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63화 (362/472)

363화. 약품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두 분께서 오해하실까 봐 하는 말인데 저, 정말 아닙니다.”

1137번은 꽤 심각한 표정으로 하소연하듯 말했다.

“갑자기 뭐가 오해고 뭐가 아니라는 거야?”

“저 바깥에 나오려고 일부러 아픈 척을 하거나 그런 거 아닙니다.”

1137번은 잔뜩 억울한 눈빛과 표정까지 더해 자기 이야기를 하소연하듯 쏟아냈다.

“오랫동안 수감 생활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나쁜 마음 먹은 적 없었고, 성실하게 복역했습니다. 그런데 아까 원장님께서 수술할 필요가 없어서 안 했다고 말을 하셨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마치 일부러 아픈 척을 한 사람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두 분이 안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많이 맞았습니다. 아, 이러다 내가 죽겠구나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로 두들겨 맞았어요.”

1137번의 말을 들은 두 교도관은 잠시 어안이 벙벙한 채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큭!”

그러다 선배 교도관이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난 또 뭐라고. 우리가 지금 자네가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오해할까 봐 그런 거야?”

“네? 네…….”

“이 사람아. 나도 김 교도관도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자네 말처럼 그동안 자네가 어떤 수감생활을 했는지 우리가 가장 잘 알아. 안 그래?”

“그럼요. 우리 교도소에서 가장 모범수를 뽑으라고 하면 그중에 한 명은 무조건 1137번이잖아요. 다른 제소자라면 모를까 이 친구가 꾀병이라니……. 그럴 사람이 아니죠.”

“잘 들었지? 아까 원장님이 갑자기 심한 폭행으로 고통을 심하게 느낄 수도 있고, 사람마다 느끼는 강도가 다르다고 하셨잖아. 아무도 자네가 일부러 아픈 척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하지 말고 자네 몸이나 신경 써.”

1137번의 걱정과 달리 두 교도관은 오히려 그를 달래며 두둔했다.

죄를 짓고 교도소에 있는 사람이고 항상 주의 관찰을 하고 했지만, 평소 행실이 워낙 바른 제소자였기에 그만큼 신뢰가 두터웠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그 죽상하고 있는 얼굴이나 펴.”

“네, 교도관님.”

그 뒤, 1137번은 마취가 풀릴 때까지 베드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 * *

똑똑-

“네, 들어오세요.”

“선배?”

의진이 진료실 안으로 들어오자 모니터를 보고 있던 태경의 얼굴 위로 불이 켜진 듯 환해졌다.

“회진 다녀오는 거야?”

“네.”

“근종 제거한 환자는 좀 어때?”

“경과도 좋고 회복도 잘되고 있어요.”

“레몬 티?”

“좋죠.”

의진은 태경이 주는 머그잔을 받으며 나란히 앉아 대화를 이어 갔다.

“환자가 수술 전에 걱정이 많았는데 잘돼서 다행이에요.”

의진은 최근에 20대 초반 환자의 자궁근종 제거 수술을 했다.

혹의 크기가 제법 컸기에 개복을 고려했지만, 나이도 어리고 나중에 결혼을 생각해서 환자도 보호자도 복강경으로 하길 원했다.

결국, 여러 수술 자료를 찾아보고 고민 끝에 복강경이 가능하다는 판단에 수술을 진행했고, 결과는 좋았다.

의진은 요즘 완전히 복귀한 이동훈 때문에 산부인과 환자들은 전보다 더 보고 있다. 학회도 틈틈이 다니고, 논문과 자료도 열심히 찾아보면서 산부인과 의사로서도 열심히 하는 중이다.

“네가 복강경으로 수술 잘했기 때문에 잘된 거지.”

“선배가 자꾸 그러면 저 어깨 힘 들어가요.”

“이 정도는 얼마든지 어깨 힘줘도 되지.”

“그래요? 그러면 이렇게?”

“큭! 그게 뭐야.”

의진이 잔뜩 힘을 주며 어깨를 올리고 과한 동작을 취하자 태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참! 그 제소자 환자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일단은 좀 더 두고 보려고. 직접 열어 보니까 수술할 정도로 아픈 건 확실히 아니야. 그리고 냄…….”

태경은 순간 저도 모르게 1137번의 다섯 번째 바이탈의 대해 이야기를 할 뻔했다.

“냄? 냄이 뭔데요? 선배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아니, 냄새가 너무 좋아서.”

“냄새? 무슨 냄새요?”

“레몬 티 냄새.”

“선배도 참. 레몬 티 냄새가 뭐야, 레몬 티 향기지.”

“듣고 보니 그러네. 의진이 네가 준 거라 그런지 다른 레몬 티보다 더 향기로운 거 같아.”

“에이, 그런 게 아니라 레몬 티가 좋아서 그래요. 엄마가 보내 주신 건데 유명한 제품이래요.”

“그랬구나. 그래도 난 의진이가 줘서 더 좋은 거로 할게.”

“그럼 그런 거로. 어찌 됐든 수술할 정도로 안 좋은 게 아니라니 잘됐다. 수술했으면 교도소 돌아가서도 회복에 전념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 아무리 수감 생활이 예전보다 좋아졌다고는 해도 바깥 생활과는 차이가 있으니까. 이왕 병원에 나온 김에 외상 치료 잘 받고 통증 잡고 돌아가는 거로 해야지.”

“그런데 예전에 척추 수술한 건 왜 말을 안 했대요. 보통 수술 앞두면 물어보기도 전에 환자들이 다 말하잖아요.”

“안 그래도 나도 물어봤는데, 너무 아파서 그런 생각도 못 했대. 이지국 선생님도 수술 여부는 모르셨다고 하셨고.”

“그렇구나. 맞다! 동훈 쌤이 꾀병일 수도 있다고 하시던데 선배가 보기에는 어때요?”

“글쎄! 그런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솔직히 내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그거야 잘 모르지. 다만 나는 의사로서 환자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내가 보고 판단해서 진료하고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지.”

“…….”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의진이 뚫어져라 쳐다보자 태경이 물었다.

“아니요. 내 남자친구여서 그런 게 아니라 선배 참 멋있어서요.”

“그래? 이러다 또 반하는 거 아니야?”

“뭐야, 선배 은근히 능글맞아진 거 알아요?”

“여자 친구 앞에서 다들 이러는 거 아니야?”

“아니거든요.”

태경은 의진의 말에 피식 웃었지만, 표정은 어딘가 개운해 보이지 않은 것만 같았다.

* * *

열심히 일하던 오창규는 잠시 여유가 찾아오자 병원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문한 커피와 음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예.”

배달원에게 음료를 받은 그는 병원 곳곳을 돌며 의료진과 직원들에게 차를 전달했다.

“이것 좀 드세요.”

“어머, 바닐라 라테잖아.”

“오 쌤이 쏘는 거예요?”

접수처 직원 둘이 봉지 안에서 달달한 향기를 풍기는 테이크아웃 잔을 꺼냈다.

“네.”

“얻어 마시는 것도 한 번이지 저번에도 그전에도 그렇고 이게 벌써 몇 번째야.”

“맞아요. 미안해서 못 마시겠어요.”

한두 번도 아니고 오창규는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 종종 음료를 사서 직원들에게 주고는 했다.

“그냥 편하게 드시면 돼요. 매실차 마시려고 주문했다가 제 것만 시키기 뭐해서 같이 시켰어요.”

“아! 맞다. 오 쌤 아까 장염 증상으로 고생했다고 했지?”

“네. 전 장염 올 때 매실차 마시면 잘 듣더라고요.”

“따뜻하고 좋지. 근데 이거 한두 푼도 아니고 계속 얻어만 먹어서 어째.”

“그러니까요. 다음에 우리가 살게요.”

“저, 정말 괜찮아요. 제가 워낙 음료나 디저트를 좋아해서 친구들한테 생일마다 기프티콘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돈으로 산 거 아니에요.”

“고마워서 그러지. 그럼 잘 마실게요.”

“네, 수고하세요.”

오창규가 접수처를 벗어나고 바닐라 라테를 마시고 있던 접수처 직원이 동료가 있는 쪽으로 의자를 밀며 다가갔다.

“언니?”

“응?”

“오 쌤 말이에요. 금수저 아닐까요?

“뜬금없이 웬 금수저 타령이야.”

“내가 라떼 먹으면서 생각해 봤는데 뭔가 있는 집 자식이지 않을까 해서요.”

“왜? 커피 잘 사 줘서?”

“아니, 이게 그렇잖아요. 아까 언니 말대로 한두 푼도 아니고 우리 병원에서 일 시작한 지 한 달 좀 넘은 사람이 돈이 얼마나 있겠어요.”

“선물 받은 거로 산 거라고 했잖아.”

“내가 아까 오 쌤 표정을 보니까 아닌 거 같아요. 내돈내산 한 건데 직원들이 괜히 미안해하니까 그런 거 같은 느낌. 보면 사람이 생긴 것도 뭔가 귀티라고 할까? 그런 게 좀 있어요.”

“얼씨구! 인제 보니 자기가 오 쌤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구나?”

“그런가? 그러고 보니까 잘생긴 거 같기도 하고…….”

“에라이! 쉰 소리 그만하고 얼른 일이나 하셔.”

“왜요? 잘하면 우리 병원 세 번째 사내 커플이 될지 또 누가 알아요.”

“응. 아니야. 오 쌤 여친 있어.”

“뭐야, 정말요?”

“그래. 저번에 수 쌤이랑 같이 저녁 먹으면서 물어봤더니 고등학교 때부터 만난 첫사랑이란다. 그러니까 김칫국 그만 먹어.”

“진짜 혼자 김칫국 원샷했네요. 오 쌤. 아쉽지만 제 마음에서 보내 드릴게요.”

“아주 혼자 드라마를 찍어요.”

접수처 직원들이 오창규의 이야기를 하는 사이 조용한 복도를 지나던 그는 약품실 문 앞에서 멈췄다.

끼익-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살피던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천히 문을 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럭- 탁-

들고 있던 커피를 한쪽 선반 위에 내려놓은 그는 약품실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이쪽에 있을 텐데…….”

부스럭- 탁-

약 종류별로 정리된 투명한 서랍을 하나씩 여닫으며 계속 확인하던 중 드디어 원하는 걸 발견했다.

“여기 있었네.”

오창규는 계속 문 쪽에 귀를 바짝 세우며 약품을 챙겼다. 그가 챙긴 약품은 마약성 진통제와 강한 수면제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렇게 약을 챙긴 오창규는 커피를 올려놓은 선반으로 다가가 세 잔의 커피에 차례대로 수면제를 빻아서 넣었다.

첫 번째 커피에는 사람이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용량에서 조금 더 추가해 넣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커피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수면제를 빻아서 쏟아부었다.

곧이어 선반 위에 떨어진 수면제 가루를 손으로 털어내던 바로 그때였다.

철컥-

“어! 오 쌤?”

별안간 약품실 문이 열리더니 여자 간호사가 들어왔고 오창규는 살짝 당황했다.

커피 안에 약을 넣는 일에 집중하고 있던 그는 간호사가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뭐 하세요?”

“저요? 약품 가지러 왔어요.”

당황함을 숨긴 오창규는 평소와 같은 침착한 말투가 이어졌다.

“병동에 커피 갖다 드리러 가는 길인데 스테이션 선생님이 부탁하셔서요.”

오창규는 문 앞쪽에 서 있는 간호사를 향해 몸을 틀면서 손으로 커피를 만지는 척 선반 바닥에 남은 가루를 손으로 빠르게 쓸어 버렸다.

“그렇구나. 저도 수액 가지어 왔는데. 오늘따라 수액 맞으러 오는 분들이 꽤 있어서요.”

“아, 그래요? 바쁘시겠어요.”

“이 정도는 바쁜 것도 아니죠.”

“전, 먼저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저기, 오 쌤?”

커피를 챙긴 오창규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수액을 챙기던 간호사가 다급하게 불렀다.

“네?”

“이거 두고 갔어요?”

간호사는 선반 위에 두고 간 휴대폰을 건네줬다.

“고마워요. 그럼 수고하세요.”

“쌤도요.”

철컥-

빠르게 약품실을 나온 오창규가 향한 곳은 병원에 있는 CCTV 관리실이었다.

“바쁘세요?”

“오 선생, 어쩐 일이야.”

“커피 한잔하시라고 들렀어요.”

“나 커피 주려고 온 거야?”

“네.”

“식당에서 가져온 커피 다 마셔서 갈까 말까 하고 있었거든.”

관리실 직원은 빈 텀블러를 보여 주며 말을 이었다.

“카페인을 줄여야 하는데 쉽지 않아. 커피 수혈이 부족하면 일이 안 되거든.”

“그래서 디카페인 커피로 가져왔어요.”

“그래? 이거 완전 감동인데? 고마워. 잘 먹을게.”

오창규는 직접 빨대까지 꽂은 첫 번째 커피를 직원에게 건넸지만, 직원은 건네받은 테이크아웃 잔을 책상 한쪽에 놓았다.

순간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움찔하며 움직였다. 바로 커피를 마실 줄 알았던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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