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29화 (328/472)

329화. 직감

“뭐?”

“색연필이요. 그림 그릴 때 색연필이 있어야 해요.”

승우는 그림을 그리기 싫은 게 아니라 색연필이 필요했던 거였다.

집에서도, 이웃집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있을 때도 그렇고 항상 색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아! 그래? 색연필. 당연히 되지. 선생님이 얼른 색연필 갖다 줄게.”

태경은 바로 대기실에 있는 색연필을 가져왔다.

“자! 여기. 색연필 있다. 이제 그림 그릴 수 있지?”

“네. 그릴 수 있어요.”

앞뒤로 살짝 몸을 흔들던 의미 없는 움직임이 멈추고 리듬을 타듯 꼬물거리던 귀여운 손가락이 색연필 뚜껑을 열었다.

승우는 망설임 없이 색연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그림을 그릴 종이 옆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또 색연필을 꺼내고 또다시 다른 색깔의 색연필을 연달아 계속 꺼냈다.

“……!”

처음에는 무슨 행동인가 의아하던 태경은 승우가 내려놓은 색연필을 보며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색깔별로 밝은 색깔부터 진한 색깔까지 단계적으로 정리를 해 둔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삐져나온 것 없이 모든 색연필의 키를 전부 맞춰 놓았다.

반드시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것부터 지금 행동까지, 그림을 그리기 전 승우의 루틴이라고 태경은 생각했다.

“준비 다 됐어?”

고개를 끄덕인 승우는 갈색 색연필을 손에 쥐더니 흰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림을 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태경은 역시나 자기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함과 동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승우의 그림 속 디테일이 예상보다 더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승우야. 그게 뭐야?”

“이건 우리 집이에요.”

“승우가 사는 집이구나.”

정면에서 올라가는 계단을 그린 승우는 창문 밖에 설치된 방범창과 밖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까지 디테일하게 그렸다.

놀라운 건, 집 앞에 있는 전봇대 전깃줄의 개수까지 디테일하게 그려 나갔다.

“집 앞에는 전봇대가 있고, 그 옆에는 파란색 트럭이 항상 주차되어 있어요.”

“그래? 트럭이 아주 멋있네.”

파란색 색연필로 거침없이 트럭을 표현한 승우는 갈색 벽돌을 채워 나가며 옆집을 그렸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작은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과 그 옆으로는 적당한 높이의 건물을 그려 나갔다.

“여기는 옷이 많네.”

“네. 여기는 깨끗한 세탁소예요.”

그림이 워낙 디테일해 세탁소인 걸 알았지만, 태경은 일부러 모른 척 확인하듯 물었다.

승우는 깨끗한 세탁소 글자가 쓰인 간판을 그려 나가며 그 아래 전화번호까지 그리는 정교함을 잊지 않았다.

그 뒤로도 집 근처에 있는 중국집과 미용실을 그리며 역시 간판과 전화번호까지 채워 넣었다.

‘됐어. 이거면 충분해.’

그림을 보고 있던 태경은 만족감을 드러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 그렸어요.”

“승우야? 이거 어떡하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승우가 이겼는데? 승우가 그림이 정말 잘 그리는구나? 진짜 멋있다.”

“승우가 이겼어요?”

“이겼지.”

태경은 최 팀장을 불러 아이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승우의 그림에 스티커를 전부 붙이게 했다.

“원장님, 이건 누가 봐도 승우 그림이 훨씬 더 잘 그렸는데요?”

“그렇죠?”

“이 스티커는 전부 승우의 그림에 붙이겠습니다.”

“그럼 게임 우승자는 우리 승우의 승리네. 자! 약속대로 선생님이 책 줄게.”

“우와! 우와! 감사합니다. 지금 읽어도 돼요?”

“그럼. 되지.”

승우는 곧장 책을 펼치고 금방 내용에 빠져들었다.

태경은 그림을 들고 최 팀장과 함께 의국실 문 밖으로 나왔다.

“그림 실력이 진짜 장난이 아니네요. 원장님 예상이 딱 맞았어요.”

“저도 이 정도로 잘 그릴 줄은 몰랐네요.”

“근데 여기 그림에 있는 가게 번호가 진짜일까……! 원장님!”

그림을 보며 핸드폰으로 검색하던 최 팀장은 동공까지 커지며 태경을 쳐다봤다.

“있어요. 있어!”

“그래요?”

“네. 원장님 이것 좀 보세요.”

최 팀장은 핸드폰으로 검색한 거리뷰에 있는 세탁소 사진을 보여 줬다.

“여기, 유리창에 노란 테이프 붙여 둔 거까지 그림이랑 똑같아요. 정말 소름입니다.”

세탁소의 깨진 유리창에 붙인 테이프까지 그릴 정도로 승우의 그림은 정교하고 정확했다.

“진짜 천재네 천재야.”

최 팀장은 의국실 문 너머로 책을 보고 있는 승우를 보고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 동네는 확실히 찾긴 찾았는데 그다음은 어떡하죠?”

“다음은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죠.”

태경의 성격상 마음 같아서는 직접 찾아가고 싶었지만, 병원에서 환자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전문가 누구요? 아! 설마……?”

“맞아요. 김 경사님이요.”

두 사람이 말한 김 경사는 아동학대 세라의 일부터 얼마 전 고등학생 마약 사건까지 도움을 줬던 김호민 경사였다.

잠시 뒤 연락을 받은 김 경사가 병원을 방문했다.

“저 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김 경사님, 시간도 늦고 바쁘실 텐데 이렇게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원장님도 참. 우리 사이에 무슨 그렇게 격식을 차려 인사를 하고 그러세요. 죄송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오랜만에 보는데 잘 지내셨죠?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저야 늘 잘 지내죠. 그리고 원장님이 강의 수락해 주신 덕분에 조카들이 절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거든요. 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갑자기 연락드린 이유는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입니다.”

“부탁이요? 원장님 부탁이라며 제가 뭐든 들어드릴게요.”

“지금 우리 병원에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한 명 있습니다.”

“남자아이요?”

“네, 잠깐 절 따라오세요.”

철컥-

김 경사와 함께 진료실을 나온 태경은 의국실 문 앞에 서서 안쪽을 가리켰다.

“저기, 안쪽 침대에서 자는 아이 보이죠?”

“네, 정말 남자아이네요.”

책에 푹 빠져 있던 승우는 어느새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저 아이 때문에 경사님을 불렀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는 김 경사에게 태경은 지금까지 모든 일을 빠르게 설명하며 그림을 보여 줬다.

“그러니까 저기 승우라는 아이가 그린 이 그림을 토대로 집을 찾아서 누나가 괜찮은지 봐 달라는 거죠?”

“네, 맞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아까 승우가 한 말이 사실일 수도 있으니까 확인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그러네요. 특히나 원장님 말씀대로 승우 같은 경우는 더 거짓말하기 힘들 거예요. 사건 때 자폐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제 경우는 그랬거든요.”

“자폐인이요?”

“예. 오래전에 살인 사건 때 여러 명의 목격자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진실을 말한 사람이 자폐 청년이었어요.”

김 경사가 신입 형사 시절 때 선배와 같이 살인 사건을 조사하던 때였다.

술집과 카페가 즐비한 한 건물 화장실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살인 사건이었다.

술을 함께 마시던 두 남자가 약간의 시비가 붙었고, 기분이 상한 남자가 화장실에 간 일행을 따라가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우발적인 사건이었기에 화장실을 들어오려던 사람과 안에 있던 두 사람까지 세 사람의 증인이 있었다.

그중 두 사람은 같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1층 카페에서 일하던 자폐 청년이었다.

살인을 저지른 당사자는 술에 만취해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발뺌했다. 게다가 그는 돈으로 증인들을 매수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가 간과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자폐 청년이었다.

그는 청년의 특이한 행동과 말투를 보며 지능이 떨어진 바보로 생각하며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 조사 때 화장실 칸 안쪽에서 우연히 상황을 지켜본 자폐 청년은 모두가 놀랄 정도로 디테일하게 증언했다.

결국 그 증언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한 경찰은 남자의 살인과 거짓말을 입증한 증거를 찾아 구속할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네, 원장님이 자폐 성향이라고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그 친구가 확 떠오르네요. 일단 제가 바로 찾아볼게요. 저렇게 어린 친구의 유일한 가족이라는데 도와줘야죠.”

“감사합니다. 김 경사님.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으실 텐데 오늘도 신세 지네요.”

“신세는요. 이것도 경찰이 할 일이죠. 그리고 제가 진짜 바쁘면 도와드리러 오지도 못했으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전 강의 하나면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잘 도와드릴게요.”

“그럼 제가 알아보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저기, 원장님?”

인사를 하고 가려던 김 경사가 급히 돌아서며 태경을 불러 세웠다.

“네. 경사님.”

“원장님. 그리고 이건 형사로서 제 직감인데요. 승우 누나가 환자로 왔던 사람일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실은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누나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으니까 딱 떠오르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병원을 오고 가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승우와 연관 짓기는 힘들었다.

“하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것도 어렵겠네요. 이래서 정보다 참 중요해요. 아무튼 제가 정보가 될 만한 걸 좀 알아보겠습니다.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눈뜨자마자 바로 움직일게요.”

“감사합니다. 경사님.”

김 경사가 병원을 나가고 태경은 의국실로 들어가 침대에서 자는 승우 옆으로 앉았다.

“지금 누구 때문에 병원이 뒤집혔는지도 모르고 잘 자네.”

피곤했는지 곤히 자는 승우를 보며 미소를 짓던 태경은 머리맡에 있는 캥거루 가방에 눈길이 갔다.

그 가방은 승우가 종일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으로, 생각해 보니 아까 화장실을 갈 때도 메고 갔었다. 아마도 그만큼 아끼는 가방 같았다.

혹시나 누나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가방을 열어 보기로 했다.

“뭐라도 나왔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간절한 마음과 달리 가방 안에서 나온 물건은 큐브와 감정 카드, 스티커, 손수건과 연필과 지우개가 들어 있는 필통이 전부였다.

“뭐가 없네. 승우야, 좋은 꿈 꾸고 잘 자.”

잠시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던 태경은 침대가 있는 쪽에 불을 끄며 의국실을 나와 응급실로 향했다.

* * *

다음 날-

일찍 일어난 김 경사는 출근 전, 승우네 동네를 찾았다.

세탁소의 간판과 전화번호 덕분에 동네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세탁소를 중심으로 승우가 그린 그림을 따라가자 남매가 사는 집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그림 솜씨가 진짜 대단하네.”

여러 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 빌라에 도착한 김 경사는 태경에게 들었던 대로 2층으로 올라가 벨을 눌렀다.

“계세요?”

예상했던 대로 문 안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문을 노크했지만 역시나 똑같았다.

“집에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안을 봐야 할 텐데…….”

일단 1층으로 다시 내려온 김 경사가 단서가 될 만한 게 있나 남매의 우편함을 열어 보려 하던 그때였다.

“뉘슈?”

손을 잡고 빌라 안으로 들어오던 두 노인 중 할머니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누군데 남의 집 우편함을 뒤지는 거요?”

조금 날이 선 말투로 김 경사의 얼굴을 째려보는 할머니는 평소 남매를 예뻐하던 이웃집 할머니였다.

“할멈. 진정해. 누구십니까?”

“처음 본 남자가 애들 집을 염탐하는데 진정하게 생겼어요?”

“두 분 202호 남매에 대해 좀 아세요?”

“…….”

“아, 어르신들. 저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OO 경찰서에서 일하는 김호민이라고 합니다.”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질문에 함구한 두 사람을 보며 김 경사는 명함을 건넸다.

“형사……님이세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형사님이 202호 우편함은 왜 보고 있는 거예요?”

“혹시 202호에 살고 있는 승우라는 아이 아십니까?”

“당연하죠.”

“물론입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동시에 대답하며 김 경사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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