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제 이름은 승우입니다
“장염이 심하지 않은 거 같다고? 당신 의사 맞아? 돌팔이 아니야? 기분 나빠서 다른 병원에 가든지 해야지.”
“그러세요.”
여전히 큰소리치는 남자에게 태경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돌팔이 의사한테 치료받기 싫을 텐데 다른 병원으로 가셔도 할 말이 없네요. 그리고 저희도 이렇게 병원에서 막무가내로 소란 피우는 사람은 진료 보기 어렵습니다. 진료 받고 싶으면 다른 분들처럼 조용히 기다려 주세요.”
“뭐야! 당신 원장이라는 양반이 환자 응대를 이따위로 해도 돼?”
살짝 당황하던 남자는 자기에게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더니 더 목소리를 더 높였다.
“딱 보니까 나보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 사람이 원장이랍시고 환자에게 함부로 하나 본데, 당신 의사라는 사람이 그러면 안 돼.”
“세상에,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하더니 딱 그 꼴이네. 이봐요. 아저씨?”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대기실에 앉아 있던 중년 여자가 혀를 차며 남자를 나무랐다.
“아까부터 아저씨가 소란 피우고 있는데 왜 멀쩡한 원장님한테 그래요.”
“누가 아니래요. 우리병원 처음 왔나 봐. 아저씨. 세상 어디를 가도 우리 원장님 같은 의사 없어요. 어디서 원장님을 내리 까고 있어.”
“저 양반 기운이 뻗치는 게 가짜로 아픈 척하는 거 같네.”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남자에게 한마디씩 던졌다.
“뭐야! 당신 말 다했어? 젠장! 의사도 환자도 다들 이상한 게 뭔 놈의 병원이 이래? 그리고 내가 아까부터 진료 기다렸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환자분 접수하셨나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됐어! 내가 진료 안 봐. 간다. 어! 내가 가.”
태경이 정색한 얼굴로 이름을 묻자 남자는 갑자기 손을 흔들며 진료를 안 본다고 소리쳤다.
“환자분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시고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마세요. 여기 병원이고 아픈 사람들 치료받는 곳이에요. 아까 저 아이의 말대로 병원에서 이렇게 떠들면 안 됩니다.”
“아니, 근데 이 의사가 보자 보자 하니까…….”
“장 요원님.”
끝까지 입만 살은 남자가 또다시 목소리에 힘을 주려던 그때 태경이 응급실에서 이동 베드를 가지고 나오던 장득칠을 불렀다.
“예, 원장님.”
“여기 이분 밖으로 안내 좀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절 따라오시죠.”
“……!”
범상치 않은 얼굴과 한 덩치, 그리고 얼굴에 자상을 한 장득칠을 본 남자는 순식간에 분노가 사라진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따라오시라니까요. 뭐 할 말 있으세요?”
“아, 아니요. 없습니다.”
남자는 결국 장득칠의 안내를 받으며 병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시끄러웠던 대기실이 조용해지고 태경은 다시 진료에 집중했다.
“임 선생님, 다음 환자분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작은 소동이 정리되고 태경을 비롯한 우리병원 식구들을 다시 진료에 매진했다.
“처방전 받으시고요 병원 정문 나가서 조금만 내려가시면 약국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수액을 맞으니까 이제 좀 살 거 같네. 선생님들 고생하셨어요.”
“네, 안녕히 가세요.”
다들 저녁 먹을 시간조차 없이 진료에 열중하고, 완전히 어두워진 즈음에야 다들 여유가 생겼다.
“일을 많이 해서 그런가. 오늘 유난히 저녁이 더 맛있네요.”
“오늘같이 빡세게 일한 날은 배가 고프고도 남죠. 그런데 이 쌤 벌써 두 그릇째 아니에요?”
직원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이찬희와 한 테이블에 앉은 간호사가 물었다.
“닭개장이 얼큰하니 끝내주네요.”
“오늘 진짜 정신없지 않았어요?”
“정말 역대급이었어요. 그래도 사고가 아니라 장염 환자여서 이 정도로 끝난 거 같아요.”
“맞아요. 솔직히 진짜 다중 추돌 TA(교통사고) 환자나 다른 사고 건이었으면 난리 났을 거 같아요.”
“누가 아니래요. 이 정도인 것도 감사하죠. 저 먼저 일어날게요. 천천히 식사하고 오세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이찬희가 식판을 정리하고 식당을 나가려다가 갑자기 얼굴에 화색을 띄웠다.
‘어! 모나?’
여자 친구인 최모나가 밥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찬희는 종일 일하고 집에 온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최모나 옆으로 다가갔다.
“모나, 모나, 개모나?”
“배고프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밥 들어가니까 아주 신났네.”
“아닌데, 개모나 봐서 신난 건대.”
“뭐래.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올래?”
“원래 사랑은 예고가 없다고 하잖아.”
“왜 이래 진짜? 밥 잘 먹고 허파에 바람 들었냐?”
“익숙해져. 오늘 닭개장 진짜 맛있다. 몸에 좋으니까 두 그릇 먹어.”
“한 그릇이면 충분해.”
“혼자 먹기 쓸쓸하지 않아? 같이 먹어 줄까?”
“그럼 내가 빠질게요.”
최모나의 어깨를 콕콕 찌르며 귀엽게 말하는 이찬희를 향해 뒤따라오며 임정숙 간호사가 말했다.
“최 쌤? 이 쌤이랑 먹을래요?”
“……!”
임정숙 간호사가 뒤따라오고 있는 줄 몰랐던 이찬희는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나 다른 테이블에서 먹어도 되는데…….”
“수 쌤 아닙니다. 이 선생 저녁 다 먹었습니다. 그렇지 이 선생?”
“예, 저 두 그릇이나 먹었어요. 최 선생한테 아까 환자 결과 때문에 물어보느라……. 하하! 저 이만 가 볼게요. 두 분 얼른 식사하세요. 맛있게 드세요.”
“이 쌤 더 있다 가요.”
부리나케 식당을 벗어나는 이찬희를 보며 임정숙 간호사는 놀렸고, 최모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휴, 놀래라. 수 쌤이 보통 눈치가 아닌데……. 혹시 들킨 건 아니겠지?”
“뭘 들켜?”
식당을 나와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하던 이찬희에게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태경이 말했다.
“아! 깜짝아.”
“죄지었어? 뭘 그렇게 놀라고그래.”
“죄를 지긴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러세요. 그나저나 선생님 저녁 안 드세요?”
“먹어야지. 오늘 환자들 몰려와서 정신없었을 텐데 수고 많았어.”
“진짜 오늘은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도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근데 아까부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세요?”
“왜? 내 표정이 어떤데?”
“뭔가 되게 흐뭇하시고 계속 은근히 웃고 계시잖아요. 정 쌤은 안 계시는데…….”
이찬희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의진을 찾았다.
“까분다. 또 까불어. 얘들 보고 있었어.”
태경은 여전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던 이찬희의 고개를 멈추며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애들을 가리켰다.
몇몇 아이들이 진료 보러 온 부모님들 기다리며 함께 앉아 놀고 있었다.
“처음 보는데 저렇게 금방 친해져서 노는 거 보면 애들은 애들이다. 찬희야, 귀엽지 않냐?”
“선생님, 쟤들 초딩들 같은데요?”
“그래 보이네. 근데 뭐 초등학생들은 귀여우면 안 돼?”
“아으! 말도 마세요. 제 조카가 초딩인데 완전 악동 그 자체예요. 그나저나 애들이 귀여우면 결혼할 때라고 했는데 혹시…….”
“혹시 뭐?”
“혹시 정 쌤이랑 결혼 계획 중이세요?”
“글쎄? 근데 왜 난 나보다 먼저 갈 거 같지?”
“예? 누가요?”
“너.”
“저, 저요!?”
“어. 너.”
“무슨 말씀이세요. 결혼은 뭐 혼자 하나요.”
“혼자는 무슨 혼자야. 이쯤에서 그만 이실직고하지그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 전혀 모르겠는데요?”
“너, 최모나랑 만나고 있지?”
“예~~에!!”
태경이 작게 말하자 놀란 이찬희가 크게 반응하며 딱 잡아뗐다.
마음 같아서는 솔직히 다 말하고 싶었지만, 당분간은 병원 사람들에게 조심하기로 했기에 일단은 모른 척하기로 했다.
“선생님 잘못 보셨어요. 저랑 개모나 사이 알면서 제가 어떻게 최 선생을 만나요.”
“그래?”
“그럼요. 최 선생은 제 스타일도 아닐뿐더러 저랑 전혀 안 맞아……!”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못을 박으며 말하던 이찬희는 식당에서 나오던 최모나와 눈이 마주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선생님, 저 이만 응급실 들어가 볼게요.”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응급실로 들어가는 최모나의 뒤를 급히 따라갔다.
“저 정도면 우리 사귄다고 다 티 내는 거 아닌가?”
“누가 아니래요. 당사자인 둘만 딱 시치미 떼고 있는데 얼마나 웃긴지 몰라요.”
임정숙 간호사는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한 미소로 말했다.
“언제까지 저럴 수 있나 한번 지켜보자고요. 저녁 먹고 올게요.”
“네, 선생님.”
잠시 뒤, 저녁을 먹고 나온 태경은 응급실 상황을 살핀 뒤 접수처 근처에서 최 팀장과 대화하고 있었다.
“계산되셨고요. 여기 처방전이랑 영수증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아까 접수하러 오셨을 때보다는 안색이 좋으시네요.”
접수처 직원은 계산하며 환자와 대화하고 있었다.
“그렇죠? 방금 화장실 갔다 왔는데 이제야 사람 얼굴 같더라고요. 장염이 여러 사람 잡았네요.”
“장염이 우습게 볼 게 아니에요.”
“누가 아니래요. 전 지금까지 장염으로 크게 고생한 적이 없어서 이번에 아주 혼났다니까요.”
“고생하셨네요.”
“진짜 혼이 쏙 빠지는 거 같더라고요.”
“그런데 남매가 사이가 참 좋네요. 애들 초등학생이죠? 우리 조카들은 엄청 싸우거든요.”
“초등학생이 맞긴 한데……. 그런데 남매라니요?”
진료비를 계산하던 여자 환자는 접수처 직원의 말에 당황스러운 듯 되물었다.
“저기 쟤들이요.”
접수처 직원이 민망한 표정으로 대기실 의자 쪽을 가리키자 여자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나란히 앉아 책을 보면서 이따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쟤네 둘이요?”
“네, 남매 아니에요?”
그냥 언뜻 보기에는 사이좋은 남매로 보일 법한 모습이었기에 접수처 직원은 별 뜻 없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어머, 아니에요.”
“그래요? 아이들이 사이좋게 놀고 있길래 전 남매 사이인 줄 알았어요.”
“선영아?”
여자가 책을 보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이름을 부르자 여자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엄마, 다 끝났어?”
“응. 다 끝났어. 보셨죠? 얘만 제 딸이에요. 전 딸 하나만 있어요.”
“아! 그러시구나. 어머! 제가 실례했네요. 죄송해요.”
“그게 왜 죄송해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책 보고 있었어?”
“응. 근데 엄마 나랑 같이 책 보던 남자애 엄청 똑똑하다.”
“그래? 공부 잘하겠네. 우리 딸도 좀 똑똑하면 좋겠는데.”
“치. 언제는 뭐 건강하게만 자라라면서.”
“건강하고 똑똑하면 더 좋지.”
즐거운 대화를 하며 병원을 나서는 모녀를 보고 있던 접수처 직원의 시선이 자연스레 혼자 남은 남자아이에게 향했다.
“그럼. 쟤 보호자는 어디 있지?”
“아직 치료받고 있나 보지.”
또 다른 직원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일하며 답했다.
“가끔 응급실에 부모들 아파서 오면 아이들 대기실에 와서 놀다가는 경우도 있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늘만 해도 장염 때문에 부모님을 따라온 아이들이 기다리다 지쳐 대기실에 꽤 많이 있었다.
더군다나 대기실 한쪽에는 아동 책과 스티커 북이 있어서 아이들이 시간 보내기가 좋았다.
“그런가?”
“정 궁금하면 애한테 부모님 기다리는 거냐고 물어봐.”
“그게 좋을 거 같아요.”
접수처 직원은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대기실 의자에 혼자 남은 아이에게 다가갔다.
“안녕!”
“안녕…… 하세요.”
“우리 친구는 이름이 뭐야?”
“제 이름은 승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