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37화 (336/472)

337화. 낯설지 않은 아이

“안녕하세요.”

“예. 안녕…….”

인사를 받은 경비원 역시 인사를 하며 고개를 들던 그 순간, 남자의 얼굴을 본 그의 동공이 크게 요동쳤다.

“……!”

서글서글한 인상의 키 큰 눈앞의 남자는 바로 김선민이 찾고 있던 그 남자였다.

‘맞는 거 같은데…….’

그리고 경비원이 야간 순찰을 자처한 이유 역시 이 남자였다.

그것도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는 남자를 찾고 있던 건 김선민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사실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하고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게 썩 내키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김선민의 딱한 속사정 때문이었다.

그 사정을 듣고 나니 딸과 비슷한 또래의 김선민이 안쓰러워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더 열심히 단지를 돌며 남자를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아무래도 이렇게 큰 아파트 단지에서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 어떡하나 싶던 찰나, 그 남자가 떡하니 경비실로 들어온 거였다.

경비원은 이 기막힌 상황을 보며 하늘이 돕는구나 싶었다.

“아! 찾았다. 여기 있네요.”

동료가 선반에 꽂아둔 서류 봉투를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이거 맞죠?”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거 음료수인데 같이 드세요.”

“뭘! 대단한 일 한 것도 아닌데 이런 걸 다 들고 왔어요.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네, 그럼 수고하세요.”

“젊은 사람이 예의가 아주 바르네요. 서류 하나 받아 준 것뿐인데 박커스를 한 통을 주네. 형님, 드세요.”

“…….”

동료가 음료수 한 병을 꺼내 경비원에게 건넸지만, 그의 시선은 젊은 남자가 나간 문을 향해있었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꺼내 김선민이 보낸 사진을 보며 방금 나간 남자의 얼굴을 곱씹었다.

‘맞네. 맞아! 틀림없어.’

“형님, 박커스 드시라니까요?”

“됐어. 지금 박커스가 문제가 아니야. 나 좀 나갔다 올게.”

“예!? 어디를요? 불짬뽕 안 드세요?”

“시켜서 먼저 먹고 있어.”

“형님? 형님!”

동료의 외침에도 경비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비실을 나갔다.

“아니, 저 형님이 오늘 왜 저래……. 이상하네.”

경비실에서 나온 경비원은 계속 혼잣말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저만치 걸어가는 남자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150동 2xx호. 분명 150동 2xx 이영훈이라고 했어. 분명해.”

점점 더 걸음에 속도를 높이며 남자와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그렇게 남자를 거의 다 따라잡으며 그를 부르려는 찰나,

“저…….”

“영훈아?”

“처남?”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차례대로 그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본 경비원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옆에 있는 벤치에서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누나, 매형?”

“지금 퇴근하는 거야?”

매형이라는 사람이 남자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네, 요즘 일이 좀 바쁘네요. 근데, 이 집 대장님이 안 보이는데?”

“민지는 아버님이랑 어머님이 오늘 데리고 잔다고 해서 시부모님댁 다녀오는 길이야.”

“우리 부모님이랑 처남이 같은 아파트 사니까 자주 봐서 좋네. 처남, 그러지 말고 지금 누나랑 치맥 하러 가는데 어떻게 같이 갈래? 시원한 맥주 한잔 어때?”

“아니요. 매형.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왜? 같이 가자?”

“됐네. 매형이랑 오붓하게 둘이 갔다 와.”

“정말 안 가?”

“어. 안 가. 들어가서 업무 메일도 확인해야 해. 회사 프로젝트 때문에 바빠.”

“그래? 알았다. 밥 잘 챙겨 먹고. 부모님께 전화 좀 자주 드리고.”

“내가 누나보다 더 자주 드릴걸.”

“나도 자주 한다. 얼른 들어가 쉬어.”

“처남 나중에 한잔하자고.”

“네, 들어가세요.”

남자가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마자 그의 누나가 다시 동생에게 뛰어왔다.

“영훈아?”

“누나 왜 다시 왔어? 매형은?”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먼저 가 있으라고 했어.”

“뭔데 매형까지 보내고 물어본다는 거야.”

“네 매형이 들으면 안 되니까 그렇지.”

“뭔데 그래?”

“나 오늘…….”

누나는 이영훈의 표정을 살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걔 본 거 같아.”

“누구?”

“그 애 있잖아. 김선민.”

“……!”

누나의 입에서 ‘김선민’이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평온함을 유지하던 이영훈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뭐라고? 누구?”

하지만 그는 순간 자신이 분명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되물었다.

“어머, 너 기억 안 나?”

“방금 차 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

“김선민 봤다고.”

“아, 그래?”

“너, 생각 안 나? 너랑 고등학…… 아니다. 걔랑 그런 일이 있었는데 너, 생각 안 나?”

“…….”

이영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하긴! 세월도 오래됐고 너도 최근에 힘들고 정신없었을 텐데 잊는 게 당연하지.”

“근데 그 사람을 누나가 어떻게 봤다는 거야?”

“여기 아파트 단지에서 봤어.”

“우리 아파트?”

“응. 우연히 봤는데 내가 김선민 아니냐고 하니까 그 여자가 아니라고 하더라. 아까는 닮은 사람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걔가 확실한 거 같아. 날 보고 놀라서 뒤도 안 돌아보고 갔거든. 뭐, 걔 입장에서야 놀라고도 남겠지.”

이미 김선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이영훈은 방금 누나가 했던 말이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아무튼 뭐 그래서 나는 영훈이 너랑 마주쳤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누나가 사람 잘못 본 거 같은데? 단지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같은 아파트 사람이라면 벌써 마주치지 않았을까?”

“그것도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너나 걔나 둘 다 어릴 때고 서로 힘든 기억뿐인데 만나 봐야 뭐가 좋겠어.”

“얼른 가 봐. 매형 기다리겠다.”

“그래. 가 볼게. 들어가서 쉬어.”

“어. 갈게.”

누나와 헤어지고 난 뒤 이영훈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걸어갔다.

띠리릭-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온 이영훈은 식탁 의자에 가방을 내려 두었다. 그리고 답답하게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두서없이 풀고 그대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모습은 평소 이영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성격이 워낙 깔끔한 탓에 아무리 야근하고 늦게 들어오는 날에도 옷을 벗고 씻고 정리까지 마친 다음에 쉬고는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최근 회사 내 프로젝트로 지친 탓인지 아니면 갑자기 옛사람의 이름을 들어서인지 그 이유를 본인도 몰랐다.

‘김선민 봤다고.’

조금 전, 누나가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메아리로 남아 반복되는 것만 같았다.

“선민이가 여기 왜 있겠어.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영훈에게는 김선민이 그랬다.

빛바랜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각나 이따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

자꾸만 울리는 머릿속 메아리를 털어내려는 듯 이영훈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골이 흔들릴 정도로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얼음물을 벌컥 들이켜야 정신이 돌아올 거 같았다.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고, 얼음을 가득 담은 컵에 물은 담은 그때였다.

딩동-

난데없이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배달을 시킨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오시기로 한 것도 아닌데 벨 소리가 울렸다.

여전히 물컵을 들고 있는 이영훈은 누가 잘못 누른 거라고 생각하며 물을 마시려 했다. 그런데 또다시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냉장고를 닫고 거실에 있는 비디오 폰 화면을 확인하자 경비원이었다.

-밤늦게 실례합니다. 단지 경비원입니다.

조금 전, 이영훈과 누나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경비원은 단지 주민의 부탁으로 잠시 짐을 옮겼었다.

그렇게 이영훈에게 다가갈 타이밍을 놓쳤고, 결국 고민하다 집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건지…….”

-네, 다름이 아니라. 이름이 이영훈 씨, 맞으시죠?

“제가 이영훈 맞는데 뭐 때문에 그러시죠?”

-이걸 이영훈 씨에게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경비원은 주머니에서 꺼낸 편지 봉투를 카메라에 들이밀었다.

“저한테요? 누가요?”

-김선민 씨요.

확실하고 분명하게 그 이름이 귓가에 들린 순간,

쨍그랑-

아귀에 힘이 풀린 이영훈은 저도 모르게 물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방금 누구라고 하셨죠?”

-김선민 씨라고 했습니다. 김선민 씨가 이영훈 씨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철컥-

이영훈은 깨진 물컵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은 듯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누나가 봤다는 사람이 김선민이 맞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겁니다.”

경비원은 이영훈을 보자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

편지 봉투 겉면에 작게 쓰인 김선민이란 글자를 보자마자 이영훈은 그녀의 글자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셀 수 없이 주고받았던 편지 속 그녀의 필체를 모를 리 만무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혹시 선……민이와 아는 분이신가요?”

“아니요. 모르는 사이입니다. 저도 갑자기 부탁받은 일이예요.”

“시간 괜찮으시다면 잠깐 들어오셔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세요?”

“괜찮아요. 여기서 설명해 줄게요. 그렇게 길게 말한 정도는 아니라 서요.”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파편을 우연히 본 경비원은 현관에 서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했다.

“방금 설명한 게 전부예요. 난 김선민 씨에게 그렇게만 부탁받았어요.”

“그러셨군요. 그러면 왜 저에게 이걸 전해 달라고 했는지 알고 계시나요?”

“아니요. 저도 그건 모릅니다. 아마 그걸 보시면 알지 않을까요?”

사실 김선민에게 사정을 들었던 경비원은 어느 정도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일단 본인이 끼어들 일도 아니었을뿐더러 당사자들이 해결하는 게 맞았기 때문이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라고 생각한 경비원은 두 사람의 일이 잘 해결되길 응원하며 집을 나섰다.

“네, 감사합니다.”

철컥-

경비원이 나가자 이영훈은 소파까지 갈 생각도 못 한 채 현관에 서서 바로 봉투 안에 있는 편지를 꺼냈다.

-오랜만이에요, 선배. 저 선민이에요. 갑자기 편지 받고 많이 놀랐죠?

선배가 여기 산다는 말을 듣고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혹시 못 만나게 될지도 몰라서 편지를 미리 준비했어요.

우리 인연이 끝난 지 너무 오래됐는데 갑자기 이렇게 불쑥 연락해서 정말 죄송해요.

선배, 염치없지만, 나 좀 도와줘요.

내가 부탁할 사람이 선배밖에 남지 않아서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연락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 날 선배한테 거짓말했어요.

“거짓말이라면 설마…….”

그 뒤, 편지에 써진 글을 전부 읽은 이영훈은 혼이 쏙 빠져나간 표정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몇 번이나 다시 읽었지만, 내용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봉투 속에 있던 아이의 사진을 본 그는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사진을 잡은 손가락이 심하게 떨리고 놀란 가슴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사진 속 아이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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