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33화 (332/472)

333화. 키다리 아저씨

“어머! 맞네! 맞아.”

김선민의 얼굴을 빤히 보며 다가오던 여자가 거리를 좁히더니 확신의 찬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 김선민 맞지?”

주먹밥에 집중하고 있던 김선민은 여자의 얼굴을 잘 보지 못했다.

“김선민 맞아.”

앞선 말투보다 더 확신에 찬 말투로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또다시 말하자 김선민이 고개를 들어 여자를 쳐다봤다.

“……!”

그리고 고개를 들어 여자를 확인한 순간 김민선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근데 네가 왜 여기 있니?”

잔뜩 움츠러든 강아지처럼 본능적으로 긴장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김선민을 보며 여자의 딱딱한 말투가 이어졌다.

“너 이 동네 살아? 너 혹시…….”

“아니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선민은 자신을 부정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주먹밥을 재빨리 내려놓으며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얘? 저기요? 아닌가?”

등 뒤에서 메아리치듯 여자가 계속 불러 댔지만, 다급한 발걸음은 속도를 높일 뿐이었다.

온종일 울려 대던 꼬르륵 소리에 이제 겨우 한 입을 떼먹던 주먹밥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김선민은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늘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가슴에 품고 있는 승우의 존재도 잠시 잊을 만큼 예고 없이 마주친 여자의 존재가 그만큼 충격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난 김선민은 뛰고 또 뛰었다. 먹은 게 없어 뛰어갈 힘도 없을 텐데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목적 없이 한참을 뛰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작은 주차장 안쪽에 몸을 숨기듯 걸음을 멈췄다.

“하아! 하!”

턱 끝까지 차오르든 숨을 가까스로 토해 내던 그녀는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린 게 아주 겁대가리가 없구나? 어! 세상 무서운 줄 모르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더니 그러니까 교육이 이따위지.’

‘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이딴 짓거리나 저지르고 너도 참 인생 시궁창이다.’

‘너! 약속 꼭 지켜. 안 그러면 후회하게 될 거야. 알았어?’

빛바랜 서랍 속에 억지로 욱여넣은 옷처럼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외면했던 그 날의 기억이 송곳처럼 깨어나 마음을 찔러 댔다.

“하아!”

아랫입술을 꽉 깨문 김선민은 승우의 사진을 꺼냈다.

“아니. 후회……하지 않아. 난 후회하지 않아.”

마치 주문을 외우듯 혼잣말하던 그녀는 사진 속 승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한동안 그 자리에서 놀란 마음을 달랬다.

김선민은 힘든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었다.

* * *

우리병원-

“급하게 들어간 수술이라 정보도 부족해서 쉽지 않겠구나 싶었는데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

이제 막 응급 수술을 끝내고 수술실에서 나온 태경과 의진이 대화를 하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참! 아까 이 선생님이 수술 문제로 선배 좀 설득해 달라고 저 또 찾아왔었어요.”

“…….”

의진이 고개를 돌리자 태경이 아무런 반응 없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걷고 있었다.

“선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선배!”

“어. 왜? 나 불렀어?”

“아까부터 계속 나 혼자 이야기하고 있던 거 알아요?”

“아, 그랬어? 미안.”

“또 승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지 뭐.”

요즘 태경은 수술실을 들어갈 때와 진료 볼 때는 빼고는 계속 승우만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떻게 하면 승우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처음에는 병원 이름으로 후원금을 전달할까도 싶었지만, 결국 그건 단발성이기에 도움을 주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국가지원 이런 것도 있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찾아봤어.”

혹시나 한 마음에 국가지원에 대해서도 알아봤었다.

지자체를 통한 방과 후 돌봄이나 가족들의 심리상담 등 여러 프로그램이 있었다.

취지는 좋은 프로그램들이었지만, 현재 승우에게 당장 필요한 부분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듯싶었다.

“어느 분야나 비슷하겠지만, 사실 나라에서 지원하는 건 한계가 있을 거예요. 결국은 다 돈이 들어가잖아요.”

“그렇지.”

“승우한테 키다리 아저씨가 있었으면 좋겠다.”

“키다리 아저씨?”

“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데, 언니가 미국 출장 갔다 오면서 원서를 선물해 줘서 요즘 다시 읽고 있거든요. 그런데 문득 승우가 생각나더라고요. 승우에게 있는 비상함과 영특함을 알아봐 주는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면 아이가 더 넓은 미래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그러네. 지금 승우한테는 키다리 아저씨가 절실하네. 그래야 누나도 좀 마음이 편할 텐데……. 진짜 어디 그런 사람 없나?”

“사실 승우의 키다리 아저씨로 적합한 주인공이 딱 한 분 있긴 하죠.”

“있다고? 누구……!”

의진을 말을 듣고 생각하던 태경은 순간 번뜩하고 머릿속에 누군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기막힌 아이디어도 샘솟았다.

“지금 선배가 딱 생각한 그분 맞아요. 대한민국에 없는 거 빼고 모든 걸 다 가진 분.”

“의진아, 넌 천재야. 역시 내 여자친구야! 이뻐라.”

“선배도 참. 그렇게 좋아요?”

“좋지. 나, 보호자 대기실 갔다가 키다리 아저씨 섭외하러 간다.”

막혔던 부분이 뻥 뚫어진 듯 속이 시원해진 태경은 좋은 의견을 준 의진을 꼭 끌어안은 뒤, 기분 좋게 복도를 뛰어갔다.

“정의진 천재!”

“선배 조용히 좀 하고 가요. 저렇게 좋을까? 하긴 저게 김태경의 매력이지.”

의진은 태경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 * *

“아주 고얀 놈이야.”

“회장님, 머리 조심하세요.”

누가 그룹 김건형 회장이 우리병원 주차장에 차를 멈춘 뒤 내리고 있었다.

“누가 그렇게 고얀 놈인데요?”

“누구긴 누구야?”

김건형은 손가락으로 우리병원 건물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 원장이란 놈이지. 고 팀장,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네가 더 잘 알지?”

“그럼요. 잘 알죠.”

경호 팀장은 김건형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사실 말만 그렇게 할 뿐, 지금 김건형이 일부러 저렇게 말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전혀 심각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날 이렇게 함부로 오라 가라 하는 사람은 천하의 김태경이밖에 없을 거야. 다들 내가 바쁘니까 재계 모임 때도 내 일정에 맞춰서 모임 날짜를 정한다고.”

“알죠. 그런데 회장님 말씀과 달리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시는데요?”

“티 나나?”

“네, 아까 김 원장에게 연락받은 그때부터 좋아하셨습니다. 가만 보면 호랑이같이 불같은 회장님이 김태경 그 친구한테는 순한 양 같으십니다.”

“당연하지. 탐나는 인재를 데려오려면 그 사람 마음에 들게 행동해야 점수를 딸 거 아닌가? 자네, 내가 원하는 기업 인수할 때 최대한 그쪽 조건들 들어주는 거 알지?”

“알죠.”

“그거랑 같은 거야.”

“회장님은 아직도 김 원장을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포기는 누가 포기를 했다고 그래? 내 인생에 포기라는 건 해 본 적이 없어.”

“그렇긴 한데. 우리병원 이사장님 쪽에서 연락이 없잖아요.”

몇 달 전, 병원 인수 관련해서 김철기 쪽으로 자세한 내용을 전달했던 김건형은 아직도 확실한 답변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연락이 없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거지. 내가 보기에는 그 양반도 어지간히 신중한 사람인 거 같아.”

“오랫동안 몸담았던 병원이니만큼 신중한 게 당연하겠죠.”

“보통 양반이 아니야. 아무튼 생각해 보고 연락한다고 했으니 느긋하게 일단 기다려 보자고. 이런 일은 재촉하면 오히려 어그러지기 쉬워.”

“그런데 김 원장이 웬일로 회장님께 만나자는 연락을 한 걸까요?”

“왜겠어? 늙은이 약속을 두 번이나 거절했으니 본인도 미안했던 거지.”

김건형은 시간이 날 때마다 진료실에 들러 가볍게 찬 한잔을 하곤 했었다.

말이 차 한잔이지 태경에게 주기적으로 얼굴을 비추며 병원 합병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바쁜 병원 일로 태경이 어쩔 수 없이 약속을 거절한 적이 있었다. 김건형은 그 때문에 미안해서 자신을 부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도 병원 건에 관해 이야기하시려고요?”

“해야지.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그거 아니겠나.”

“회장님도 참 지치지도 않으십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지치면 안 돼. 계속 좋은 인재를 영입하고 발굴해서 회사를 발전시킬 생각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예. 그럼요.”

“뭐야, 고 팀장. 자네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아?”

“그럼요. 어서 들어가시죠. 회장님.”

김건형은 고 팀장과 함께 병원 뒷문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병원을 들어서자 최 팀장이 두 사람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저야. 늘 똑같습니다. 고 팀장도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에 뵙네요. 최 팀장님.”

“오늘은 외래 환자가 많은 모양이야.”

대기실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김건형이 물었다.

“네. 근래 장염에 걸린 환자들이 많아서 외래 환자들이 평소보다 더 있습니다.”

“병원이 환자가 많아야지. 그럼 우리 김 원장은 진료 중인가?”

“네, 회장님. 원장님 지금 진료 중입니다.”

“그럼, 대기실은 환자분들 앉아야 하니까 어디, 식당에서 커피 나 한잔하며 기다릴까?”

“그러시죠.”

“아니요. 회장님.”

최 팀장이 자연스럽게 식당 쪽으로 안내하려던 그때였다.

“잠시만요!”

이제 막 응급실에서 나온 임정숙 간호사가 나긋나긋한 말투로 김건형과 고 팀장의 진로를 막았다.

“수 간호사 선생님이시군요.”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회장님 어떡하죠? 지금 식당이 정신이 없어서 거기서 기다리시기 힘드실 거 같은데요.”

“예? 아니, 임 선생? 식당이 정신없을 일이 뭐가 있어요?”

“팀장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식당이야 늘 정. 신. 이. 없. 죠.”

해맑은 표정으로 반문하는 최 팀장을 향해 임정숙 간호사가 눈을 크게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있구나 싶은 최 팀장이 적당히 분위기를 맞췄다.

“내가 깜빡했네. 그러게 지금 식당이 딱 정신없을 시간이긴 하죠.”

“그럼 어쩌지? 고 팀장 우리 차에 가서 좀 기다릴까?”

“그러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차는 답답하시잖아요. 그러지 마시고 편하게 저희 의국실에서 기다리시는 건 어떠세요?”

“의국실이요?”

“네, 의국실이요.”

김건형이 되묻자 임정숙 간호사가 다시 한번 분명하게 답했다.

“아니, 의국실이야 의료진들 전용 공간인데 우리가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지금 선생님들 다들 진료 보고 계셔서 괜찮아요. 혹시 불편하셔서 그러세요?”

“불편하긴. 나야 신경 써 줘서 고마워서 그러지.”

“그럼 의국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원장님 진료 끝나면 제가 바로 알려 드릴게요.”

“그래요. 고마워요.”

“회장님,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김건형과 고 팀장을 따라 의국실로 들어가려는 최 팀장의 재킷 목 부분을 임정숙 간호사가 확 잡아끌며 의국실 문을 닫았다.

“……!”

“팀장~~니임!”

“아! 임 선생? 왜 그래요?”

“제발 눈치 좀 챙기세요.”

“눈치라니. 도대체 무슨 일인데 아까부터 눈에서 레이저를 쏘아 대는 거예요?”

“지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의국실을 따라 들어가려고 하세요. 네?”

“난 회장님 적적하실까 봐 말벗이라도 해 드리려고 했죠. 그런데 중요한 일이라니. 그게 뭔데요?”

“한 아이의 미래가 달린 일이라고요.”

“한 아이라면……. 승우군의 미래?”

“맞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래? 아니, 나만 모르게 중요한 일 있는 거 같은데 맞죠?”

“네, 엄청 중요한 일 맞아요. 그러니까 의국실에 얼씬도 하지 마세요. 아셨죠?”

“무슨 일인지 알아야 얼씬도 안 하죠. 나도 알려 줘요.”

“이따가 알려 드릴게요. 어서 저쪽으로 가세요.”

임정숙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의국실을 쳐다보는 최 팀장을 억지로 끌고 가며 속으로 승우를 응원했다.

‘잘됐으면 좋겠다. 승우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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