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45화 (344/472)

345화. 의사로서 현타

한참을 말없이 걸어가던 태경은 복도 끝에서 평소와 다르게 아주 부드럽고 아주 다정한 말투로 후배를 불렀다.

“찬희야…….”

태경은 어깨가 축쳐진 후배의 어깨를 다독였다.

혹시 여자 친구인 최모나와의 문제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정이 많은 이찬희도 그렇고 최모나 역시 병원 안에서 공과 사는 분명한 편이었다.

“괜찮아. 인마!”

“…….”

“기운 내. 너, 고작 그런 일로 이렇게 기운 쭉 빠져서 계속 처져 있을 거야? 넌 의사로서 할 일을 한 거야.”

“선생님…….”

“그래? 말해.”

“고작 그런 일은 아닌 거 같아서요.”

“그렇지. 당연히 고작 그런 일이 아니지.”

침울한 표정으로 말하는 이찬희를 보며 태경은 어쩐지 웃음을 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늘 기운 넘치고 붙임성도 좋은 이찬희가 머리에 먹구름이 있는 것처럼 침울한 건 저녁을 먹기 직전에 일이었다.

세 시간 전-

김선민과 승우가 돌아가고 우리병원의 직원들은 각자 맡은 자리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태경은 예정된 수술과 외래 진료를 보며 전체적으로 체크했고, 이찬희와 최모나도 수술실과 응급실 오가며 환자에게 집중했다.

‘초콜릿 줘!!’

한눈에 봐도 노인의 모습을 한 것과는 달리 어울리지 않게 아이의 말투를 한 환자가 응급실에 내원했다.

‘누나, 여기는 과자 안 팔아요?’

극도의 발랄함과 쾌활함이 느껴지는 말투 뒤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중년 부부의 모습을 보며 응급실 안에 있던 모든 의료진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저 노인 환자가 치매라는 것을.

그 말인즉 진찰부터 진료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어린아이보다 더 힘든 게 치매 환자였다.

물론 모든 치매를 앓고 있는 분들의 진료가 힘든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방금 들어온 저런 분들의 진료는 쉽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세상에! 할아버지가 치매인가보네. 아들 며느리가 고생이 많겠다.’

수액을 맞으며 안타까워하는 다른 환자의 말과 함께 의료진 얼굴 위로 살짝 긴장감이 비쳤다.

‘안녕하세요.’

이찬희는 환자와 보호자가 있는 베드로 다가가 인사했다.

‘할아버지가 어디 불편하세요?’

‘안녕하세요. 저기 선생님. 저희 아버지가 배가 좀 아프세요.’

‘배요? 배가 어떻게 아프신데요?’

‘변비요.’

‘아! 변비요?’

‘네, 며칠 동안 변을 못 보셨어요.’

변비라는 아들의 말에 이찬희와 의료진은 이때까지만 해도 살짝 안도했다.

뭔가 검사하고 약을 주거나 아니면 관장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면 일단 검진이랑 검사부터 좀 해 볼게요.’

‘네. 그런데 저희 아버지가 보셔서 아시겠지만, 치매세요. 거기에 기운도 넘치셔서 힘드실 수도 있어요.’

보호자인 아들과 며느리는 의료진이 힘들지는 않을까 상당히 미안해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할아버님 기분 맞춰가면서 진료 잘 볼게요.’

노심초사하는 아들 내외와 달리 노인은 계속 먹을 것을 찾긴 했지만, 검사를 하는 동안 힘들게 하지는 않았다.

‘아! 이런!’

하지만 검사 결과가 좀 문제였다. 예상대로 할아버지는 변비가 맞았다.

엑스레이를 보자 노인의 대장 안에는 배설하지 못한 변이 가득했다.

‘다른 건 이상 없으시고, 할아버님께서 변비가 심하시네요. 변은 며칠을 못 보셨죠?’

‘그게 일주일이요.’

엑스레이를 볼 때도 이미 짐작은 했지만, 이찬희는 관장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알았다.

‘변을 좀 빼 드려야겠어요.’

‘네, 그럼 관장을 하나요? 제가 집에서 몇 번이나 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아니요. 지금 관장을 하면 장천공 위험도 있어서 관장은 하지 않고요. 제가 손으로 파 드릴 거예요.’

‘예!?’

‘세상에. 선생님께서 손으로 직접이요? 너무 죄송해서 어떡해요.’

‘별말씀을요. 변비가 심한 분들은 응급실 내원하면 의료진이 손으로 직접 파는 경우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할아버님이 움직이지 않게만 잘 잡아 주세요.’

응급실 끝 쪽 베드에 패드를 깔고 바닥에 커다란 통까지 준비한 다음 이찬희는 바로 술기에 들어갔다.

‘잘하고 계세요.’

모두의 걱정과 달리 노인은 생각보다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찬희도 그동안 손으로 변을 여러 번 파냈기에 이제는 감각적으로 잘했다.

어느덧 술기가 다 마무리되고 있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변이 나오고 술기가 잘 끝나 이찬희와 보호자 간호사까지 모두가 안도했다.

‘고생하셨어요. 할아버지. 끝났습니다.’

‘시원해.’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진심으로 감사하던 그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엄마 나, 주사 잘 맞았으니까 병원 나가서 초콜릿 사 줄 거야?’

‘그럼. 약속이니까 엄마가 사 줄게.’

베드에 누워있던 할아버지가 근처 베드에서 아이가 말한 ‘초콜릿’에 반응하며 갑자기 몸을 일으켜 이찬희의 몸을 의도치 않게 밀어 버린 것이다.

‘어! 어!’

‘어머! 세상에. 이 쌤!!’

그 때문에 중심을 잃은 이찬희가 넘어지면서 변이 가득한 통을 건드려 엎었고, 그대로 변을 다 뒤집어쓴 것이다.

응급실에 쏟아진 변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 뒤, 청소 담당 직원들이 소독약으로 깨끗이 닦아서 더 이상 냄새도 나지 않았다.

문제는 변을 뒤집어쓴 이찬희였다.

사람의 몸을 소독약으로 씻어 낼 수는 없기에 그 냄새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보통 손으로 변을 파내다 장갑이 찢어져 살에 묻어도 그 냄새가 며칠은 가는데, 온몸에 변을 뒤집어썼으니 고충은 어마어마했다.

농담이 아니라 샤워실에서 바디워시 두 통을 쓰고 몇 번이나 씻어도 냄새가 쉬이 가시질 않았다.

샤워실을 나오면서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했던 의사로서 현타를 처음으로 느꼈다.

지금까지 이찬희가 기운이 없고 우울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찬희! 어깨 펴! 네가 그 노인 환자 살린 거야.”

“그럴까요?”

“그럼. 변비가 오래되면 얼마나 괴로운지 너도 알잖아. 그리고 그렇게 손으로 직접 환자의 변을 꺼낸다는 거 그것도 대단한 거야. 잘했어.”

기운 없는 후배를 응원하기 위해 한 말이긴 하지만 진심이었다.

많은 환자와 의료진이 있는 가운데 똥을 뒤집어썼으니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사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의사도 사람이기에 이런 일을 겪고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 환자 보호자들도 엄청 미안해하셨다며.”

“네, 청소도 같이 하시고 저 샤워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몇 번이고 사과하셨어요. 환자와 보호자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알아. 근데 나도 예전에 변비 환자 술기 하다가 얼굴로 똥 맞은 적 있어. 그래서 지금 네가 어떤 기분인지 내가 잘 알아.”

“정말이세요?”

“저번에도 한번 말한 거 같은데? 정말이야. 나도 그때 첫날은 좀 힘들었어. 그런데 생각보다 냄새는 금방 빠지니까 너무 우울해하지 말고 얼른 가서 밥부터 먹어.”

온몸에서 강한 존재감으로 뿜어 대는 냄새 때문에 이찬희는 밥을 먹기 힘들었다.

“아직 밥도 안 먹었다며?”

“그냥 밥 생각이 없네요.”

“너, 내가 일하면서 밥 굶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 넌 오늘 멋있게 술기 잘했어. 환자를 위한 훈장이라고 생각하고 얼른 가서 밥 먹어. 얼른!”

“선생님…….”

한없이 따뜻한 눈빛과 후배를 향한 진심 어린 조언과 위로, 신뢰할 수밖에 없는 말투까지.

이찬희는 태경의 말에 점점 기분이 풀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어깨 펴. 의사라는 직업이 원래 외롭고 고된 일이잖아. 다 한 번씩 겪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기운 내. 알았어?”

“알겠습니다.”

“그래. 웃으니까 보기 좋잖아. 아! 그리고 찬희야?”

“네, 선생님.”

“너…….”

태경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머리 감은 거 맞지?”

“아! 선생님!!”

이찬희는 태경의 농담에 민망한 표정을 짓더니 곧장 계단으로 내려갔다.

“선생님도 진짜 너무하시네. 내가 샤워하면서 머리를 얼마나 빡빡 감았……!”

“이 쌤!”

혼잣말하며 계단을 내려오던 이찬희 앞에 최모나가 길을 막아섰다.

“어! 개모나. 왜?”

“이유 묻지 말고 조용히 나 따라와.”

“지금?”

“어, 지금 당장.”

자기 몸에서 냄새가 날까 봐 머뭇거리며 되묻는 이찬희를 보던 최모나가 그의 가운을 당기며 다시 말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두 사람은 사람이 뜸한 1층 구석 복도에 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자! 이거 먹어.”

최모나는 가운 주머니에서 꺼낸 김밥을 이찬희 손에 올려놓았다.

“웬 김밥이야.”

“이 쌤, 먹으라고 사 왔어.”

“김밥을 사 왔다고? 나 때문에?”

“어. 너 때문에.”

편의점 김밥도 아니고 근처에서 꽤 인기 있는 김밥 전문집 김밥으로, 우리병원 식구들이 전부 좋아하는 맛집이었다.

이찬희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최모나는 그가 오늘은 식당에 가지 않겠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깐 시간이 있을 때 얼른 나가 김밥을 사 왔다.

“배고플 거 아니야. 여기서 먹고 와. 그리고…….”

잠깐 좌우를 살피던 최모나는 이찬희를 와락 끌어 앉으며 등을 토닥였다.

“야! 개모나. 너 뭐해?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쉿! 조용. 너한테서 냄새 안 나.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바디워시 냄새만 나고 좋네.”

“개모나…….”

“그럼, 나 간다. 김밥 먹고 기운 내서 들어와.”

평소 무뚝뚝한 성격의 최모나가 보인 행동의 이찬희는 감동과 함께 심란한 마음마저 풀어졌다.

“개모나! 너밖에 없다. 고마워. 역시 내 여친이 최고야.”

김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 이찬희가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최모나는 남자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냄새를 참았다는 것과, 이찬희를 안을 때 몰래 그의 가운 주머니에 작은 계피 하나를 넣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 * *

똑똑-

“네, 들어오세요.”

철컥-

“안녕하세요.”

태경의 부름에 소탈한 모습의 50대 중년 여성이 인사를 하며 진료실로 들어왔다.

“잘 지내셨죠? 원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뭔가 이 시간에 찾아와야지 원장님이 조금 여유롭지 않을까 해서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태경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여자는 히트 작품을 많이 낸 유명한 드라마 작가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작가의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다 알 정도로 그만큼 손가락에 꼽히는 작가였다.

태경이 유명 작가와 알게 된 건 신화대 시절 작가의 남편 수술을 집도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가끔 작가가 드라마에 들어갈 의학적인 부분을 물어보면 답변해 주고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이번 드라마에도 의학적인 부분이 간혹 나왔는데 그때마다 태경이 감수를 봐 줬었다.

“남편분은 잘 지내시죠?”

“그럼요. 원장님 덕분에 지금까지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그게 어디 제 덕인가요. 남편분이 건강관리를 잘해서 그런 거죠.”

“그것도 원장님이 다 그렇게 만들어 주신 거잖아요. 오늘 원장님 뵈러 간다니까 남편이 안부 꼭 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어요.”

“제 안부도 전해 주세요.”

“네, 다음에는 남편이랑 같이 인사드리러 올게요. 그리고 대본 마지막 회까지 감수 봐 주신 거 정말 감사드려요.”

“감사는요. 분량도 적고 저도 수술 복기하는 거 같아 재미있게 했어요.”

“댓글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드라마 의학 고증이 정말 잘됐다고 네티즌들 칭찬이 어마어마해요.”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이쯤 되니 제가 불쑥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시죠?”

“네.”

“바쁘실 테니까 빨리 말씀드릴게요. 저, 원장님께 간곡한 부탁이 있어서 직접 찾아왔어요.”

“부탁이요?”

“네, 원장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진지하게 말씀하시니까 뭔가 긴장되는데요? 무슨 부탁인데요? 혹시 몸이 안 좋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