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그거 가능할 거 같지?
“그냥 한 말 아니에요. 유혁진 씨가 도움이 필요한 상태고 그게 합당한 일이면 도와줄게요.”
“원장님 믿겠습니다. 그리고 제 부탁은 형님을 경찰에 신고하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대신 저는! 저는 처벌을 받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말이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거 잘 알지만, 혁진 형님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에요.”
교도소 재소자를 상대로 좋은 사람이라는 아이러니한 말과 함께 오창규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실제로 그 일이 있기 전까지도 그렇게 산 사람이고요.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고 때문에 저렇게 됐지만 진짜 좋은 사람입니다. 원장님도 들으셨겠지만, 형님은 알아주는 모범수예요. 이번에 가석방 심사를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데 경찰이 이 사실을 안다면 가석방은 물 건너갈 게 뻔하고 형량도 더 늘어날 거예요. 그러니까 원장님이 딱 한 번만 모른 척해 주세요.”
“내가 모른 척해도 교도관님들이 교도소에 알리면 소용없는 일 아닌가요?”
“병실에 있는 교도관들은 그렇게 쉽게 알리지 못할 겁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승진을 앞두고 있는데 이 일이 알려지면 타격이 크거든요.”
유혁진에게 들은 건지 오창규 역시 교도관들에 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경찰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에 100% 그렇게 하겠다고 확답은 할 수 없어요.”
“…….”
“대신 유혁진이 환풍구에서 나온 뒤에 별다른 소동 없이 순순히 응해 주면 고려는 해 볼게요. 하지만 만약 오 선생이 다른 마음을 먹거나 누구라도 다치는 사람이 생기거나 다시 도주 우려가 있다고 느낀다면 그땐 가만 있지 않고 바로 경찰에 알릴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태경의 흔들림 없는 단호함에 오창규는 더 이상 타협점이 없다는 걸 알고 순응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제안한 사람이 태경이라서 믿을 수 있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다.
지금까지 환자나 보호자, 직원들 할 거 없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봤을 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적어도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혁진 몸에 문제가 생긴 이상, 더는 일을 진행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철컥-
“원장님!”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던 중 최 팀장이 진료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다급하게 들어온 그는 핸드폰 사진을 들이밀며 말했다.
“여기, 찾았습니다.”
최 팀장이 내민 건, 한쪽에 환풍구 구조가 있는 오래된 병원 설계도를 찍은 사진이었다.
태경은 혹시라도 필요할지도 몰라서 아까 최 팀장에게 환풍구 구조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물었고, 최 팀장은 문서 저장실에서 오래된 설계도를 찾을 수 있었다.
“종이가 너무 낡아서 찢어질까 봐 제가 사진으로 찍어 왔습니다.”
“잘하셨어요.”
환풍구 구조를 보면 태경은 뭔가를 발견하고 오창규에게 핸드폰 사진을 보여 줬다.
“여기 보이죠? 이대로는 어차피 밖으로 나갈 수는 없어요.”
“……!”
사진을 보던 오창규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환풍구 안에는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엑스 모양의 구조물이 있었다.
보안 카메라부터 시작해서 건물 안팎으로 꽤 자세히 알아봤다고 자부했는데, 차마 환풍구 안에 저런 구조물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쩌면 유혁진은 처음부터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형님, 아무래도 더는 힘들 거 같아요.’
오창규는 씁쓸한 표정으로 유혁진을 떠올리며 속으로 말했다.
“정말……이네요. 원장님 말씀대로 나갈 수가 없네요.”
“현재 지금 유혁진이 믿을 만한 사람은 오 선생뿐이니까 내 생각에는 몸 상태를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오게 하면 어떨까 싶어요.”
“잠시만요.”
오창규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유혁진이 보낸 문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숨어서 문자를 볼 필요가 없었다.
-창규야?
-여기 문제가 생겼어. 네 도움이 필요해.
오창규는 문자 내용을 태경에게 알려 줬다.
“아까 원장님이 들어오기 전에 문자를 확인했는데 형님한테 문제가 생겼다는 문자가 왔었어요.”
“환풍구가 막혔다고 말하려는 게 아닐까요?”
“네, 제 생각도 그래요.”
“답장은요?”
“아니요. 못 했어요.”
“잘됐네요. 이 문자 내용으로 유혁진을 밖으로 나오게 하면 되겠어요.”
“네. 그러면 될 거 같아요.”
“일단 문자 온 지 좀 됐으니까 얼른 답장부터 해요. 의심하지 않게 환자 때문에 늦었다고 해요.”
태경의 말대로 오창규는 유혁진에게 답문을 보냈다. 안 그래 무슨 일인지 계속 궁금했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다.
-형님, 죄송해요. 응급 환자를 돌보느라 문자를 이제야 봤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그보다 넌 괜찮은 거야? 그리고 교도관들은 아직도 안 깨어났어?
오창규의 문자를 기다렸던 유혁진은 빠르게 답장을 보내 왔고 두 사람의 문자가 이어졌다.
-네, 전 괜찮아요. 교도관들은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제가 조금 전에 올라갔다 왔는데 아직도 잠에 취해 있어요. 형님은요? 형님은 괜찮으세요?
-그래? 다행이네. 창규야 여기 문제가 있어. 아무래도 환풍구로 나가는 건 힘들 거 같아. 통로가 막혔어.
유혁진은 예상대로 환풍구를 막고 있는 구조물에 대해 말했다.
-통로가요? 그것까지는 제가 몰랐어요. 어떡하죠? 지금으로서는 형님이 다시 밖으로 나오는 방법밖에는 없을 거 같아요. 어차피 지금 교도관들도 자고 있고 새벽 시간이라 사람들도 다니지 않으니까 괜찮을 거 같아요.
-나도 생각해 봤는데 그 방법밖에 없는 거 같다. 그럼 옷가지랑 붕대 좀 준비해 줘. 환풍구 앞에서 보자.
-붕대요? 형님 어디 다치셨어요?
-그냥 살짝 베인 정도야 괜찮아. 창규야 교도관들이 아무리 수면제를 먹은 상태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깨어나고, 누가 깨울 수도 있으니까 빨리 준비해서 나가야 할 거 같다.
-네, 형님 제가 준비해서 10분 안으로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 고맙다.
두 사람의 문자 내용을 확인한 태경은 더 이상 기다릴 것 없이 서둘렀다.
우선 교도관들에게 이 사실을 전부 알렸고, 다행히 상태가 좋아진 두 사람은 수갑을 들고 중앙 계단을 이용해 진료실로 내려왔다.
모든 인원이 모이자 태경은 각자에게 당부 사항을 전했다.
“두 분은 유혁진이 나오자마자 바로 수갑을 채워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최 팀장님과 장 보안요원님은 환풍구 입구 양쪽으로 대기했다가 유혁진이 나오면 교도관님들과 함께 도망가지 못하게 잘 잡아 주세요. 그리고 수갑이 채워질 때까지 긴장 늦추지 말고 눈도 떼지 마세요.”
“네, 원장님.”
“오 선생은 계속 연락 취하면서 밖에 아무도 없다는 걸 강조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해.”
“…….”
오창규는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 선생?”
“그냥……. 이게 과연 맞는 일인지 정말 형님을 위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했던 일이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형님이 너무 불쌍하고 원통해서…….”
“오 선생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진짜 유혁진을 형님으로 생각하고 도와주고 싶다면 지금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는 걸 잘 알 거야.”
“그래요. 원장님 말이 맞아요. 만약 이대로 유혁진이 병원 밖으로 나갔다면 그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친구를 도와줄 수 없어요.”
“맞습니다. 이게 최선이에요.”
행여 오창규가 다른 마음을 먹을까 봐 태경에 이어 교도관들까지 그를 다독였다.
“오 선생, 시간 없어.”
“하! 알겠습니다.”
결국 오창규는 마음을 다잡으며 사람들과 함께 유혁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태경은 임정숙 간호사에게 다른 의료진이 병동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부탁했다.
오창규가 가장 먼저 올라가고 태경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문제의 환풍구 입구에 다다르자 각자 약속했던 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 뒤 태경이 검지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보냈다.
“형님?”
그러자 오창규가 환풍구 입구를 떼어 낸 뒤 그 안으로 얼굴을 살짝 넣은 채 유혁진을 불렀다.
핸드폰으로 통화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괜히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새어 들어갈 수도 있었기에 직접 말하는 걸로 계획을 변경했다.
“제 말 들리세요? 들리시면 바닥을 살짝 두드려 보세요.”
탁- 탁-
오창규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드리는 소리가 환풍구를 따라 울리며 되돌아왔다.
“제가 입구 앞에 바짝 서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뒤로 천천히 잘 나오세요. 형님 발이 보이면 제가 조심히 당길 테니까 놀라지 마시고요.”
탁- 탁-
또다시 환풍구 안에서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유혁진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스락거리며 울리는 소리는 점차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환풍구 입구 바로 앞에 서 있는 오창규와 태경을 비롯한 사람들의 얼굴 위로 긴장감이 짙어졌다.
그 긴장감이 어찌나 팽팽한지 눈을 깜빡이거나 숨소리조차 편하게 내는 사람이 없었다.
주변 공기조차 그들의 긴장감에 숨을 죽인 것만 같았다.
“……!”
그렇게 환풍구 안에서 들려오는 일정한 소리가 크게 울리고 드디어 유혁진의 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낮은 포복 자세를 유지하며 팔로 바닥을 밀면서 뒤로 나오고 있었다.
“형님.”
오창규가 태경과 교도관들을 쳐다본 유혁진에게 말하자 그의 두 발 위로 두꺼운 손이 올라왔다.
“접니다. 창규.”
말을 한 사람은 오창규였지만, 발을 잡은 손은 보안요원 장득칠이었다. 만일에 사태에 대비해 유혁진을 제압할 수 있는 장득칠이 나선 것이다.
“제가 천천히 잡아당길게요.”
“그래, 창규야.”
“당깁니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환풍구 안에 있던 유혁진의 몸이 순식간에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두 교도관이 그의 양쪽 팔을 붙잡고 장득칠은 뒤에서 어깨를 붙잡았으며 앞에는 태경과 오창규가 서 있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틈 하나 없이 유혁진은 완벽하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잠시만요.”
교도관들이 그의 양쪽 손에 수갑을 채우려 하자 태경이 말렸다. 칼에 베인 한쪽 손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컥-
결국 선배 교도관이 자기 손목에 수갑을 나눠 찼고 나머지 다친 손을 후배 교도관이 잡았다.
몸싸움이나 상당한 반항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는 모두가 놀랄 정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순식간에 일어난 예기치 못한 상황에 그는 어안이 벙벙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도주가 실패했음을 알 수 있었다.
환풍구 밖으로 나가면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유혁진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눈앞이 노래지는 심정이었다.
반드시 꼭 해내야 했고 해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 하나로 버텼다. 그런데 그 굳은 의지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도주? 그거 가능할 거 같지? 불가능해.’
유혁진의 머리 위로 교도소에서 30년을 넘게 있던 재소자 할아버지의 말이 스쳤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뻑 하면 재소자들이 탈옥하고 도주하는 내용 나오잖아. 드라마니까 가능한 거야. 왜 불가능한지 알아?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워도 결국 변수가 생기거든. 그 예상 못 한 변수 때문에 발목이 잡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거야.’
도주 장인이라고 불렸던 그에게 도주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했던 말이었다.
그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밖으로 나가려 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결국 다시 교도소로 되돌아왔고 재작년 교도소 샤워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유혁진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형님……!”
“…….”
당장이라도 건들면 울 것만 같은 표정의 오창규가 그를 불렀지만, 끝내 말이 없었다.
“죄송해요. 형님.”
태경과 장득칠은 속옷만 입고 있는 그의 몸을 얇은 담요로 가린 채 병실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