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때를 기다렸어요
“전 부모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유혁진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태경은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그에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도 몰랐다.
위로라는 말조차 상처가 될 것만 같았다.
하나뿐인 동생을 잃은 것도 모자라 부모님까지 잃고 어떤 심정으로 지금까지 버텼는지, 감히 그 마음이 어땠을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왜 그토록 유혁진이 죽고 싶다고 말했는지 이제야 그 심정이 이해됐다.
오랜 시간 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오롯이 차태철의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계획이 무너졌으니 살아갈 이유도 함께 무너졌을 거로 생각한다.
“결정적 증거가 있잖아요?”
유혁진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태경은 녹음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동생분이 차태철과 나눈 대화가 담긴 녹음기를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저도 처음에 그 생각을 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증거라고 줬던 다이어리를 받은 경찰은 돈에 매수돼서 처음부터 받은 적이 없다며 오히려 절 정신 나간 사람 취급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회장이란 인간이 손을 썼기 때문에 유혁진은 일부러 녹음기에 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머니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간 날 녹음기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게, 생각해 보면 동생이 도와준 게 아닌 게 싶어요.”
만약 그때 녹음기에 관한 말을 어디서든 꺼냈다면 차태철과 회장이 눈에 불을 켜고 미친 듯이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 당시, 차태철을 죽이지 못하고 경찰에 붙잡힌 순간 전 삶에 대한 의지도 잃었습니다. 그래서 국선변호사도 거절하고 재판장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경찰과 형사, 변호사와 검사는 정의라는 이름 안에 억울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이들이다. 하지만 돈에 눈이 멀어 정의를 팔아 버린 인간들에게 덴 유혁진은 더 이상 그들을 신뢰할 수 없었다.
모든 경찰과 형사, 변호사가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이미 여러 번 좌절을 맛본 그는 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제가 겪어 보니까 이런 일이 영화 속에서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은 억울해도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아마 지금도 저 같은 사람이 분명 어딘가에서 숨죽여 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모님께는 죄송했지만, 어차피 더 이상 살아갈 이유도 없었기에 교도소로 들어가서 세상과 등지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는 저도 부모님도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지쳐 있었고 그냥 세상이 다 밉고 싫었습니다. 이깟 인생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는데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돌아가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임종은 둘째치고 부모님 유골이 있는 납골당에도 한 번도 못 가 봤습니다.”
“그럼 이번 도주는 처음부터 계획한 게 아니었나요?”
태경은 유혁진이 오랫동안 도주와 복수를 다짐한 줄 알았다.
어쨌든 환풍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붙잡히긴 했지만, 오창규도 그렇고 꽤 치밀하게 준비한 것만 봐도 단기간에 계획한 건 아닌 거 같았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2년 좀 넘은 거 같네요.”
“그 정도면 오래 계획한 거 아닌가요?”
“그런가요? 전 이번 일을 준비하는 동안 시간이 정말 빨리 가서 그런지 오래됐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러면 왜 다시 복수를 생각한 거고 오 선생은 어떻게 같이하게 된 거죠?”
“안 그래도 원장님께서 궁금해 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복수를 생각한 건 아닙니다. 현실에 부딪혀 자포자기했지만, 언제가 차태철에게 복수해서 그놈이 무너지는 걸 내 두 눈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는 사람이 면회를 왔는데 전혀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저한테는 면회하러 올 사람이 없었거든요. 부모님 잘 돌보지 못했다고 친척들도 연 끊은 지 오래였고, 그나마 오지 말라고 해도 오는 사람이 창규여서 그날도 창규가 온 줄 알았어요.”
연배가 비슷한 남자는 누구냐고 묻는 유혁진에게 차태철 운전기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 소리를 들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럭 화부터 냈다.
“순간 차태철이 보낸 건가 싶어 화가 나더라고요.”
“전혀 본 적도 없는 운전기사가 왜 찾아온 거죠?”
“그 기사는 날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그 일이 있고 난 후 차태철의 기사로 들어온 사람이라고 했다.
회장 댁에 드나들면서 일하는 사람들 얼굴을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라 유혁진은 기사를 몰랐다.
어렵게 수소문해서 유혁진을 만나러 왔다고 전한 기사는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그 기사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오랫동안 일한 사람한테 들었는데 차태철이 한 짓이 정말 진짜냐고, 동생한테 일어난 일이 사실이냐고 물었어요.”
갑자기 찾아와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유혁진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목숨을 걸고 사실이라고 전했다.
그러자 그 기사는 본인 핸드폰 속에 저장된 몇 장의 사진을 보여 주며 말했다.
‘보이시죠? 이 사진에 있는 사람이 접니다. 차태철한테 맞아서 생긴 상처들이에요.’
기사는 차태철에게 잦은 폭언과 폭행을 당했고 계속되는 갑질을 견디지 못해 얼마 전,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그 말은 들은 유혁진은 차태철의 본모습을 알고 있기에 놀라지도 않았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기사는 그동안 알게 된 정보를 하나씩 공유했다.
차태철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살고 있고, 삶의 의지가 크게 없는 사람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자해 소동도 몇 번 있었고 정신 병동에 입원한 적도 있었는데, 주변에는 외국에 나갔다고 말하면서 그 사실을 숨겼다.
또한 외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재 차 회장과 아들 차태철이 이끄는 회사 사정이 약간 좋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차 부자는 그 돌파구로 결혼을 생각했고, 예랑물산 딸과 결혼시켜 회사의 안정화를 노리고 있다고 했다.
있는 사람들끼리 정략결혼을 시켜 서로 이익을 추구하려는 전형적인 재벌식 결혼이었다.
차태철은 아버지를 상당히 두려워하기에 상대 집안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고 했다.
“기사 말을 여기까지 듣고 있었는데 제가 이상한 건지 이 사람이 왜 날 찾아왔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어요.”
“이런 말이 좀 그럴지 모르겠지만, 유혁진 씨도 차태철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한 거라서 일종의 동질감으로 하소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저도 원장님이랑 똑같이 생각하고 기사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고작 하소연하려고 교도소에 있는 사람을 찾아왔냐고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당신의 푸념을 듣고 싶지 않다고 그만 가라고 말하는 유혁진을 향해 기사는 믿기 힘든 말을 전했다.
‘내가 지금부터 차태철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를 알려 줄게요. 그런 말 있죠? 사람은 안 바뀐다고. 그런데 그 개 같은 놈이 바뀌더라고요.’
사람 무시하고 갑질에 폭행과 폭언을 일삼으며 살던 차태철이 예랑물산 막내딸을 만나면서 변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전략적이고 계획적인 만남으로 시작했지만, 상대 여자가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었다.
여자는 생각보다 순수했고 밝고, 아름다웠으며 정해진 결혼 상대가 아닌 인간 차태철을 보며 다가왔다.
그런 여자가 보인 모습에 감동한 차태철을 그녀에게 빠져들며 좋아하는 감정을 품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변했다는 모습은 그 여자에게만 보이는 행동이었다.
자신의 지난날을 반성하고 후회하며 속죄하는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차태철이 어느 날 술에 취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살면서 진짜 좋아하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랑 잘 안 됐대요. 가끔 그 여자가 꿈에 나오는데 본인이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예랑물산 딸을 본 순간 그 여자가 생각나면서 죽어 있던 마음이 다시 뛰기 시작했답니다. 개소리 같은데 제가 옆에서 본 결과 그 여자한테 진심이었어요.’
그러면서 차태철은 이제 자기 인생의 목표는 저 여자와의 결혼이라는 말까지 했다고 했다.
‘차태철은 어차피 죽는다는 거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죽기 바라는 놈한테 원하는 대로 죽여 주는 건 복수가 아니잖아요.’
기사의 말은 한마디로 차태철에게 가장 소중한 걸 뺏어 그를 무너뜨리라는 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가장 소중한 게 망가지면 상처받는다.
특히 어릴 때부터 사람이든 물건이든 본인이 원하는 건 반드시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차태철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기사의 말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직접 그놈에게 복수하고 싶었지만, 기사는 차태철이 무섭다고 했다.
‘그동안 폭언과 폭행으로 트라우마가 생겨 그놈을 똑바로 보는 것도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지만, 유혁진 씨와 달리 전 잃을 게 많습니다.’
어린아이가 있는 기사는 자기가 차태철에게 대항했다가 아내와 아이가 피해를 보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는 말도 했다.
가족을 잃은 유혁진은 그의 말이 충분히 이해됐고, 그가 알려 준 차태철의 정보도 도움이 됐다.
분명 흥미가 돋는 말이었고 차태철에 대한 분노도 여전했다. 하지만 재소자의 신분으로 지금 당장 그놈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사실 병상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유혁진의 심신은 전보다 더 지쳐 있던 상태였다.
‘이것 좀 보세요.’
그런데 무심코 내민 기사의 핸드폰 속 사진이 유혁진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차태철이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전 지금까지 처음 봤습니다. 이 여자 옆에만 있으면 딴 마치 사람이 된다니까요.’
기사가 몰래 찍었다는 사진은 차태철이 여자와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면 유혁진의 표정이 구겨진 종이처럼 변해 갔다.
‘……!’
사진 속 여자가 죽은 여동생과 비슷하게 생긴 것이다.
유혁진은 그 순간, 조금 전 기사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과 잘 안 됐다는 말과 예랑물산 딸을 보면서 그 감정이 다시 떠올랐다는 말.
차태철이 했던 말이 동생을 두고 한 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동생과 비슷한 여자를 보고 좋아하는 감정이 다시 생겼다는 게 소름 그 자체였다. 게다가 그런 끔찍한 짓을 해 놓고 아직도 동생을 잊지 못한다는 소리에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태경 역시 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그 새끼가 동생을 생각한다는 거 자체가 더럽고 불편했어요.”
죽어서도 편하지 못한 동생이 불쌍했고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도주를 계획한 것이다.
가끔 안부를 전하러 찾아오던 오창규에게 이 사실을 전부 알리자 도와주겠다고 했다.
유혁진은 인생 말아먹은 건 본인 하나로 족하다면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오창규는 계속 뜻을 굽히지 않았고 밖에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기에 더는 말리지 않았다.
아픈 사람처럼 꾸며 병원을 통해 나갈 거라는 말에 오창규는 병원 직원이 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직접 관련 자격증도 취득하는 정성을 보였다.
“더 일찍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지금이었나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태경이 물었다. 충분히 시간이 있었을 텐데 왜 지금에서야 교도소에서 나왔는지 궁금했다.
“때를 기다렸어요. 기사에게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놈이 상대 여자를 만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때를 보고 더 깊게 빠져들고 더 진심으로 상대 여자와 가까워지길 기다린 거죠.”
오창규는 밖에서 차태철의 관한 정보를 계속 수집했고, 병원에 오기 두 달 전 차태철 집안에서 공식적으로 결혼 발표를 할 거라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부터 오창규는 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때마침 직원 채용 공고를 낸 병원 몇 곳을 둘러봤다.
그중 건물이 오래되고 연손 교도소와 가장 가까운 우리병원으로 결정한 것이다.
교도소 의무실 의사였던 이지국이 상처를 치료하러 우리병원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거리가 가까워서였다.
또한 재소자들 싸움 역시 유혁진에게 신세를 진 재소자들이 그의 부탁으로 벌인 일이었다.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이지국이 우리병원으로 올 수 있도록 판을 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혁진은 교도소 안에서 매일 신문을 구해 차태철의 소식을 체크하며 확인했다.
그가 교도소에를 나오기 전날, 신문을 보며 울었던 건 같은 방 재소자들에게 관심과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일종의 쇼였다.
그렇게 철저한 계획아래 병원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게 제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모든 진실을 고백한 유혁진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어렵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원장님,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여전히 절 도와주겠다는 생각에는…….”
태경을 향한 그의 눈빛에 자신이 없었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