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드러나는 진실
‘안녕……하세요.’
낯을 가리는 몸짓과 유난히 수줍어하는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아이는 이 집안에 장남이자 모든 일의 원흉인 차태철이었다.
‘태철이도 과일 먹을래?’
고개를 가로저은 차태철은 엄마가 앉은 소파에 기대 조용히 남매를 쳐다봤다.
‘내가 이렇게 갑자기 초대한 건, 이번에 고3이 됐다고 들었어요.’
‘네, 맞아요.’
‘공부를 잘해서 S대 지원한다고 들었는데…….’
‘목표 대학이라 그냥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실은 나도 그 대학 출신이거든요.’
‘아, 그러세요?’
‘그래서 내가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서 이렇게 불렀어요.’
사모님은 유혁진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도록 잘나가는 과외 선생님을 붙여 주며 공부에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어머! 사모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괜찮습니다.’
생각지 못한 호의에 어머니는 물론 유혁진까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외 선생님이라니요. 이렇게 맛있는 밥 한 끼 대접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혁진 군이 공부 잘한다는 거 아주머니께 들어서 잘 알아요. 그런데 S대 지원하는 거면 옆에 잘 아는 사람이 붙어 있으면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능세대가 아닌 학력고사 세대인 유혁진은 먼저 지원한 후 시험을 보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시험 준비를 많이 했고 면접도 상당히 중요했기에 주변에서 과외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전문 과외 선생님은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부모님께 말하면 지원해 주시겠지만, 유혁진은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아 혼자서 준비할 생각이었다.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전 괜찮습니다.’
‘그래요. 사모님 이건 너무 과해요. 안 그러셔도 돼요.’
‘나 때문에 우리 아주머니가 많이 놀라셨나 보네.’
손사래를 치는 유혁진의 어머니를 보며 젊은 사모님은 싱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혁진 군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이유는 여기, 아주머니가 내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이에요.’
‘우리 어머니께서요?’
‘어머, 사모님. 생명의 은인은 무슨 제가 생명의 은인이에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아주머니 제 생명의 은인 맞아요. 혁진 군, 여기 우리 아들 보이죠?’
사모님은 여전히 부끄러운 얼굴로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차태철을 가리켰다.
‘……네.’
‘내가 우리 첫째 낳고 산후 우울증이 좀 있었어요. 그때 아주머니께서 시집간 여동생을 돌보는 것처럼 나를 돌봐 주셨고, 덕분에 몸도 마음도 잘 회복할 수 있었어요. 내가 힘들어할 때 우리 태철이도 잘 돌봐 주시고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번에 혁진 군이 고3이라는 소리를 듣고 내가 작은 도움을 좀 주고 싶어서 이렇게 초대했어요. 그러니까 거절하지 말고 내 마음 받아 줘요.’
살면서 처음 받아 보는 큰 호의에 어리둥절했지만, 그날 사모님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유혁진의 엄마는 자기보다 어린 나이의 사모님을 진심으로 대하며 잘 도와줬다.
산후조리도 도와줬고 산후 우울증으로 심신이 힘들 땐, 가족처럼 곁에서 힘을 주고 아이까지 돌봐 줬다.
극진한 보살핌에 감동한 사모님은 마음의 빚을 졌다며 평생 도울 일이 있다면 돕겠다고 했다.
결국 모자는 고마운 그 마음을 받았고, 유혁진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원래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하긴 했지만, 확실히 좋은 과외 선생님 덕분에 시험도 면접도 더 좋은 점수가 나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 사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부모님은 월급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한 것뿐이잖아요. 혹시 뭔가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닐까. 아직 어린 마음에 착한 우리 부모님을 이용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죠.”
“나 같아도 그랬을 거예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베푸는 호의를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맞습니다. 지금 제 모습만 봐도 그렇잖아요. 원장님께서 절 도와준다고 했지만, 처음에는 색안경을 낀 채 멋대로 판단하고 그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죠.”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모님도 원장님처럼 좋은 분이셨어요.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졸업했을 때도 좋은 선물을 주고 본인 일처럼 기뻐하고 저랑 동생도 참 예뻐했거든요.”
대학 졸업 후 유혁진은 어린 나이에 전문 자격증 시험에 합격해 괜찮은 회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경력을 쌓고 몇 년 뒤 회사를 옮겼다.
바로 부모님이 일하고 있는 회장님 회사로 이직한 것이다.
사모님은 유능한 유혁진을 알아보고 남편 회사에 입사를 권했다.
처음에는 분야가 달라 고민했었다. 하지만 해외 근무나 대기업의 시스템과 일을 배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지원했고 정정당당하게 합격했다.
유혁진은 빠르게 일에 적응했고, 회사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좋은 아이디어와 성과를 낸 그는 점차 인정받았고, 회장님 눈에도 띄었으며 승진도 빨랐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세월은 흘렀다.
“원장님, 혹시 그런 기분 느껴보신 적 있으신가요?”
“어떤 기분이요?”
“온 우주가 나를 향해 돌아가는 기분이요.”
“글쎄요. 전 아직 그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뭔가 엄청 기분 좋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런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아주 정확해요. 제가 딱 그랬거든요. 좋은 대학을 나와 자격증 시험도 한 번에 붙고 게다가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승진까지 하고 능력만큼 연봉도 많이 받으니까 매일매일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진짜 그랬다.
모든 게 다 좋았다. 회사 일도 즐거웠고 가족들도 건강하고 화목하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가끔 사모님과 회장님이 유혁진의 가족을 식사 자리에 초대했고, 자식들끼리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계기가 됐다.
사모님의 첫째 아들인 차태철이 입시를 준비할 때는 유혁진이 도움을 줬고, 다시 여동생이 입시를 준비할 때는 사모님이 도움을 줬다.
특히 차태철은 삼촌뻘인 유혁진을 잘 따랐다. 근엄하고 무서운 아버지와 달리 유혁진은 다정하고 유머러스하며 진짜 형 같았다.
유혁진도 여동생과 나이도 비슷하고 자신을 따르는 차태철을 동생처럼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차태철이 자신을 형같이 생각하고 잘 따른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유혁진은 해외로 나가게 됐다. 부모님은 좋아하셨지만, 여동생인 현진은 오빠가 외국으로 나가는 걸 반기지 않았다.
남매는 띠동갑이 넘게 나이 차이가 났지만, 사이가 좋았다.
오빠인 유혁진의 눈에는 어린 동생이 마냥 예뻤고 동생은 오빠가 멋있고 늘 자랑스러웠다.
‘오빠 안 가면 안 돼? 가지 마라.’
‘그럴까? 오빠 가지 말까?’
‘어. 그러지 말고 아빠랑 엄마가 회장님한테 가서 오빠 가지 말라고 하면 안 돼?’
‘회사에서 정한 일을 아빠 엄마가 어떻게 말해. 그리고 이거 오빠한테 좋은 일이야. 일 잘하는 사람만 외국 보내 주는 거야.’
‘아! 오빠 외국 가면 용돈 떨어졌을 때 누구한테 손 벌리고 학교에서 밤샘하면 누가 나 데리러 와.’
늘 친구 같고 든든한 울타리 같던 오빠가 멀리 해외로 나간다는 게 여동생은 싫었다.
‘오래 안 있어. 2년 금방 간다. 그리고 오빠 나가 있을 때 현진이 너도 미국 오면 좋잖아.’
‘곧 있으면 대학원 들어가서 할 거 태산인데 마음 편히 외국 나갈 시간도 없어. 오빠도 알잖아. 대학원생은 노예라고 노예.’
‘알지. 그래도 넌 잘할 거야. 오빠가 자주 연락할게. 그리고 이참에 아버지, 어머니 일 그만두시는 거 어때요?’
‘그만두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어느 정도 돈을 모은 유혁진은 부모님이 일을 그만두고 편하게 지내시길 바랐지만, 부모님은 반대했다.
일이 많이 힘들지도 않고 사모님과 그 집안에 정이 많이 들어 잘리지 않는 한 계속 일하겠다고 했다.
사모님이 성품도 좋고 부모님을 잘 챙겨 주는 걸 유혁진 역시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일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낸 뒤 그는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생활은 한국보다 더 바쁘게 돌아갔다. 낮에는 회사 일에 집중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에 집중했다.
유명 관광지나 여유롭게 주말을 즐길 틈은 없었다. 하지만 가족들과 자주 연락하며 외로움을 달랬기에 힘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금방 흘러 2년이 지났고 유혁진은 귀국했다.
‘아들 고생했다.’
‘이제 너도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도 해야지.’
‘예, 아버지. 그래야죠.’
그동안 일부러 여자를 만나지 않았던 유혁진은 귀국하고 삶이 안정되자 결혼 생각이 들었다.
이제 좋은 사람을 만나 부모님처럼 멋진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현진이는요?’
‘요즘 논문 준비에 그림에 정신이 없나 봐.’
‘늦게 들어오고 집에 들어오면 방에만 있고 힘든지 짜증도 부쩍 늘었어.’
‘그래요?’
귀국한 뒤, 모든 게 같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여동생 현진이의 변화였다.
안 그래도 귀국하기 얼마 전부터 전화도 메일도 보내지 않고 어쩌다 통화가 되면 피곤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아빠랑 엄마가 물어봐도 공부 때문에 그런다고 하면서 다른 말은 하지 않는데, 시간 날 때 혁진이 네가 좀 물어봐.’
‘네. 제가 물어볼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동생은 어릴 때부터 고민이 있으면 전부 털어놓았다. 친구 문제, 학업 문제 등 오빠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때마다 유혁진도 함께 고민을 해결하려 애썼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힘든 대학원이라든지 아니면 그 나이 때 고민하는 친구나 이성 친구 또는 취업에 관한 그런 평범하고 보통의 고민이 아닐까 싶었다.
며칠 뒤, 유혁진은 동생이 집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 대화를 나눴다.
‘현진아, 맥주 한잔할래?’
‘미안. 나 요즘에 많이 바빠서……. 오빠 맥주는 나중에 하자.’
‘알았어. 요즘 뭐 고민거리는 없고?’
‘없어. 공부 때문에 그냥 좀 힘들어서 그래.’
‘돈 있어? 오빠가 용돈 좀 줄까?’
‘아니야. 나도 돈 있어.’
‘현진아? 너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일은 무슨 일. 아무 일 없어.’
늘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집안의 비타민 같던 동생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 뭔지 모르게 지쳐 보였고 살도 좀 빠져 보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괜찮다고 했다.
분명 아무 일이 없다고 했다. 그저 대학원 일이 힘들다고 늘 있는 일이라 그런 거라고 했다.
강조하는 동생의 말에 정말 아무 일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며칠 뒤, 동생이 가족들을 데리고 동네 고깃집을 찾았다.
‘오늘은 내가 아빠랑 엄마, 오빠한테 쏘는 저녁이니까 많이들 드세요.’
‘네가 돈이 어디 있어. 오빠가 쏠 테니까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이거 왜 이러셔! 나도 과외하면서 돈 좀 모았거든요. 나도 한 번은 가족들한테 맛있는 거 사 드리고 싶었어.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쏜다!’
‘우리 현진이 때문에 아빠 엄마가 호강하네.’
‘그럼 오빠도 비싼 걸로 시킨다.’
‘당연하지. 무조건 한우만 시켜.’
그날 모처럼 가족들과 외식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계속 걱정하던 부모님과 유혁진은 평소대로 돌아온 동생을 보며 안심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생이 가족들에게 그랬다.
‘아빠, 엄마, 오빠? 나는 우리 가족이 너무 좋다. 울 아빠 엄마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우리 오빠도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해.’
‘뭐야. 유현진 너, 콜라 마시고 취했냐? 갑자기 뭔 소리야.’
‘그러게 콜라 마시고 취했나 보네. 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때도 우리 아빠 딸, 우리 엄마 딸, 우리 오빠 동생 할 거야.’
‘얼래! 이 녀석 진짜 취했는데?’
‘아무튼 아빠, 엄마 그리고 오빠 오래오해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그래. 우리 딸이랑 아들도 아프지 말고 우리 가족 지금처럼 행복하자.’
가족들과 맛있는 걸 먹고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이 참 행복했다.
동생의 말대로 아픈 사람 없이 지금처럼 가족들이 행복하길 바랐고, 이 행복이 영원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그 행복은 얼마 뒤 깨지고 말았다.
‘아버지 전화하셨어요?’
-혁진아! 이를 어쩌니. 이를 어째…….
평소처럼 회사에 일하고 있는 와중에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혁진아, 어떡하니…….
아버지는 전화기 너머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일이세요?’
놀란 유혁진은 아버지를 달래며 물었다.
‘천천히 말씀하셔도 돼요. 무슨 일 있으세요?’
-혀, 혀……현진이가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