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착각
잠시 침묵했던 김선민은 이내 결심한 듯 자신과 승우의 진짜 관계를 털어놓았다.
“제가 낳은 아이예요.”
태경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하는 것보다 김선민의 말을 들어 주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학생일 때…….”
한마디를 내뱉던 김선민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승우를 출산했어요. 전, 부모님과 저. 이렇게 셋이 살았어요. 그저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이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 부모님이 이혼하셨어요.”
특별히 부모님에게 문제가 있거나 한쪽이 크게 잘못해서 한 이혼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의 이혼 사유에 나오는 성격 차이었다. 부모님은 어린 김선민을 앉혀 놓고 이혼에 관해 솔직히 털어놓았다.
‘선민아, 엄마랑 아빠랑 더 이상 같이 살기가 힘들 거 같아.’
‘왜?’
‘아빠 엄마가 예전만큼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계속 같이 살면 마음이 힘들 거 같아서 따로 살 거야.’
‘그럼, 엄마, 아빠는 선민이도 사랑하지 않아?’
‘아니, 우리 딸은 너무너무 사랑하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똑같이 사랑해.’
그렇게 어린 김선민은 아빠와 살게 됐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엄마와 같이 살지는 못했지만, 엄마의 부재는 느끼지 못했다.
주말마다 보러 오고 함께 놀러 다니고 늘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전화도 자주 하면서 엄마는 딸에게 최선을 다했다.
엄마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김선민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엄마는 브라질로 떠났다.
“엄마를 못 본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서운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엄마는 나에게 최선을 다했고 엄마도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머님께서 사랑을 많이 주셨나 봐요.”
“네, 정말 그랬어요. 그래서 아빠랑 공항에 배웅하러 갔을 때도 울지 않고 웃으면서 인사했어요.”
한동안 엄마에게 선물과 함께 편지가 종종 왔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아빠에게 들은 말은 엄마가 아이를 낳아서 그런 거 같다고 했다. 그렇게 김선민은 엄마의 새로운 삶이 행복하기를 응원했다.
아주 가끔 엄마의 부재가 그립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김선민에게는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혼자 남은 딸을 정말 많이 아끼고 사랑했다. 이웃집 사람들이 남자 혼자 딸을 잘 키운다며 다들 칭찬할 정도였다.
친구처럼 친근한 아빠는 엄마의 역할까지 도맡아서 딸을 키웠다.
아빠는 단 한 번도 늦게 들어온 적이 없었다.
늘 아침이면 포스트잇에 오늘도 힘내라는 말과 함께 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상함도 잊지 않았다.
딸을 키우는 직장 동료들에게 질문하고 공부했고, 심지어 김선민이 중학교 때 첫 생리를 시작할 때는 케이크와 함께 꽃다발로 축하 파티도 해 줬다.
그런 아빠의 뒷바라지 덕분에 김선민은 학교 성적도 우수했다.
“어머니도 그렇지만, 아버님도 정말 대단하셨네요. 혼자 남은 딸이 외롭지 않게 아버님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신 거 같아요.”
“맞아요. 전 부모님 복이 참 많은 아이였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던 거 같아요. 우리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빠셨어요.”
“그럼 지금 아버님은……. 혹시?”
아버지의 부재를 묻던 태경은 가족이 단 둘뿐이라는 김 경사의 말이 떠올라 말끝을 흐렸다.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었지만, 김선민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빠는 제가 고등학교 입학식 날 돌아가셨어요.”
“저런…….”
사고였다. 회사 일로 서류를 전해 주고 급히 학교로 향하던 아빠는 트럭 운전사의 졸음운전을 피하지 못하고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빠의 사고 소식을 듣고 할머니랑 같이 상을 치르는데 너무 갑작스럽다 보니까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아빠의 죽음이 믿기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삼 일이 지나자 아버지의 빈자리가 피부로 느껴졌다.
아침마다 써 주시던 쪽지도 늘 애정 가득한 메시지도 저녁이면 작은 집에 가득 차던 맛있는 냄새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은 집에서 아빠가 보고 싶었다.
“친할머니가 한동안 같이 계시다가 저보고 혼자 힘드니까 할머니 집으로 가자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싫다고 했어요.”
혼자 남은 손녀가 걱정되어 몇 번이고 말했지만, 김선민은 집에 남기를 원했다.
아빠와의 추억이 가득한 집을 떠나기 싫었다. 김선민은 학교 공부 등을 이야기하며 할머니를 설득했다.
할머니도 공부 잘하는 손녀가 시골에서 교육받는 것보다 서울이 낫다는 생각에 어렵게 허락했다.
김선민은 일부러 더욱 씩씩하게 생활했다. 학교 공부도 동아리 활동도 정말 열심히 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였고, 이따금 밀려오는 그리움과 외로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위로를 해 주고 응원해 주고 같이 공부도 하며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
동아리 방송반 선배 이영훈이었다.
“승우 아빠가 같은 학교였군요.”
“네, 어릴 때 외국에서 살다 와서 20살인데 고3이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제 눈에는 상당히 의젓하고 배려심도 많고 참 착한 사람이었어요.”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먼저 장례식장에 온 사람도, 가장 많이 위로해 준 사람도 이영훈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진 두 사람은 자연스레 사귀는 사이가 됐고, 이영훈이 1학기 수시에 합격하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직 학생이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넘으면 안 되는 선을 넘었어요.”
아빠의 그리움도 혼자라는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생리가 나오질 않았고 뭔가 이상했어요. 갑자기 감기 기운이 들기도 했고 이유 없이 피곤하기도 했어요.”
“임신 초기 증상이네요.”
“전 그걸 인터넷을 검색한 후에야 그게 임신 증상인 걸 알았어요.”
고민하던 김선민은 편의점에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샀고, 결과는 임신이었다.
생각해 보니 피임한다고 했는데, 아직 어리고 서툰 두 사람에게는 어려웠던 일이었다.
김선민은 그제야 진짜 안전한 피임과 자신을 지키는 일은 콘돔이라는 걸 알게 됐다.
“처음에는 그 사람에게 말하지도 못했어요. 그렇게 임신 사실을 숨기고 학교에 다녔어요.”
원래 마른 편이었기에 임신이 티가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배가 불러오고 몸이 힘들어지자 학교에 다니는 것이 어려워졌다.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던 김선민은 결국 이영훈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 임신했어.’
‘…….’
김선민이 한동안 계속 피해 다니고 만나 주지도 않았기에 이영훈은 그저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하려나 보다 했다.
헤어지자고 하면 잡으려고 했는데 뜻밖에 들려온 폭탄 고백에 그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오빠가 놀란 거 알겠는데 나도 어떡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말한…….’
‘미안해!’
이영훈은 심정을 고백하는 김선민의 손을 잡으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동안 혼자 얼마나 힘들었어. 내가 잘못해서……. 나 때문에 네가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이는 어렸지만, 이영훈의 행동은 어리지 않았다.
‘내가 끝까지 함께할게.’
학생의 신분으로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인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비겁하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민선아, 우리 같이 상의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해 보자. 아이를 낳고 싶으면 내가 끝까지 너랑 아이 책임질게. 그리고 지우고 싶으면 병원도 같이 가 줄게.’
이영훈은 이때 아이보다는 김선민 걱정이 먼저였다. 아직 어린 그녀가 아이 때문에 미래를 펼치지 못할까 봐 그게 염려됐다.
‘일단 내가 우리 부모님께 말할게. 우리끼리 해결할 문제는 아닌 거 같아.’
‘오빠, 부모님께 말씀드려도 괜찮을까? 날 안 좋게 생각하실 거 같은데…….’
‘나도 같이한 행동이고 같이 한 결과인데 너만 안 좋게 생각하실 게 뭐가 있어. 그리고 우리 부모님 그렇게 모진 분들 아니셔. 나 믿어.’
그건 이영훈의 착각이었다.
아무리 좋은 부모님이라고 해도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생이 김선민이야?’
‘……네.’
하지만 이영훈의 부모님의 반응은 냉정했고, 그보다 더한 사람이 있었으니 누나였다.
‘듣자 하니 미래를 함께한다느니 책임진다느니 우리 영훈이가 그런 헛소리를 했다는데 학생? 그거 말이 좀 안 되잖아. 학생도 아직 한창 공부할 나이인데 아이 낳아서 미래 망치고 싶어? 어른으로서 좋게 말하는데 비용 일체 다 줄 테니까. 아기 지워.’
‘…….’
‘그게 서로에게 좋아. 난 그 애 때문에 우리 영훈이 앞길 망치는 거 보고 싶지 않아.’
‘…….’
‘야! 너 왜? 말을 안 해? 어! 어른이 말하면 대답해야지? 이래서 부모 없이 자란 애들이 티가 난다니까.’
이영훈과 나이 터울이 꽤 있던 누나는 잘난 자기 동생 앞길을 들먹이며 부모가 없는 김선민에게 심한 소리 퍼부었다.
‘어린애가 얼굴 하나 믿고 발랑 까져서 어디 그 나이에 남자랑 자서 임신까지 해! 어? 너 그 나이에 임신이 자랑이니?’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말씀이 너무 지나치세요.’
‘뭐라고? 엄마, 얘 하는 말 들었지?’
‘우리 영훈이나 너나 아기 낳아 봤자 좋을 게 뭐가 있겠니? 너 머리도 좋다며. 공부 계속해야지. 고등학생이 임신해서 출산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배운 것도 없고 부모도 없고 발랑 까져서는……. 얘 봐라. 야! 너 어디서 눈을 똑바로 떠?’
‘우리 부모님 그만 말하세요. 그리고 저 그렇게 발랑 까진 애 아니에요.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뭐야? 어디 그따위 말대답을 해? 어? 야!’
짝-
누나라는 사람은 어린 김선민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너! 이 애 낳기만 해 봐. 아주 대한민국에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니게 할 거야.’
막장 드라마보다 더한 게 현실이었다.
어린 김선민은 어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이 일을 이영훈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철저히 혼자 힘들어야 했다.
그 뒤, 이영훈은 온 가족의 감시로 김선민을 만날 수 없었고, 하루가 멀다고 찾아와 폭언을 일삼는 그쪽 가족으로 김선민의 마음은 피폐해져 갔다.
결국 그녀는 아이를 지울 결심을 했다.
‘지울게요.’
‘너, 그거 진짜지? 나중에 딴소리하면 가만 안 둬!’
‘……네.’
병원에 가기 전날, 마음의 준비까지 다 했지만, 김선민은 끝내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자신의 실수로 찾아온 생명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도저히 어린 생명을 죽게 할 수 없었다.
그 생각에 사로잡히자 김선민은 할머니가 계신 시골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몰라 이영훈과 그의 엄마와 누나에게도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아주머니와 누나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 아이 낳을 생각 없어요. 오빠가 귀한 아들이듯이 저도 우리 부모님께 귀한 딸이었어요. 그리고 저 똑똑하고 앞길 창창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아이 지울 거예요. 그러니까 저 찾지 마세요. 만약 의심하고 찾으면 그때는 저도 참지 않겠습니다. 오빠랑 있던 일 다 떠들고 다닐 거예요.
누나에게 소식을 듣고 집 앞을 찾아온 이영훈에게도 처음으로 모진 소리를 쏟아냈다.
‘선민아. 병원에 간다니 그게 정말이야?’
‘들은 그대로야. 나 애. 지우기로 했어.’
‘선민아…….’
‘애 지우고 아무도 나 모르는 곳에서 새 출발 할 거야. 오빠도 대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오빠 인생 살아. 나, 오빠 원망 많이 해. 그러니까 우리 관계 여기서 끝내. 오빠 얼굴 더는 보고 싶지 않아.’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나도 따를게. 그러면 난, 너랑 못 헤어져. 그리고 병원도 같이 가자.’
‘모르겠어? 나 이제 너 안 좋아해. 얼굴 보는 것도 불편하다고!!’
독한 얼굴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하는 김선민의 모습에 이영훈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근처에서 지켜보던 누나와 그의 부모까지 전부 그녀의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그렇게 학교를 자퇴하고 할머니 시골집으로 내려온 김선민은 39주를 다 채우고 해를 넘겨 승우를 출산했다.
그녀의 나이 고작 18살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