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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바이탈-364화 (363/472)

364화. 오 선생, 그만 퇴근해

순간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움찔하며 움직였다. 바로 커피를 마실 줄 알았던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요즘 일하는 건 어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발목 다친 건 좀 괜찮으세요?”

“그냥 가볍게 삐끗했던 거야. 물리치료 몇 번 받으니까 아무 문제 없어.”

“그래도 항상 조심하세요.”

“나이가 있는데 나도 조심해야지. 그런데 이거 커피 향이 엄청 진하네.”

“역시 커피를 좋아하시니까 잘 아시네요.”

오창규의 목소리 톤이 한 톤 높아졌다. 직원이 커피를 마시게 유도하려던 그는 알아서 테이크아웃 잔을 손에 쥔 직원을 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고급 원두를 사용하고 매장에서 직접 볶은 원두로 내린 커피여서 향이 깊고 맛도 깔끔한 게 특징이래요.”

“그래? 그럼 어디 한번 마셔 볼까.”

투명한 빨대 안으로 진한 커피가 직원의 입으로 빠르게 옮겨졌다.

“진짜 맛이 다른데? 깔끔하고 텁텁하지도 않아.”

만족하며 커피를 마시는 직원을 본 오창규의 표정 역시 만족스러웠다.

그 뒤, 몇 마디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고 관리실을 나온 그는 두 번째, 세 번째 커피 주인공인 교도관들에게 향했다.

“어제도 챙겨 주시더니 오늘도 커피를 갖다 주셨네.”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안 그래도 원장님부터 다른 선생님들도 다들 신경 써 주시는데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교도관들은 고마운 마음과 함께 민망한지 어쩔 줄 몰라 했다.

태경의 배려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도 병원에서 배식받고 있었는데, 어제의 이어 오늘도 커피를 받으니 뭔가 민망하기까지 했다.

“그냥 직원들 커피 시키다가 두 분 생각이 나서 함께 시켰어요. 부담 갖지 마시고 드세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선생님은 정말 친절하시네요.”

“아니에요. 다른 선생님들이 더 친절하세요. 그런데 환자분은 주무시나 봐요.”

교도관을 보고 있던 오창규의 시선이 미동 없이 벽을 보고 옆으로 누워 있는 1137번을 향했다.

“네, 조금 전에 잠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잠을 푹 자는 것도 쉽지 않거든요.”

“그렇겠네요. 그럼 쉬세요. 환자분 주무시는데 가 볼게……. 아, 맞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던 오창규는 뭔가 깜빡한 게 있는지 잠시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교도관님. 병실이랑 화장실 쓰레기 좀 수거해 가도 될까요? 청소 담당해 주시는 이모님이 아까 발목을 접질려서 제가 올라온 김에 도와드리기로 했거든요.”

“그럼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쓰레기 봉지를 꺼내며 태연하게 병실 쓰레기를 비우는 오창규의 모습은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누구라도 그의 말이 사실이라도 믿을 법했다.

병실 쓰레기를 비운 오창규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는 화장실로 들어가며 일부러 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교도관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화장실 안쪽까지 보이지 않았기에 하려는 행동에 제약은 없었다.

오창규는 일부러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신이 쓰레기를 버리고 있다는 걸 알리려는 듯했다.

그리고 세면대 물을 튼 뒤, 주머니에 있던 몇 가지 물건들을 조용하고 빠르게 어딘가에 숨긴 뒤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가 볼게요.”

“네, 수고하세요.”

드르륵-

“병실에서 밥도 얻어먹고 커피까지 얻어먹고 있으니 이런 호사가 다 없네.”

“솔직히 말하면 근무할 때보다 더 편합니다.”

“야, 이 사람아.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래도 똑바로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해.”

“당연하죠. 잔소리 그만하시고 얼른 커피나 드세요.”

천천히 병실 문을 닫은 오창규는 교도관들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커피를 마시자 완전히 문을 닫았다.

그다음 병동에 있는 공용 화장실에 들어가 쓰레기를 처리한 뒤 병동을 내려갔다.

“오 선생?”

임정숙 간호사가 1층으로 내려온 오창규를 불렀다.

“몸도 안 좋다면서 어딜 그렇게 다녀와.”

“교도관분들 커피 갖다 드리고 오는 길이에요.”

“그분들 커피까지 산 거야?”

“커피를 워낙 좋아하신다고 해서요.”

“베푸는 건 좋은데 이제부터 간식 먹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 직원이 한두 명도 아니고 뭐 하러 돈 써 가면서 그래. 혼자 살면 나갈 돈도 많을 텐데 돈 아껴야지.”

“네, 선생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 정신 좀 봐. 이 말 하려고 부른 게 아닌데……. 오 선생, 그만 퇴근해.”

“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해야 할 퇴근이란 말에 오창규는 놀라며 되물었다.

“퇴근이요? 지금요?”

“그래. 오 선생 장염 때문에 고생했잖아. 아까 저녁 수술도 미뤄져서 일손도 넉넉하고, 내가 원장님께 말했어. 지금 한가할 때 얼른 가.”

“그래요. 임 선생님 말대로 말고 퇴근해요.”

때마침 응급실에서 나온 태경도 임정숙 간호사 말에 힘을 실었다.

“일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요.”

아직은 퇴근할 마음이 전혀 없는 오창규는 원장인 태경까지 나서자 안 그래도 다급한 마음이 더 다급해졌다.

“아닙니다. 원장님. 근무하겠습니다.”

“그 마음은 좋은데 너무 열심히 하면 몸에 무리와요.”

태경이 본 오창규는 상당히 성실한 직원이었다.

바쁜 날이나 덜 바쁜 날이나 항상 열심히 일했고, 평소 일을 찾아서 할 정도로 열정이 남다르다는 것도 임정숙 간호사를 통해 자주 들었다.

“임 선생님이 너무 열심히 한다고 걱정하던데 오늘은 들어가 쉬어요.”

“원장님, 마음 써 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정말 괜찮습니다.”

“퇴근하라는데 싫다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그래요. 오 쌤. 이럴 때 일찍 가는 거야.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치킨에 맥주 한 잔 딱……. 아! 장염이라고 했지. 그냥 가서 푹 쉬어요.”

“맞아요. 원장님께서 허락까지 하셨는데 얼른 가요. 나 같으면 당장 갈 텐데.”

접수처 직원들까지 나서서 그의 퇴근을 재촉했다.

“아니에요. 저 어차피 집에 가면 반겨 줄 사람도 없고 일하는 게 마음이 더 편합니다. 아까 약 먹어서 그런지 컨디션도 좋고 근무 시간 다 채우고 갈게요. 이럴 때 혼자 있으면 전 기분이 더 별로거든요.”

“정말 괜찮겠어?”

“네, 제가 정 힘들면 선생님께 먼저 말씀드리고 그때 갈게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고 가서 좀 쉬어요.”

“네.”

인사한 뒤 직원 휴게실로 향하는 오창규를 보며 임정숙 간호사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참! 보면 볼수록 사람이 진국이에요.”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는 거 같아요.”

“제 말이요. 앞으로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일머리도 좋고 같이 오래 일했으면 좋겠어요.”

“상관이 좋은 사람이고 거기에 잘해 주기까지 하는데, 오래 일하고 싶죠.”

“원장님이야 늘 모든 직원한테 다 잘해 주시죠.”

“저 말고요.”

“저요?”

태경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아니라고 하자 임정숙 간호사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원장님도 참. 제가 무슨 좋은 상관이라고 그러세요.”

“원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임 선생은 좋은 상관이에요.”

“팀장님까지 왜들 그러세요.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저도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한껏 기분이 좋아진 임정숙 간호사는 태경과 함께 응급실로 향했다.

* * *

새벽 2시-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응급실과 진료실이 있는 1층은 오가는 환자들이 있었지만, 병동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복도와 스테이션 쪽을 제외한 환자들이 자는 병실은 소등 중이었다.

이따금 옆 환자의 소음이나 핸드폰 소리, 또는 난방 문제 등 평소처럼 사소한 문제가 있을 때만 병동 간호사들이 호출받고 복도를 지나갈 뿐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른 자세로 누워 있던 1137번은 마치 처음부터 잠들지 않은 것처럼 번뜩 눈을 떴다.

틱- 탁-

그가 움직이자 여전히 발에 채워진 수갑이 베드랑 부딪히며 작은 소음을 냈다.

“교도관님?”

1137번이 교도관을 불렀지만, 그 누구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후…….”

“후우.”

일정한 숨소리를 내는 교도관은 아니, 교도관들은 전부 자고 있었다.

분명 전날에는 몇 시간마다 돌아가며 잠을 잤던 사람들이 지금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수면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먹은 테이크아웃 커피잔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오창규가 건넨 다량의 수면제가 들어간 커피를 마신 두 사람은 의지와 상관없이 잠에 빠져든 것이다.

“교도관님?”

“…….”

조금 전보다 목소리를 높인 1137번이 다시 한번 두 사람을 불렀지만, 잠에 취한 교도관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제대로 잠들었네.”

상체를 완전히 일으켰던 1137번은 다시 반듯하게 누웠다.

그리고 몸을 왼쪽으로 살짝 옮긴 뒤, 오른쪽 팔을 베드 매트리스 안쪽으로 깊게 넣었다.

병원 매트리스는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매트리스처럼 두껍지 않기 때문에 무게감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한 손으로도 살짝 들어 올리는 데 문제가 없었다.

‘찾기 쉽게 팔꿈치 안쪽까지 넣어 놓을게요.’

오창규가 했던 말을 떠올린 그는 정확히 팔꿈치 안쪽까지 손을 넣었다.

그 뒤, 이를 악물며 아직 수술 후 통증이 느껴지는 허리 부분을 살짝 들어 올렸다.

“……!”

그러자 열쇠 비슷한 작고 가느다란 쇠가 손가락에 걸렸다.

1137번은 매트리스에 붙어 있는 작은 쇠를 꺼낸 뒤 곧장 몸을 일으켜 아주 손쉽게 수갑을 풀었다.

드르륵-

그러고 나서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 뚜껑을 들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차례대로 꺼냈다.

물에 젖지 않도록 봉지에 싸여 있는 건 마약성 진통제와 오일, 목에 걸 수 있는 끈이 있는 휴대폰 그리고 커터 칼이었다.

가장 먼저 휴대폰의 전원을 켠 1137번은 사진첩으로 들어갔다.

휴대폰 사진첩에는 기사를 캡처한 사진과 단아하게 웃고 있는 젊은 남녀의 사진과 그녀의 정보가 적힌 종이를 찍은 사진이 있었다.

-삼토그룹 차남 차태철 씨와 예랑물산 막내딸 고지이 씨가 약혼을 발표했습니다. 두 사람은 내년 가을 화촉을 밝힐 예정이며 결혼 후, 차 씨의 경영 수업으로 인해 당분간 미국에 머물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지금쯤 아주 신났을 거야. 그래, 많이 웃고 있어라.’

기사를 읽은 그는 썩은 표정으로 속으로 말한 뒤, 곧장 문자를 보냈다.

-창규야, 수갑 풀었다. 바로 시작할게.

-네, 형님. 조심하세요.

-창규야, 너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예, 말씀하세요.

-그전에 무조건 들어주겠다고 약속부터 해.

-형님, 그런데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요. 조금 있으면 의료진 돌아다닐 수도 있어요.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잖아요.

여기 원장님이 워낙 꼼꼼한 분이라 언제 병동에 돌아다닐지 몰라요. 지금 진료 중이라 그렇지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말씀하세요.

-급해! 너한테 약속받아야지 내가 움직일 수 있어.

-알겠습니다. 무조건 약속할게요.

-내가 신호 보내면 넌 바로 병원에서 나가. 핸드폰도 바로 끄고 유심 버리고 기기는 박살 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리고 멀리 나가 있어. 혹시 잡히면 넌 처음부터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해. 알았어?

문자를 보낸 즉시 바로 답장이 오질 않자 1137번은 불편한 말투로 다시 문자를 보냈다.

-창규야! 오창규 빨리 대답해!

-네, 형님. 약속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바지는 화장지 통 안에 있어요.

-그래, 고맙다. 그리고 너까지 이 일에 끌어들여서 미안하다.

-형님 일이지만 제 일이기도 해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몇 번의 문자를 주고받은 1137번은 변기 옆에 있는 대형 화장실 케이스를 열고 그 안에 돌돌 말려 있는 바지를 꺼냈다.

바지를 펼쳐 수건걸이에 걸쳐 놓은 그는 팬티만 남긴 채 입원 복을 전부 벗었다.

그러더니 세면대 물을 한 모금 입에 물고 변기에서 꺼낸 진통제를 꿀꺽 삼킨 다음, 오일을 팔, 다리 할 거 없이 온몸에 도배하듯 꼼꼼히 발랐다.

온몸에 발라진 오일 때문에 미끄러운 1137번은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수건걸이에 놓은 바지를 입고 물건을 챙겨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드르륵-

그러고 나서 자신과 키가 비슷한 후배 교도관의 상의와 양말을 신발까지 벗겨 입은 뒤, 마지막으로 그의 모자를 푹 눌러 섰다.

“잘 챙겨 주셨는데 두 분께 죄송합니다. 절 좀 이해해 주세요.”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교도관들에게 꾸벅 인사를 한 1137번은 혼잣말로 속삭였다.

그리고 켜져 있는 불을 끄고 태연하게 병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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