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36화 (335/472)

336화. 인턴이요?

“회장님. 잘 지냈어요?”

진료실로 들어온 태경이 김건형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김 원장, 내가 지금 자네한테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아. 얼른 와서 앉아.”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갑자기 떨리는데요?”

건강 음료를 꺼내 김건형 앞에 내려놓은 태경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떨리기는, 자네가 어디 내 앞에서 떨 사람인가?”

“그럼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회장님 앞인데 떨리고도 남죠.”

“이런 농담까지 하고 자네도 병원 운영하면서 많이 뻔뻔해졌어.”

“제가요?”

“그래.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뭘 말씀하시는 건지…….”

“뭐긴 뭐야! 끝까지 모른 척할 셈이야? 의국실에 있는 아이 말하는 거잖아.”

“아~ 승우요?”

“도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저 어린애가 정신없는 병원에서 혼자 저러고 있어? 듣자 하니 자기 누나랑 둘이 사는 거 같던데, 누나라는 사람은 어디 있고? 설마 사고로 크게 다친 거야? 혼수상태여서 아이한테 말 못 하고 있는 거고?”

“아니요. 그런 건 전혀 아닙니다.”

“다친 게 아니라니 다행이네. 그러면?”

“솔직히 저도 그 이유를 아직 명확히 몰라요.”

“모른다고?”

“네, 회장님. 누나가 우리 병원에서 진료받던 사람인 건 맞는데, 무슨 연유로 승우를 병원에 맡겼는지는 추측만 할 뿐 아직 모릅니다.”

태경은 지금까지 있던 승우와 김선민의 일을 김건형에게 전부 설명했다.

“아니, 그럼 그 누나는 아무 연고도 없는 병원에 무작정 애를 맡기고 사라진 거야?”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많이 힘들었던 거 같아요.”

“참나! 아무리 생활고에 시달렸다지만, 어떻게 동생을……. 아니지. 젊은 사람이 오죽 힘들었으면 그랬겠나 싶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자! 이제 슬픈 이야기는 이쯤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승우가 자폐 성향에 서번트 증후군이라고 하던데? 맞아?”

“맞습니다. 회장님.”

“물론 자네도 알고 있었고?”

“그것도 맞습니다.”

“김 원장?”

“네. 회장님.”

“자네, 오늘 나한테 연락한 거 말일세. 2주 동안 약속 펑크 난 게 미안해서 부른 게 아니라 승우 때문인 거지?”

“네, 승우 때문입니다.”

눈치가 보통이 아닌 김건형은 승우의 비상함을 느끼자마자 태경이 연락한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전문 기관에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승우는 천재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한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승우는 여러 분야에 천재성을 두루 지니고 있습니다. 이 아이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고 그 방법을 생각하다가 회장님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도와줄 방법을 생각하다 날 떠올리게 됐다고?”

“네, 빵을 주는 것보다는 빵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게 남매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됐으니까요.”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빵을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 그 빵을 만드는 기술과 자본을 가진 사람을 소개해 준 거지. 내 말이 틀리나?”

“아니요. 맞습니다. 회장님이야말로 승우의 진짜 키다리 아저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럼 승우가 그림을 그리고 있던 것도, 인체 모형을 갖고 놀고 있던 것도 다 김 원장이 계획한 일인가?”

김건형은 오늘 있던 모든 일이 태경의 계획한 일인지가 궁금했다.

“아니요. 회장님. 그건 전혀 아닙니다. 전, 단지 회장님이 승우를 볼 수 있도록 의국실로 자리를 만든 것밖에는 한 게 없습니다.”

“그래? 만약 내가 승우한테 관심을 두지 못했거나 아무런 말을 건네지 않았다면 그럼 끝인데? 만약 그랬다면 그때는 어떡하려고 했나? 다른 계획이라도 있던 거야?”

“아니요. 다른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요.”

“왜지?”

확신의 찬 태경을 보며 김건형이 물었다.

“회장님은 인재를 보는 안목이 대한민국 최고이시니까요. 특히나 승우 같은 인재는 바로 알아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하!”

김건형은 만족스러운 표정과 함께 한바탕 크게 웃어넘겼다.

“자네 아주 능구렁이가 다 됐어. 아주 구렁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잘했어. 내 근래 회사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좀 받았거든. 그런데 오늘처럼 기분 좋고 마음이 뜨거웠던 적이 처음이야.”

“회장님이 기분 좋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가 이렇게까지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거 보면 승우에게 그만큼 재능이 있다는 건데……. 그런 인재를 내가 놓칠 순 없지.”

“감사합니…….”

“잠깐!”

고마운 마음으로 인사하는 태경의 말을 급하게 자른 김건형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다 끝난 것도 아닌데 인사받기는 일러.”

“……네?”

“김 원장. 내가 그래도 직업이 사업가 아니겠나. 사업하는 사람들 특징이 뭔 줄 알아?”

“글쎄요.”

“바로 손해 보는 장사를 죽어도 안 하려고 한다는 거야. 서로 주고받는 게 있어야 공평하거든. 내가 승우를 도와준다면 자네는 뭘 해 줄 텐가?”

“회장님이 원하시는 걸 들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럼 나한테 소원권이라도 주겠다는 말인가?”

“그럼요. 얼마든지 드리죠.”

태경은 진심이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김건형이 도와준 게 처음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재벌이었지만, 김건형은 다른 재벌과 다른 사람이었다.

가진 게 많다고 으스대지도 않았고 사람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배울 것도 많고 무엇보다 병원을 경영하면서 실질적인 조언도 아낌없이 해 줬기에 그가 원하는 걸 들어줘도 아깝지 않았다.

“그래? 그럼 내가 여기서 병원 합병에 관해 말해도 들어준다는 말이지?”

“…….”

순간 태경은 심각하게 진지한 김건형의 표정을 보고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합병에 대한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놀라기는. 농담일세, 농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슈퍼에서 물건을 사는 문제도 아닌데 합병을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안 되지.”

“회장님, 저 진짜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자네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어. 합병은 장난이었고, 새희망병원 인턴들이 수련받을 때 우리병원에서 일정 기간 좀 맡아 주겠나?”

“네? 인턴이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태경은 합병 이야기보다 더 놀라 되물었다.

“지금 당장 인턴들을 보내겠다는 소리가 아니야. 나중에 우리병원과 새희망병원이 좋은 관계가 된다면 그때를 말하는 거야.”

“새희망병원은 우리병원보다 규모도 크고 시설도 좋고 훌륭하신 선생님들이 많이 있는데 여기 와서 배울 게 있을까요?”

“물론 시설도 좋고 실력 좋은 의사들도 많지. 하지만 내 병원에는 김태경이 없잖아. 앞뒤 안 가리고 환자만 생각하고 후배들이 진짜 의사로 성장하게 길잡이가 되고 돈이 있든 없든 모든 환자들에게 공평한 자네 같은 참 스승이 필요해. 요즘은 의사는 많은데 진짜 의사는 많지가 않아. 그리고 아무리 좋은 기계가 있고 시설이 좋다고 한들 써전에게 가장 좋은 기계는 결국 의사 본인의 손이라고 생각하네. 내가 보기에는 써전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손은 김태경이야.”

“과찬이십니다.”

“난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야. 지금 한 말 전부 진심이라는 소리지. 어떻게, 들어줄 건가?”

“네, 회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좋은 관계가 정말 된다면 그땐 도와드리겠습니다.”

“김 원장 정말이야? 약속 꼭 지켜.”

“네, 꼭 지킬게요.”

“그리고 그 누나 말이야. 내가 한번…….”

김건형이 승우 누나에 대해 궁금해하던 그때,

철컥-

“……장님!”

눈이 휘둥그레진 최 팀장이 진료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팀장님, 무슨 일이세요?”

“원장님, 일이 좀 생겼습니다.”

“일이요?”

“예. 잠깐, 좀 나와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 외, 외계인이 아니 엄마가 외계인이 떼로 몰려왔습니다.”

“뭐라고요?”

“아무튼 일단 빨리 좀 나와 보세요.”

태경은 놀라서 말까지 버벅거리는 최 팀장을 따라 정문으로 향했다.

“이거 보세요. 원장님. 이게 다 엄마는 외계인이랍니다.”

밖으로 나가자 1톤 트럭 두 대가 병원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한 대는 냉동 트럭으로 승우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싱글컵이 가득 실려 있었고, 나머지 한 대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냉장고와 케빈과 같은 인체모형 두 개가 실려 있었다.

한 시간 전, 김건형에게 연락받은 비서는 같은 비서실 젊은 직원들에게 물어봐 엄마는 외계인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그 즉시 바로 매장을 돌며 아이스크림을 구입한 뒤, 인체모형 전문 업체까지 찾아가 가장 정교하고 가장 좋은 걸 바로 사 왔다.

“이 정도면 지구침공 수준 아닌가요? 이거 혹시 원장님이 주문하신 거예요?”

“내가 했네.”

역시나 놀란 표정으로 아니라고 말하려는 태경의 뒤로 김건형이 태연하게 답했다.

“회장님이요?”

“그래. 엄마는 외계인인지 뭔지가 먹는 건지는 몰랐는데 아이스크림이었군. 승우한테 주고 싶어서 내가 준비했어. 김 원장, 이거 의국실에 잠깐 두어도 되지?”

“그럼요. 그런데 회장님, 이거 승우가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인데요.”

“우리병원 식구들도 같이 먹으면 되지.”

“그래도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의국실에 냉장고 한 대밖에 자리 없어요.”

“그래? 고 팀장. 그럼 나머지는 새희망병원으로 보내서 우리 직원들 간식으로 먹을 수 있게 조치해.”

“네, 회장님 알겠습니다. 항상 멋있으셨지만, 오늘은 더 멋지십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셨어요?”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호들갑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김 원장까지 민망하게 왜 그래. 내가 가진 거에 비하면 이런 일은 어려운 일도 아니야. 진짜 필요한 사람 힘든 사람들한테는 주머니를 아끼면 안 돼.”

그 뒤, 의국실에는 엄마는 외계인이 가득 찬 냉장고와 케빈의 새로운 친구들이 자리를 잡았다.

“오~~~!!”

김건형의 깜짝 선물에 가장 놀란 사람은 역시나 승우였다.

“이거 다 승우 거야.”

“정말요? 다요?”

냉장고에 산처럼 가득 쌓인 아이스크림과 새로운 인체모형을 본 승우의 덤덤한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우와! 우와!”

좀처럼 얼굴에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던 아이가 얼굴에 감정이 느껴질 만큼 기뻤다.

“그럼. 다 승우 거지. 여기 할아버지가 승우한테 선물로 주시는 거야.”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승우가 씩씩하고 예뻐서 할아버지가 주는 거야.”

김건형은 손주를 보는 것처럼 따뜻한 미소로 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승우야. 할아버지랑 약속 하나만 할까?”

“약속이요?”

“그래. 약속. 승우가 그랬지? 학교에서 승우 말도 안 들어 주고 이유 없이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슬프다고.”

승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우리 승우보다 이 세상을 오래 살아서 아는데. 세상에는 날 이유 없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이유 없이 좋아하는 사람도 많아. 이를테면 승우를 사랑하는 누나도 그렇고 여기 김태경 원장님과 병원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그렇고 나도 그래.”

“고릴라 아저씨도 승우 많이 좋아한다.”

옆에 있던 고 팀장이 승우가 지어 준 별명을 말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봐! 여기 고릴라 아저씨도 승우를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그런 친구나 사람들 때문에 승우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면 돼. 할아버지 말 무슨 소리인지 알겠니?”

“알 거 같아요.”

“그래. 오늘 할아버지랑 놀아 줘서 고맙다. 우리 조만간 또 보자.”

“네, 또 봐요. 고릴라 아저씨도 안녕히 가세요.”

승우는 의국실을 나가는 두 사람에게 기분 좋게 인사하며 새로 생긴 케빈 친구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안녕. 친구들아.”

* * *

아파트 단지-

“아이고, 힘들다.”

경비실로 들어온 경비원이 허리를 두드리며 의자에 앉았다.

“허리도 안 좋으면서 무슨 순찰을 또 갔다 오고 그래요.”

동료의 잔소리를 받는 그는 김선민에게 주먹밥을 줬던 경비원이었다.

“형님,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일은 무슨 일이 있어.”

“아니 그런데 오늘 이 씨한테 야간 순찰 바꿔 달라고 하셨다면 서요. 형님 업무 날 안 바꾸시잖아요.”

“그냥, 이 씨가 바꿨으면 하는 눈치라서 바꾼 거야.”

“아닌 거 같은데…….”

“마음대로 생각하고 늦기 전에 저녁이나 먹자고.”

“먹어야죠. 오늘 얼큰한 게 당기는데 짬뽕 어떠세요? 요 앞 중국집 새로 생겼는데 불짬뽕이 기막히더라고요.”

“그래? 그럼 두 개 시켜. 내가 낼게.”

“아, 정말이세요? 역시 우리 형님이 최고시네. 바로 시킬게요.”

“실례합니다.”

동료 경비원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사이 웬 젊은 남자가 경비실 문을 두드렸다.

“네, 무슨 일이세요?”

“퀵서비스 기사님이 여기 서류를 맡겼다고 연락해서요.”

“아, 네. 맞아요. 150동 2xx호 이영훈 씨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금방 찾아 드릴게요.”

동료가 서류를 찾던 사이 대신 중국집에 전화를 걸려던 경비원은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온 남자에게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

인사를 받은 경비원 역시 인사를 하며 고개를 들던 그 순간, 남자의 얼굴을 본 그의 동공이 크게 요동쳤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