십만 원 아닌데? 거스름돈이 좀 있는데 어떡하죠?”

“그거야 다음에 오면 돌려주거나 문자 하나 남기면 돼지.”

“아, 그러면 되겠네요.”

“그럼 난 응급실 가 볼게요. 수고해요.”

“네, 원장님도 수고하세요.”

그렇게 태경은 환자의 진료비를 대신 지불하고 응급실로 향했다.

* * *

김선민은 택시를 타고 살고 있는 동네에서 내렸다.

이미 아이스크림 가게가 문을 닫은 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비슷한 제품과 드링크 두 병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마음도 몸도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디며 집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누군가 김선민을 불렀다.

“저기요? 303호에 아이 맡긴 사람 맞죠?”

“누구……세요?”

“303호 살고 계시는 두 분이 제 부모님이에요.”

잔뜩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선민을 향해 여자는 자기가 누군지 밝혔다.

“아…… 안녕하세요.”

“저기요. 내가 웬만하면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에요?”

“에헤이! 여보, 하지 마.”

여자가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남편이 아내를 말렸다.

“하지 말고 그냥 올라가자.”

“하지 말긴 뭘 하지 마. 나도 애 둘 키우는 사람 입장에서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젊은 사람이 해도 너 하잖아.”

“여보?”

“당신은 가만히 좀 있어. 이봐요. 아가씨?”

여자는 남편이 들고 있던 봉지에서 무언가를 급하게 꺼내 김선민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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