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76화 (375/472)

376화. 판도라의 상자

문을 닫으려는 사람과 문을 열려는 사람 간의 기 싸움이 한창이던 그때였다.

‘……!’

순간 오창규 뒤로 보이던 벽을 우연히 보던 유혁진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문 열어.’

‘난 할 말 없다니까요.’

유혁진의 싸늘해진 목소리에 오창규가 당황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어떻게든 문을 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너, 좋은 말로 할 때 문 열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전 몰라요!’

도대체 무엇을 봤길래 유혁진은 눈이 돌아가 있었다.

‘당장 열지 못해!’

그렇게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실랑이가 이어지던 그때 유혁진이 오창규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으악!’

고통을 못 이긴 오창규가 다리를 붙잡고 주저앉았고, 그사이 때를 놓치지 않은 유혁진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들어온 그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맞은편 벽을 향해 걸어갔다.

곧이어 몇 발짝을 걸어가 벽 앞에 멈춘 유혁진의 시선이 벽을 향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작은 오피스텔 방 안에는 동생 현진이를 중심으로 여러 글이 두서없이 쓰여있었다.

-현진이와 고숭은 그리고 차태철.

-차태철과 고숭은은 잘산다.

-현진이의 부모님은 차태철의 집안일을 돕고 있고, 오빠는 차태철 아버지의 회사에 다니고 있다.

-현진이와 친구는 차태철과 고숭은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날은 친구가 몸이 아파 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현진이가 혼자 사무실로 향했다.

-잘 웃고 밝던 현진이는 그다음 날부터 아니, 그날부터 이상해졌다?

-어딘가 쫓기는 사람 같았으며 겁에 질려 있는 모습 같기도 했고, 급격하게 말이 없어졌다.

-차태철이 좀 이상하다. 현진이를 쳐다보는 눈빛이 예전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차태철이 현진이를 좋아했던 걸까?

-우리 집에서 잔 날 현진이는 밤새 악몽에 시달렸고 아파했다.

-그 뒤 차태철이 현진이를 찾아오는 날이 많았었다. 무슨 일이지? 두 사람, 아니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걸까?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글은 누가 봐도 현진이에 대한 집착하는 글로 보였다.

이쪽저쪽 빠르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여러 글을 읽던 사이 짧은 문장이 유혁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현진이는 자살이 아니다. 자살할 사람도 아니다. 자살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놈들……?

‘야! 이 새끼야!’

글을 보고 있던 유혁진이 구석에 있던 오창규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너 뭐 하는 새끼야? 내 동생 쫓아다녔어! 스토커야?’

‘아,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잔뜩 분노한 유혁진을 보며 오창규가 억울함과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전 아니에요!’

‘그럼 이건 다 뭐야?’

‘그, 그건…….’

‘뭐냐고?!’

‘……!’

‘말 안 해? 안 되겠다. 너 나랑 당장 경찰서로 가자.’

‘그러지 마세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은 유혁진이 막무가내로 오창규를 끌고 가려 하자 오창규가 태도를 바꿨다.

‘마, 말할게요.’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너 죽여 버릴 거야. 알았어?’

‘……네. 똑바로 말할게요.’

‘지금부터 벽에 쓴 게 뭔지 다 설명해.’

‘제가 현진이를 오랫동안 좋아했습니다. 고백하려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현진이는 인기가 많았거든요. 나 같은 놈이 고백해도 되나 싶었어요. 저 말고도 현진이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꽤 있었는데 그 사람들 전부 차태철 때문에 고백할 엄두는 내지 못했어요.’

‘차태철? 걔가 왜?’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어린 나이에 돈도 많잖아요. 그런 남자가 현진이 주변에 있으니까 안 되겠다 싶었던 거죠. 현진이랑 친구가 일을 도와줘서인지 차태철은 가끔 두 사람 밥을 사 주고 커피도 사 주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런데 어느 날 현진이가 혼자 있었어요. 항상 같이 다니던 친구가 안 보여서 물어봤더니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못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은 들은 오창규는 순간 용기가 치솟았다고 했다.

지금이라면 고백할 수 있을 거 같고, 차여도 후회가 없을 거 같다고 했다.

‘당연히 거절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제 마음을 한 번쯤 전해 보자 싶었어요. 그런데 현진이가 오늘 일하러 가야 한다고 하더니 차태철이 현진이를 데리러 왔어요. 그리고 그날 새벽 현진이한테 전화가 왔어요.’

이야기를 듣던 유혁진은 그 시기가 언제인지 알 거 같았다.

동생은 가끔 공부와 그림 때문에 학교에서 밤샘 작업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힘들게 작업하고 와도 집에 오면 힘들다는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씩씩했다. 그런데 해외 지사에서 귀국하기 직전, 그때부터 동생이 좀 이상하다고 부모님이 전화로 했던 말이 생각났다.

방금 오창규가 말한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전화를 받고 현진이가 있는 커피숍으로 갔는데 좀 많이 이상했어요.’

‘이상하다니 뭐가?’

‘잔뜩 울어서 눈은 충혈된 채 부어 있었고, 항상 단정하던 모습과 달리 어딘가 흐트러진 모습이었어요.’

그날 유현진은 멍든 자국이나 맞은 자국은 없었지만, 뭔가 맞은 사람 같은 느낌도 들었다.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아픈 친구나 가족한테 연락할 수 없어서 연락했다고 말하던 유현진은 별안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오창규는 당황하고 놀랐지만, 무엇보다 현진이가 우선이었기에 그녀를 들쳐 없고, 인근 응급실로 향했다.

‘정신없이 병원으로 가는데 택시 안에서 현진이가 잠깐 정신을 차렸어요. 조금만 가면 병원이라고 하니까 절대 병원은 안 된다고 싫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네 집으로 데려온 거야?’

‘네. 그런데 걱정 하실 일이나 이상한 일은 전혀 없었어요. 현진이를 이불 위에 눕히고 전 책상 의자에 앉아 지키고 있었어요.’

유혁진은 본능적으로 오창규가 지금 하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현진이가 잠들고 얼마 안 있어서 악몽을 꾸는지 잠꼬대를 심하게 하길래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깨웠어요. 그런데 잠에서 깨더니 반응이 좀 이상했어요.’

울면서 살려 달라는 잠꼬대에서 깨어난 유현진은 오창규를 보며 겁에 질려 그대로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에 오창규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차분하게 괜찮다고 말하며 달랬다.

그 뒤, 정신을 차린 유현진은 오창규를 알아보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하염없이 울었다.

그때,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처절하고 구슬프던지 오창규는 아직도 그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거 같다고 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샤워한 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집을 나갔어요. 뭔가 일이 있는 거 같은데 물어보는 거, 조차 실례일까 봐 일부러 물어보지도 않았고 학교에서도 마주치지 않게 피해 다녔어요.’

오창규는 순수한 마음으로 유현진을 좋아했고, 그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현진이한테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너도 모르니?’

‘그때까지는 몰랐어요.’

며칠 뒤, 유현진은 연락도 없이 오창규의 집을 찾아왔다.

‘갑자기 찾아와서 그날 고마웠다고 말하더라고요.’

오창규는 유현진에게 괜찮으냐고 물었고 괜찮다는 말과 함께 정말로 괜찮아 보여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괜찮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현진이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사고가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리에 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부터 학교도 가지 않고 의심 가는 걸 벽에 적기 시작한 게 저렇게 된 거예요.’

‘현진이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왜 장례식장에는 안 온 건지 물어봐도 되겠니?’

유혁진의 물음에 오창규는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

‘미안……해서요. 현진이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그때 내가 좀 더 물어봤더라면, 손을 내밀었다면 현진이가 그런 선택을 안 하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 때문에 차마 마지막 가는 길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랬구나. 저기 벽에 있는 글을 보면 네가 차태철과 그 친구를 의심하고 있는 거 같은데 맞아?’

‘의심이 아니에요.’

‘뭐!?’

‘의심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의심이 아니었어요.’

‘……!’

무슨 소리인지 의아해하는 유혁진에게 오창규는 책상 서랍에서 다이어리와 작은 녹음기를 꺼내며 분명하게 말했다.

‘이거 현진이 거예요.’

유현진이 도와줘서 고맙다며 두 번째 오창규를 찾아왔던 날, 그날 집에 두고 간 그녀의 물건이었다.

‘제가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그때 현진이가 이걸 책상 서랍에 넣었던 거 같아요. 어제 충전기가 망가져서 다른 충전기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어요.’

‘너도 이걸 봤니?’

오창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진이가 여기 뭐라고 적어 놨어?’

‘그건……. 형님께서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이 다이어리 안에 안 좋은 이야기가 적혀 있다는 걸 유혁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눈을 뜨나 감으나 갑자기 떠나간 동생의 이유가 궁금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이유가 이 안에 있다고 하자 쉽게 다이어리를 펼쳐 볼 수 없었다.

‘하!’

한참을 고민하던 유혁진은 결국 동생이 남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분명 동생이 이걸 남긴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어떤 이야기가 있어도 전부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다이어리를 읽어 내려가던 유혁진의 동공이 커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졌으며 종이를 넘기는 손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

마주한 진실은 지옥이자 고통 그 자체였다.

유혁진의 하나뿐인 동생 유현진은 차태철과 그의 친구 고숭은에게 몹쓸 짓을 당한 것이다.

그날 친구가 아파서 혼자서 일을 하던 날, 차태철의 사무실에서 사건이 터졌다.

부모님도 동생도 유혁진도 몰랐던 사실이 있었는데, 그건 회장님의 아들인 차태철이 정상이 아니라는 거였다. 육체의 문제가 아닌 정신의 문제였다.

기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삶이 정해진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억압과 고된 가르침 속에 자랐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매를 맞았고 욕설과 함께 훈계를 들어야 했다. 어머니가 몇 번이나 말렸지만, 불같은 아버지를 말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버지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시늉을 할 만큼 두려워하는 그는 점점 삐뚤어진 성격을 갖게 됐다.

아버지를 닮아 철저하게 돈으로 신분을 나눴고 가난한 사람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걸 속으로 숨기며 겉으로 젠틀한 척 멀쩡한 사람처럼 가면을 쓰고 살았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사람이고 물건이고 반드시 가져야 했고, 안 되면 돈으로 해결해 원하는 걸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사실 차태철은 어린 시절부터 유현진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점점 커 갈수록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그녀를 갖고 싶었고 소유하고 싶었다.

이성을 좋아할 때 갖는 그런 정상적인 마음이 점점 탁해져 예쁜 꽃을 꺾어 갖고 싶은 잘못된 마음으로 변질됐다.

하지만, 그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가정부의 딸이었고, 아버지 회사에 유혁진이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유현진을 곁에 두고 보고 싶었던 그는 일을 핑계로 접근해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봤다.

어느 날, 유현진이 친구 없이 학교에 온 걸 알게 된 차태철은 일 얘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사무실로 향했다.

그날 역시 원래 일과 관련된 일정이 있던 날이었기에 유현진도 그와 동행했다.

무엇보다 차태철의 진짜 실체를 몰랐고 그런 모습도 본 적이 없기에 일말의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게 사무실에 단둘이 남게 된 차태철은 눌러 놨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잘못된 욕정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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