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38화 (337/472)

338화. 진실

사진을 잡은 손가락이 심하게 떨리고 놀란 가슴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사진 속 아이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 이유는 어린 시절 자기 모습과 아이가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구구절절 쓰여 있던 편지의 내용이 사진 한 장으로 압축되는 것만 같았다.

“하! 이 아이가…….”

사진 속 승우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그는 한동안 멍하니 사진을 보고 또 봤다.

“승……우. 이름이 승우구나. 승우!”

이영훈은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않고 두 시간이 넘도록 사진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며 아이의 이름을 반복해 말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든 그는 입고 있던 옷차림 그대로 차 키와 핸드폰 그리고 편지와 사진을 손에 쥔 채 급히 집을 나갔다.

철컥-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회사 일도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김선민을 직접 만나는 것과 승우였다.

일단 급한 대로 편지에 남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김선민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거신 번호는 고객의 요청으로 착신이 금지되었습니다.

* * *

우리병원-

“승우 덕분에 맛있는 아이스크림도 먹고 좋네요.”

“그러게. 이게 이름은 좀 특이한데 달달하니 맛은 또 좋네. 원장님, 아이스크림 드셨나요?”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은 최 팀장은 진료실에서 나오는 태경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아까 먹었어요.”

접수처를 지나 병동 회진을 가려던 태경은 승우가 잘 자고 있나 의국실을 안쪽을 쳐다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승우야? 안 자?”

분명 아까 침대에 누워서 잘 자라는 인사까지 했던 아이가 종이를 들고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서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

“그냥요…….”

“왜? 그림 그리고 싶어?”

그림을 그렸던 도화지를 들고 있는 승우를 보며 태경은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건가 생각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괜찮으니까 말해도 돼.”

“아이스크림 냉장고 문에 그림 붙여도 돼요?”

“냉장고 문에?”

승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붙여도 되지. 그런데 왜 냉장고 문에 그림을 붙이고 싶은지 물어봐도 될까?”

“그게…… 누나요.”

“누나?”

“네. 누나가 아이스크림 볼까 봐서요.”

“누나가 보면 안 돼?”

이게 무슨 말인지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았던 태경은 곧이어 말하는 승우의 말을 듣고 정확한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안 봤으면 좋겠어요. 누나가 엄마는 외계인 구하러 갔잖아요. 그런데 여기 이렇게 많은 아이스크림을 보면 누나가 마음이 안 좋을 거 같아서요.”

“……!”

승우는 혹시나 김선민이 병원에 와서 아이스크림이 가득한 냉장고를 보면 속상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힘들게 아이스크림을 구해 온 누나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신경 쓰였던 것이다.

‘승우가 아이스크림을 하나도 안 먹었네요. 나중에 먹겠대요.’

그러고 보니 아까 김건형이 가고 난 뒤에도 그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승우는 한 개도 먹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누나 때문에 먹지 않았던 것 같다.

“누나가 걱정됐어?”

“네. 걱정됐어요.”

“우리 승우 정말 착하다.”

누나를 생각하는 아이의 그 마음이 너무 예뻤다.

“그럼 누나 때문에 아이스크림도 안 먹은 거야?”

“……네.”

“아이스크림 좋아하잖아. 먹어도 괜찮아.”

“아니요.”

승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거절했다.

“누나가 주는 아이스크림 먼저 먹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선생님?”

“그럼. 당연히 되지.”

“그런데 있잖아요. 할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그래 할아버지한테는 선생님이 비밀로 할게. 우리 그러면 냉장고 문에 그림 붙이고 얼른 잘까?”

“네.”

그 뒤, 승우는 태경과 함께 냉장고 문에 인체 그림을 다 붙인 뒤에야 마음 편하게 잠이 들었다.

* * *

새벽 다섯 시.

24시간 고깃집에는 손님이 다 먹고 일어난 테이블 뒷정리가 한 창 진행 중이었다.

“저기요?”

테이블을 치우는 사람들 틈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던 김선민을 다른 직원이 불렀다.

“사장님이 갈 준비해서 카운터로 오래요.”

“지금요?”

“네, 지금 오라고 하셨는데요.”

“아, 네. 알겠습니다.”

하던 정리를 마저 다 끝내고 입고 있던 앞치마를 잘 접어 둔 김선민은 카운터로 향했다.

“선민 씨, 오늘 수고했어.”

사장은 일당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안 받아?”

“그게 아니라 아직 일이 다 안 끝났는데요.”

“어차피 오늘 하루 일하는 건데 뒷정리까지 하면 자기 내일 몸살 나서 못 일어나. 나도 그렇고 여기 이모들은 다들 오래 일해서 괜찮은데 선민 씨는 힘들어서 안 돼.”

“전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그렇게 야리야리한 몸으로 뒷정리까지 했다가 쓰러져. 여기까지만 해.”

“감사합니다.”

아파트 단지에서 이영훈의 누나를 본 김선민은 더 이상 그곳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혹시라도 다시 마주칠까 싶은 걱정 섞인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승우가 너무 보고 싶어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우리병원이 아닌 고깃집으로 향한 건 승우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을 사 오기로 약속했기에 차마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태경에게 진료비를 갚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기도 했다.

이미 가진 돈을 차비로 다 사용한 김선민은 아르바이트 어플을 통해 당일 일할 곳을 찾다 이 고깃집에 오게 된 것이다.

“오늘 일하느라 수고했어. 나는 선민 씨가 오늘 일하러 온 사람이라고 하길래 일을 잘할까 싶었는데 손끝도 야무지고 일 잘하더라.”

“아니에요.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한 게 왜 없어. 어제저녁부터 손님 몰려서 힘들었을 거야. 그나저나 선민 씨, 뭐 잊은 거 없어?”

“잊은 거요?”

“제일 중요한 걸 빼놓고 가면 어떡해? 이거 두고 갈 거야?”

사장은 비닐봉지가 담긴 쇼핑백을 들어 올렸고, 그 안에는 승우에게 줄 아이스크림이 들어있었다.

어제저녁, 김선민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장에게 오천 원 정도 가불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처음 보는 알바생이, 그것도 한 번 일하고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의 황당한 부탁이었지만, 사장은 이유도 묻지 않고 금액을 가불해 줬다.

그 뒤, 그 돈으로 동생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는 말을 들은 사장은 김선민이 사정이 어렵구나라고 생각하며 아까 건넨 봉투에 일당을 좀 더 넣었다.

“이게 제일 중요한데 두고 가면 어떡해.”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니었으면 그냥 갈 뻔했어요.”

“내가 녹지 않게 얼음 두둑이 넣었어. 인제 그만 가 봐.”

“네, 오늘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동생이랑 고기 먹으러 올게요.”

“나중에 말고 조만간 와. 내가 제일 맛있는 고기로 한턱 쏠게.”

“네, 사장님. 꼭 놀러 올게요.”

김선민은 활짝 웃는 사장을 향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가게를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잠시 뒤, 택시에서 내린 김선민은 승우가 있는 우리병원에 도착했다.

그동안 밥은 잘 먹었을까? 낯선 곳에서 계속 울지는 않았을까? 혹시라도 승우가 없으면 어떡해야 하나?

지금까지 계속 생각하던 걱정들이 썰물처럼 밀려와 정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오세요. 진료 보러 오셨어요?”

“아니요. 저…… 승우 만나러 왔어요.”

“네?!”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던 접수처 직원은 김선민의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그녀를 바로 알아봤다.

“어……!”

“저, 승우 누나예요. 승우 만나러 왔어요.”

“아. 네. 잠시만요.”

“잘 왔어요. 김선민 씨.”

예상 못한 김선민의 등장에 접수처 직원들이 당황하던 그때 태경이 응급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마침 원장님 오시네요.”

“죄송합니다.”

태경을 본 김선민은 머리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어찌나 깊게 머리를 숙였는지 모자가 바닥에 떨어질 정도였다.

“우리 승우는…….”

“승우 보고 싶죠? 따라와요.”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집어 준 태경은 김선민을 의국실로 안내했다.

“스, 승우야…….”

조용히 문을 열고 태경의 뒤를 따라온 김선민은 곤히 자는 승우를 보며 침대맡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혹시라도 울고 있지 않을까? 괜히 아무도 모르는 병원에 두고 가서 사람들에게 눈치를 받지는 않을까? 했던 걱정들이 승우를 보자마자 괜한 걱정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편한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승우의 얼굴을 보니 그동안 병원에서 잘 지냈구나 싶었다.

“누나가 미안해.”

김선민은 승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연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승우 병원에서 잘 지냈어요.”

조용히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태경은 휴지를 건네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밥도 잘 먹고, 그림도 잘 그리고 학교 선생님과 윗집 할머니 할아버지도 자주 오셔서 함께 시간도 보내고 새로운 친구도 생겼어요.”

“정말 죄송해요.”

“아니에요. 그보다 승우가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닌데 제 진료실로 자리를 옮기면 어떨까요?”

“네.”

김선민은 승우에게 이불을 잘 덮어 주고 다시 한번 얼굴을 쓰다듬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익숙한 그림이 그녀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그림을 참 잘 그려요.”

문 쪽으로 걷다 냉장고에 붙은 그림을 보고 발걸음을 멈춘 김선민에게 태경이 말했다.

“승우가 누나에 대한 애정이 참 깊더라고요.”

인체 그림으로 가득한 냉장고 가운데는 ‘사랑하는 우리 누나’라는 제목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 그림을 본 김선민은 다시 울컥한 마음을 간신히 누르며 태경을 따라 진료실로 향했다.

철컥-

“아! 혹시 엄마는 외계인 구해 왔어요?”

“네? 아. 네. 사 왔어요.”

“일단 녹지 않게 여기 냉장고에 두는 게 좋겠네요.”

태경은 진료실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을 넣은 뒤 국화차를 건넸다.

“따뜻한 차예요.”

“감사합니다.”

김선민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는 거 같았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말없이 승우를 병원에 맡겨서 많이 놀라셨죠?”

“네, 저뿐만 아니라 직원들 모두 놀랐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어요.”

“그러셨을 거예요. 승우가 힘들게 하지는 않으셨어요?”

“아니요. 승우는 똑똑하고 사람들을 배려할 줄도 알고 무엇보다 마음이 참 따뜻한 아이더라고요. 여기가 낯선 곳이었을 텐데도 누나가 병원에서 기다리라고 했다면서 씩씩하게 잘 지냈어요.”

“선생님과 직원분들이 잘해 주셔서 승우가 잘 지낸 거 같아요.”

“몸은 좀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선생님께서 이미 눈치채셨을지 모르지만 전, 승우랑 둘이 살고 있어요.”

긴장이 풀린 김선민은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시작했다.

“승우는 2년 전까지 친할머니와 함께 살았어요. 그러다가 할머니가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돌아가셨어요. 승우를 키우느라 몸을 돌볼 시간도 없으셔서 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계시다가 가셨어요.”

“할머님이 힘드셨겠네요.”

“네, 정말 힘드셨을 텐데 내색 한 번도 안 하셨어요. 그리고 사실 승우는…….”

잠시 침묵했던 김선민은 이내 결심한 듯 자신과 승우의 관계에 관한 진실을 털어놓았다.

“제가 낳은 아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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