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누가 함부로 끼어들래!
“아까 선생님 수술실 들어가실 때부터 한두 분씩 오더니 금방 이렇게 됐어요. 그리고 다들 같…….”
“환자들 증상이 같고요.”
임정숙 간호사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태경이 확신한 듯 말했다.
“네, 선생님. 맞아요.”
“다들 엔테라이티스(Enteritis, 장염)죠?”
“네, 선생님.”
조금 전, 응급실에 들어선 순간 환자들이 외치는 증상과 오더를 내리는 의료진의 소리를 듣고 장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 환자들에게서 느껴지는 다섯 번째 바이탈이었다.
비교적 심각하지 않은 1단계인 시큼한 냄새와 2단계인 암모니아 냄새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태경에게는 생각보다 냄새가 고약했다.
가벼운 냄새라도 여러 사람에게서 응집되니 냄새의 강도가 제법 강하게 후각을 침범했다.
“어디 특정 식당이나 모임 같은 곳에서 같이 음식을 먹은 건가?”
“네. 환자들이 다들 브런치 카페 음식을 먹었더라고요.”
어제 인근 초등학교에서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었다.
참관 수업이 끝난 학부모들은 삼삼오오 모여 근처에 있는 유명한 카페를 찾아 디저트와 함께 음료를 마시며 아이들 교육의 관에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먹은 음식이 잘못됐는지 다들 몇 시간 뒤부터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며 장염 증세를 보인 것이다.
문제는 그 카페가 매장도 상당히 크고 멋진 인테리어로 입소문을 탄 곳이었다. 그래서 참관 수업을 갔던 학부모들 말고도 그만큼 장염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도 처음에 몰랐는데 주변에 내과병원 몇 군데서 환자 받을 수 있냐는 문의가 와서 자세히 알게 됐어요.”
임정숙 간호사의 말대로 주변 일대 로컬 병원에는 카페에서 음식을 먹었던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렇게 하죠. 언제든지 응급환자가 생길 수도 있고 우리도 오늘 수술 일정이 있으니, 최대로 85% 정도만 환자를 받아요.”
“네, 선생님.”
장염에 걸린 사람들이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병원 내 모든 인력이 장염 증세로 오는 환자를 전부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병원 사정과 응급환자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염이 가벼운 증상이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장염 환자를 오는 대로 전부 보다가 진짜 생명이 위급한 환자들이 치료받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태경은 그 점을 조율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인근 병원에 전화해서 환자 여유가 있는지 확인하고 환자들에게도 알려 주세요. 접수하면서 대략적인 대기 시간도 고지하고요.”
“네, 선생님. 너무 오래 걸릴 거 같은 접수 환자에게도 알려 줄게요.”
“그래요. 그리고 응급실 자리가 없으면 이동 베드 준비하고 공간 확보해서 수액 환자 사용할 수 있도록 하세요.”
오더를 들은 임정숙 간호사는 최 팀장에게 도움을 청한 뒤 급히 응급실로 들어갔다.
“일단 나도 좀 도와주다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 퇴근할게.”
“그게 좋겠어요.”
옆에서 함께 상황을 지켜보던 이동훈 역시 퇴근을 미루고 응급실로 이동했다.
그 뒤, 태경은 복잡한 응급실이 더 복잡해지는 걸 막기 위해 비교적 증상이 심하진 않은 환자들을 구분하여 진료실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배가 불편하시다고요?”
초등학생 자녀의 손을 잡고 들어온 여자가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네, 선생님.”
“환자분께서도 oo 카페 음식 드신 건가요?”
“맞아요. 참관 수업 갔다가 같은 반 엄마들끼리 가서 음료랑 디저트 몇 개 시켜서 같이 먹었거든요. 근데 뭐가 잘못됐는지 오후부터 배가 살살 아프더니 설사도 계속 나오고……. 밤새 아주 혼났어요.”
“고생하셨네요. 지금도 설사는 계속하세요?”
“아니요. 저녁 늦게까지 그러다가 다 내보내고 따뜻한 물이랑 이온 음료도 좀 마시고 그러니까 괜찮더라고요.”
“잘하셨네요. 제가 좀 볼게요.”
태경은 청진기로 진찰하고 꼼꼼하게 환자를 살폈다.
“장염인데 현재 심한 탈수 증세도 없고 크게 심각하진 않아요. 주사 한 대 놔 드리고 약 처방해드릴게요. 며칠 음식 조심해서 드시고 찬 거도 조심하세요. 그리고 아이들이랑 수건은 따로 사용하시고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한동안 진료실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은 태경은 계속 환자를 진료했다.
“지금 상태를 보니까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해요.”
“네, 선생님. 저도 그래야 기운이 좀 날 거 같아요.”
“그런데 지금 응급실도 그렇고 수액실도 그렇고 환자분들이 다 차서 복도에서 설치한 베드에서 맞아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전혀 상관없어요. 장소가 뭐가 중요해요. 내가 힘든데 수액만 맞으면 되죠.”
“그러면 준비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환자가 꾸벅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간 뒤 임정숙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선생님 다음 환자…….”
“죄송!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다음 환자 안내를 위해 말하던 임정숙 간호사의 말이 별안간 들려온 고성에 뚝 끊겼다.
“무슨 일이에요?”
진료를 준비하던 태경도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쎄요……. 저도 가 봐야 할 거 같아요.”
계속 들려오는 고성에 결국 태경도 대기실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접수처로 향하자 50대 남녀가 환자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
“원장님, 나오셨습니까? 저 두 사람이 카페 사장이라고 하네요.”
상황을 지켜보던 최 팀장이 태경에게 다가와 설명했다.
카페 사장이자 부부인 두 사람이 인근 병원을 돌며 장염에 걸린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있던 거였다.
그러다 화가 유난히 많이 난 한 남자가 두 사람에게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목소리를 높이던 중이었다.
“저희가 어떤 음식이 문제인지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로 병원을 오게 된 분들의 치료비를 책임지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불편하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뭐! 치료비 책임? 야, 이 사람아 그게 지금 말이야, 막걸리야? 내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인데 당신네 음식 먹고 오늘 하루 통으로 날렸어. 어떡할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고객님.”
“죄송이고 나발이고 내 하루 벌이 당신들이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야? 음식으로 장난치는 놈들은 귀싸대기를 맞아야 해.”
화가 잔뜩 난 남자의 언변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저 사람은 아까까지 핸드폰 게임 하고 있었거든요. 어째 좀 음흉한 기분도 들고 저렇게 기운이 뻗치는 걸 보니 그렇게 아픈 거 같지는 않아 보이네요. 안 그렇습니까, 원장님?”
“그러게요.”
최 팀장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사실 태경도 최 팀장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중이었다.
의사로서 수많은 환자를 겪어 보고 이런 비슷한 일도 많았기에 의료진들은 환자를 보면 어느 정도 어떤 사람이겠거니 하는 느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남자 환자는 어째 배가 아픈 것보다 다른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일단 저 남자는 대기실에 있는 다른 환자보다 증상이 상당히 약한 쪽이라고 판단했다.
몸에 작은 상처 하나만 나도 신경 쓰이는 게 사람 심리인데, 장염은 오죽하겠는가.
복통에 계속 설사를 하고 기운이 쏙 빠지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누워 있고 싶다.
현재 대기실에 있는 다른 장염 환자들만 봐도 그 차이가 확연했다.
물론 카페 음식을 먹고 장염에 걸려 저 사장 부부를 보는 시선이 너그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들 몸이 힘드니 뭐라고 할 기운도 없고 빨리 진료를 보고 쉬고 싶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혼자 기운이 넘치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조금 전, 최 팀장의 말대로 사장 부부가 오기 전까지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랬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건,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다섯 번째 바이탈이 가장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 모든 걸 종합했을 때 남자는 몸이 힘든 것보다 장염 증상을 구실 삼아 치료비를 꽤 받으려는 걸 수도 있었다.
“당신들 어떡할 거야? 어! 내가 밤새 배 아프고 설사하고 아주 죽을 뻔했어. 카페 음식 먹고 당신들이 나 죽일 뻔했다고!!!”
말투와 행동이 점점 커지는 남자를 보며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은 태경이 한마디를 하려고 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죽지 않아요.”
대기실 환자들 틈 어딘가에 앉아있던 남자아이가 불쑥 나오며 말했다.
“음식을 먹고 배가 아프고 설사가 나오는 건 죽는 게 아니라 음식에 의한 세균과 바이러스 등으로 인한 엔테라이티스라고 하는 증상일 거예요.”
“뭐, 뭐라고? 엔터뭐시기?”
덤덤한 표정과 차분한 눈빛으로 말한 아이를 본 남자는 황당한 듯 되물었다.
“언테라이티스는 우리나라 말로 장염이라고 하며 스펠링은 E, N, T, E, R, I, T, I, S입니다. 그리고 아픈 사람들이 치료받는 병원에서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면 안 돼요. 병원에서는 가능하면 조용히 말해야 해요.”
갑작스러운 아이의 말에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남자는 기분이 불쾌한 듯 언성을 더 높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야! 너,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누가 함부로 끼어들래! 어?”
“끼어들긴 누가 끼어들어요? 아가 이리 와. 똑똑하기도 해라.”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 할머니가 남자아이를 데리고 자리로 들어오며 한마디를 쏘아붙였다.
“애가 맞는 소리만 골라서 했구만 무식이 용감이라고 목소리만 커서 애만도 못하네.”
“뭐, 뭐요? 이 노인네가?”
“이보세요! 환자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던 태경이 남자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지금 병원에서 뭐 하시는 겁니까?”
“……예?”
태경이 불편한 표정으로 말하자 남자는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여기, 선생님이세요?”
“가운 안 보이세요? 우리 병원 대표 원장님이세요.”
한 발 물러서 있던 최 팀장이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새초롬하게 말했다.
“아. 여기 원장님이시구나. 원장님도 제 말 들으셨으면 알겠네요. 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전날 죽을 듯이 설사로 그 뭐냐……. 그래 탈수. 탈수까지 오고…….”
“말씀 중에 실례지만 환자분은 탈수 증세는 아닙니다.”
“예?”
“그리고 한마디 더 하자면 설사도 심하게 하지 않았을 거고, 장염 증상 또한 심한 편이 아닌 거 같네요.”
“그게 지금 무슨 소리예요?”
“하긴 저 사람 아무리 봐도 아픈 사람으로 안 보이는데?”
“그러게. 여기 장염이라고 온 사람들 다들 비리비리하고 기운 없어 하는데 혼자만 기차 화통 삶은 것처럼 쌩쌩하잖아.”
“맞아요. 아무리 봐도 아픈 사람 같지 않네요.”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은 한마디씩 거들며 이상한 눈초리로 남자를 쳐다봤다.
“이 사람들이 생사람을 잡네. 내가 아프다는데 왜? 니들이 난리야? 사람들 수준 하고는. 그리고 당신 나한테 아까 뭐라고 했어? 장염이 심하지 않은 거 같다고? 당신 의사 맞아? 돌팔이 아니야? 기분 나빠서 다른 병원에 가든지 해야지.”
“그러세요.”
여전히 큰소리치는 남자에게 태경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