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28화 (327/472)

328화. 게임 좋아하니?

“어. 왜?”

“저기요? 여사님이 부르는 거 같은데요?”

의진이 대화를 하다말고 맞은편을 가리키자 오계순이 다급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원장님? 휴! 숨 차라.”

“저 찾으셨어요?”

“응급실 갔다 진료실 갔다 내 한참 찾았습니다.”

“혹시 아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게 아니라 아가 좀 희한한 말을 하던데 원장님이 들어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서예.”

“희한한 말이요?”

태경은 곧장 오계순, 의진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안에는 승우를 위해 만들고 있는 반찬에서 나는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승우야?”

“네.”

“승우가 아까 할미한테 했던 말 원장님한테도 해 줄 수 있나?”

책을 보고 있던 승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할미가 우리 승우 왜 병원에 있는지 물었지? 그거 한 반만 다시 말해 봐라.”

“누나가 병원에 있으라고 했어요.”

“엄마는 외계인 구하러 갔다는 그 누나?”

“네. 누나. 내가 사랑하는 우리 누나요.”

생각해 보니 태경은 처음부터 아이에게 어떻게 병원에 왔는지를 물었을 뿐 왜 병원에 있는지에 관한 건 묻지 않았다.

비슷한 소리 같지만, 승우 같은 경우 정확하게 짚어 주는 게 아이가 이해하기 더 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승우야. 그런데 누나가 왜 병원에 있으라고 했어?”

드르륵-

이유를 묻자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승우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태경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김태경, 선생님. 죄송하지만 우리 승우를 부탁해요. 승우와 저는 이 세상에 단 둘뿐이에요. 제가 없으면 승우를 돌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이런 부탁드려서 죄송하지만, 우리 승우를 부탁드려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

“…….”

드르륵-

말을 끝낸 승우는 다시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고, 태경과 의진을 비롯한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다른 직원들까지. 전부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승우야?”

정신을 차린 태경이 무릎을 꿇고 승우에게 물었다.

“지금 한 말 누나가 한 말이니?”

“네, 누나가 김태경 선생님한테 이렇게 말하라고 알려 줬어요.”

“승우야, 누나가 혹시 어디 아프니?”

“아니요. 우리 누나 안 아파요.”

“누나가 왜 선생님한테 그 말을 남겼는지 물어봐도 될까? 승우 혹시 알아?”

“누나는 엄마는 외계인을 구하러 갔으니까요.”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집중한 게 민망할 정도의 대답이 돌아왔다.

어찌 보면 승우한테는 가장 정확한 대답이었겠지만, 태경을 비롯한 지켜보는 사람들은 힘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자! 승우야, 밥 먹자.”

“밥 먹자.”

“배 많이 고팠지. 얼른 먹어.”

그사이 요리를 마친 주방 직원들이 밥과 반찬을 가져왔다.

“원장님, 이 일을 어떡하죠? 그 누나라는 사람 아무래도…….”

“팀장님!”

뭔가 다급하게 말하려는 최 팀장의 말을 태경이 단호한 눈빛과 함께 딱 잘랐다.

“승우가 들어요.”

그리고 그가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아이 앞이라는 걸 주의시켰다.

“일단 승우는 밥부터 먹게 하죠. 승우야, 천천히 많이 먹어.”

“네. 천천히 꼭꼭 여러 번 씹어서 먹어요. 급하게 먹으면 몸에 안 좋아요.”

“그래. 맞아. 여사님, 승우 좀 봐주세요.”

심각했던 표정을 잠시 걷은 태경은 따뜻한 표정으로 승우에게 말한 뒤 오계순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식당을 나왔다.

“원장님, 이거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닌 거 같습니다. 그 누나라는 사람이 아무래도 극단적인 생각을 한 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팀장님 의견과 같아요.”

임정숙 간호사 또한 심각한 표정으로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승우가 한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고, 누나가 남겼다는 말 자체만 보면 그런 느낌이 강해요.”

“저도 그래요. 무엇보다 아까 누나가 승우랑 본인 둘뿐이라고 했는데, 혼자 동생을 키우다가 많이 힘들었던 건 아닌가 싶어요.”

태경의 생각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승우가 한 말을 듣고 누나가 극단적인 방법을 시도했다고 완전히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상황을 두고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도 배제할 수 없었다.

누나라는 사람이 왜 동생인 승우를 그것도 자신에게 부탁한다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승우의 가족인 누나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얼마 전, 응급실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던 어린 여자 환자가 떠올라 태경은 이 남매에게 더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원장님. 이 일을 어떡하죠?”

“도와야죠. 우리 병원에 왜 아이를 보냈는지 이런 이유는 나중에 궁금해해도 늦지 않으니까 일단 승우 누나의 안전을 확인해야죠.”

“그럼 승우한테 누나 핸드폰 번호랑 정보를 물어보면 어떨까요?”

“그게 좋겠어요. 그리고 팀장님? 승우 데려왔다던 사람 연락 어떻게 됐어요?”

“전화를 받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문자를 남기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겠어요. 연락 오면 저한테 바로 알려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저기 원장님?”

식당으로 향하려던 태경을 전화를 받은 임정숙 간호사가 불렀다.

“병동 호출인데요? 307호 고미린 환자요.”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호출받은 태경은 최 팀장에게 일을 맡긴 뒤 병동으로 향했다.

다행히 호출했던 환자는 위급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1층으로 내려온 태경은 잠시 응급실 상황을 살펴본 뒤 다시 식당으로 향했다.

“집 전화번호는 알아?”

“몰라요.”

“그럼 집 주소만 살짝 알려 줄래?”

“저는 몰라요.”

“승우야, 아저씨한테 알려 줘라. 응?”

“몰라요.”

“어떻게 됐어요?”

“원장님,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요?”

두 사람은 한쪽으로 자리를 옮긴 뒤 대화를 이어 갔다.

“왜요?”

“말도 마세요. 완전 철벽이 따로 없습니다.”

“말을 안 해요?”

“무조건 모른대요. 누나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다고 하고, 핸드폰 번호를 물으니 모른다고 해요.”

학교가 어디인지 사는 동네가 어디인지 집 전화번호가 있는지 등 여러 가지 물었다. 하지만 승우의 예쁜 입술에서는 메아리처럼 같은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제가 그럼 선생님이랑 아저씨랑 잠깐 밖에 나갔다 올까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다네요.”

답답한 최 팀장은 아이를 데리고 경찰서까지 갈 생각도 했지만, 승우는 병원에서 나가면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병원을 나서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 같았다.

“원장님, 그래서 제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요. 승우가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르잖아요. 처음에는 일부러 말을 안 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이쯤 되니까 정말 모르는 거 같더라고요. 보세요?”

최 팀장은 손끝으로 승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순수한 표정이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지는 않아요.”

“그건 아닐 거예요.”

“예!?”

“승우의 표정이 순수한 건 맞는데, 아마도 일부러 말을 안 하는 거 같아요.”

“일부러요?”

“네.”

태경은 승우가 누나에 대한 정보를 모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단 승우는 일반 아이들과 다른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아이다.

이런 동생에게 누나는 집 주소와 자기 핸드폰 번호 등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여러 번 주입했을 것이다.

보통 일반 아이를 키우는 경우에도 그런 경우가 많은데, 승우의 경우라면 더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밖에서 혹시라도 동생이 길을 잃거나 일이 생겼을 때 주변 사람들이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승우는 천재적인 기질을 타고난 아이였다.

한 번 본 것도 디테일하게 기억하는 아이가 누나에 대한 정보를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아마 추측하건대 승우가 계속 모른다고 한 건 누나가 그렇게 대답을 하라고 시켰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어떡하죠? 원장님. 그냥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분들이 와서 조사하게 할까요?”

“그것도 방법이긴 한데 아마 경찰이 와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정보를 알아야 뭘 도움을 주든지 하지. 이거야 원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는 격이네요. 방법이 없으니 도움을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네?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세요?”

“승우에게 통할지 모르겠는데 한번 해 보려고요.”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정보를 알아내겠다는 건지. 최 팀장은 밥을 다 먹은 승우를 데리고 식당을 나가는 태경을 보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밥 맛있게 잘 먹었어?”

태경은 승우와 함께 의국실로 들어왔다.

“네. 맛있게 먹었어요.”

“뭐 먹었어?”

“분홍 소시지랑 계란말이, 고구마 줄기 볶음과 소고기뭇국이랑 검은 쌀밥이요.”

“맛있는 거 많이 먹었네. 우리 승우 안 졸려?”

“아직 안 졸려요. 집이 아닌 곳이니까 잠이 오려면 좀 더 적응이 필요해요.”

“그래, 맞아. 낯선 곳에서는 쉽게 잠이 안 오지. 승우야? 우리 승우 게임 좋아하니?”

“게임! 네, 게임 좋아해요.”

“그래? 그럼 잠이 올 때까지 게임을 해 볼까?”

“좋아요.”

“지금부터 선생님이랑 간단한 게임을 할 거야. 게임에서 이기면 선생님이 선물 줄게.”

“선물?”

“응. 선생님이 엄청 아끼는 책인데 승우가 좋아할 거 같아서.”

태경이 의국실 한쪽에 있는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여기 있다. 어때?”

그 책은 인체에 관한 책으로 주로 의사들이 보는 책이었다.

사람 몸속에 관한 여러 가지 사진과 설명이 가득한 책으로, 인체를 좋아하는 승우가 좋아할 책이었다.

“오!”

역시나 예상대로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승우의 반응은 확실했다.

“오! 선생님, 책 보고 싶어요.”

“그렇지? 보고 싶지? 게임을 해서 승우가 이기면 줄게.”

“게임에서 이기면.”

“맞아. 우리가 어떤 게임을 할 거냐 하면 승우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

“네. 그림 좋아해요.”

“그래? 그림 그리기 게임을 할 건데. 우리 동네 풍경을 그릴 거야.”

“우리 동네 풍경?”

“승우, 풍경이라는 말 알아?”

“정경이나 상황 또는 자연 경치 등을 일컫는 말이에요.”

“맞아. 내가 살고 있는 집과 동네를 그리면 돼. 더 멋지고 정확하게 그리는 사람이 스티커를 받고 많이 받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야.”

“아~!”

“그럼 선생님이 먼저 보여 줄 테니까 잘 봐.”

“네.”

태경은 볼펜을 이용해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 승우야. 이게 뭔 줄 알아?”

“집이요.”

“그래 맞아. 여기는 선생님이 사는 집이야. 선생님은 이 집 가장 꼭대기 옥상에 살아. 그리고 집 앞에는 이런 높은 언덕이 있어. 이 언덕을 따라 내려가면 작은 편의점이 있거든. 선생님은 가끔 여기서 라면이나 간식을 사기도 해. 그리고 이 옆은 사람들이 사는 집들이 이렇게 붙어 있고 그 밑에는 떡볶이랑 순대를 파는 황제 분식점이 있어.”

태경은 어설픈 그림 실력으로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얼핏 보면 그저 단순한 동네 모습 같아 보이는 이 그림에는 비밀이 있었다.

바로 승우네 집을 찾기 위한 일종의 지도로, 일부러 집을 중심으로 동네 풍경을 그리도록 유도한 것이다.

태경은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뛰어난 승우가 집주변을 정확하게 그릴 거라고 예상했다.

“선생님은 다 그렸다. 이번에는 승우가 한번 그려 볼래?”

“…….”

“왜? 그림 그리기 싫어?”

그림을 그려보라는 말에 승우는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태경은 혹시나 그리기 싫은 건 아닌가 긴장하며 물었다.

“승우야, 그리기 싫으면 굳이 안 그려도 돼.”

“……필은 없어요?”

“뭐?”

“색연필이요. 그림 그릴 때 색연필이 있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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