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79화 (378/472)

379화. 보통 의사의 세 가지 조건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신가요?”

“내가 어떻게 도와줬으면 좋겠는지 먼저 들어 볼게요.”

“저 대신…….”

유혁진은 자세를 고쳐 앉은 뒤 태경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여자에게 차태철의 추악한 모습을 알려 주세요. 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게 다인가요?”

“네, 그거면 됩니다. 제가 아프지도 않은 허리를 아프다고 거짓말하면서 수술대 오른 것도, 기를 쓰고 도주하려고 했던 것도 차태철이 보는 앞에서 그 여자에게 사실을 알려 주려고 한 일이었습니다.”

유혁진은 처음 계획을 세울 때부터 차태철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물론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이고 또 죽이고 있지만, 적어도 현실에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진짜 소중한 걸 잃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절망감. 자신과 가족들이 느꼈던 그 처절한 절망감을 안겨 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본인 스스로 그동안 감추고 있던 추악하고 더러운 모습이 밝혀졌을 때, 차태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 모습을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원장님 감사합니다.”

유혁진은 뜬금없이 태경을 향해 고맙다고 전했다. 그의 표정을 보니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표정이었다.

“인사받기는 좀 이른 거 아닌가요? 난 아직 도와주겠다고 명확하게 답을 하지 않았는데.”

“그 부분을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그러면……?”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그래서 감사해요.”

지독하고 어쩌면 눈살을 찌푸릴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를 태경은 묵묵히 전부 들어 줬다.

중간중간 격한 감정에 울컥할 때마다 휴지를 주기도 하고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도 아끼지 않았다.

유혁진은 그런 태경의 모습이 고마웠다.

“창규한테도 이렇게 자세히 말하지 않았는데 제 속내까지 전부 말한 건 원장님이 처음이에요. 사실 어느 정도만 이야기하고 말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하다 보니 원장께 전부 말하게 됐네요.”

“전 그냥 들어 준 거밖에 한 게 없는데요.”

“예전에 여동생이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있으면 그날 저녁 제 방에 와서 조잘조잘 떠들었는데, 한참 다 떠들고 나서는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오빠한테 말하고 나니까 속이 좀 풀린다고. 그때 여동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야 좀 이해가 되네요.”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유혁진은 천근 같은 돌덩이가 들어 있는 속이 조금은 편해진 기분이었다.

“원장님께 털어놓길 잘한 거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인데요. 그런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말씀하세요.”

“유혁진 씨, 출소일이 얼마나 남았죠?”

“제 출소일이요? 모범수로 뽑힌다면 좀 빨라지겠지만, 아직 꽤 남았습니다.”

“혹시 출소하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꼭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 본 적은 없지만…….”

유혁진은 뭔가 생각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민망한 표정으로 답했다.

“빵을 굽고 싶습니다.”

“빵이요?”

“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좋아하는 음식이 있고 싫어하는 음식이 있듯이 사람 입맛은 다르다고 하잖아요. 아버지는 된장찌개를 좋아하셨는데 어머니는 김치찌개를 좋아하셨어요. 동생은 찌개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고, 전 종류 상관없이 찌개만 있으면 밥을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이 유일하게 모두 좋아한 음식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빵이었어요.”

제각각 다른 입맛의 가족들은 빵이라면 다 좋았는데, 그중에서도 밤빵과 소보로빵, 오이와 양배추 소시지가 들어간 옛날 야채빵을 참 좋아했다.

유혁진은 가족들을 생각하며 교도소에서 빵 만드는 제과 기술도 배웠다.

“출소해서 사람들 속에 섞여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그땐 제과 자격증을 따서 작은 빵집을 열고 싶습니다. 부모님과 여동생을 생각하면서 빵 만들면서, 그렇게 소박하게 살고 싶어요.”

“빵집 좋네요. 아까 나한테 여전히 도와준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지 물었죠?”

“네? ……네.”

“변함없습니다. 내가 도와줄게요.”

태경은 여전히 그를 돕고 싶었다.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이 상처받고 황폐하게 살아가는 그가 안쓰럽고 딱했다.

“저, 정말이세요? 그 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신가요?”

사실 유혁진은 태경이 도와준다는 말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아는 사이도 아닐뿐더러 굳이 도와줄 이유도 없었기에 상처 치료를 위한 그냥 하는 말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진짜 도와준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절 도와줄 생각이세요?”

“네. 도와줄 겁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생각지 못한 조건이란 말에 유혁진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네, 조건이요. 내 조건은 세 가지예요.”

“세 가지나 된다고요? 너무 어려우면 제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첫째, 교도소 안에서 바른 생활로 반드시 모범수로 나올 것. 둘째, 제과 자격증을 취득해서 빵집을 차릴 것.”

“모범수야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확답은 못 드리지만,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자격증은 저도 관심이 있어서 취득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유혁진은 생각보다 쉬운 조건에 긴장했던 표정이 풀어졌다.

“그런데 돈이 있다고 해도 과연 저 같은 사람에게 빵집 자리를 내줄 사람이 있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죠?”

“원장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출소한 사람은 교도소에 있었다는 그 낙인 때문에 새 출발이 쉽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 중에 바깥세상에 적응 못 하고 또다시 범죄에 노출돼 다시 돌아오는 이들도 꽤 있습니다.”

“정 찾다가 안 되면 그땐 날 찾아와요.”

“예?”

“빵집 자리 못 구하면 그땐 우리 병원 주차장 한쪽이라도 내어줄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그게 그렇게 쉽나요? 말이라도 감사합니다.”

고민 없이 말하는 태경의 말에 유혁진은 고맙기는 했지만 믿지 않았다.

“그냥 말이 아니라 진짜예요. 앞으로 살아갈 고민하는 재소자 앞에서 누가 이런 농담을 하겠어요? 어떻게 이 정도면 크게 어려운 조건은 아니죠?”

“……네. 뭐, 원장님 말씀대로 어렵지 않네요. 세 번째는 어떤 건가요?”

“사실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한데, 교도소를 나오는 순간 차태철은 잊어버리고 그 누구도 아닌 본인의 삶을 살아갈 것. 이게 마지막입니다.”

“……!”

전혀 예상 못 한 마지막 조건에 유혁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난 유혁진 씨가 더 이상 자신을 내팽개치고 방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무도 유혁진 씨처럼 그렇게 못 해요. 내 가족을 아프게 했다고 그 대상을 찾아가 상대를 죽이고 다치게 하고 그렇게 직접적인 복수를 하는 사람 현실에 많지 않아요.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거. 그건 옳은 일이 아니에요.”

“그럼!”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태경의 말을 경청하던 유혁진이 별안간 눈에 힘을 주며 소리를 높였다.

“그럼 내 동생을 그렇게 만든 그놈들이 잘했다는 건가요? 정말 그래요? 네?”

드르륵-

“무슨 일입니까?”

“원장님 괜찮으세요?”

높아진 소리에 병실 바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교도관들이 놀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괜찮아요. 별일 아닙니다.”

전혀 동요 없이 괜찮다는 태경의 만류에 교도관들은 작은 목소리로 유혁진을 크게 자극하지 말라고 전하며 병실 문을 닫았다.

“아니요. 그놈들은 죽어 마땅한 놈들이고 살아갈 가치도 없는 쓰레기들이에요. 솔직히 모든 사연을 듣고 유혁진 씨가 복역한 이유를 들었을 때 속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런데 고숭은을 죽이고 차태철을 육 개월 넘게 병원에 있게 만들고 나서 마음은 편했나요?”

“…….”

“바로 대답하지 못한 건 편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그러면 그때 차태철을 죽였다면 그랬다면 편했을까요?”

“…….”

아니다.

유혁진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쓰레기들과 썩어빠진 부조리에 외면당한 동생의 복수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당시 죽이지 못했지만, 병원에 있는 반년 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차태철을 두고 오창규가 그런 말을 했었다.

‘형님. 그만하면 차태철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오창규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했는지 이해는 한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놈들을 원하는 만큼 혼내주면 답답한 마음도 좀 편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직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마음의 짐을 덜고자 마지막으로 차태철의 민낯을 까발리려고 기를 쓰고 도주하려고 했었다.

그러고 나면 공허하게 뚫린 마음이 좀 메꿔지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유혁진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그의 마음이 편치 않은 건 사랑하는 가족들이 곁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모든 일에 원인이었던 차태철이란 고리를 끊지 못하고 더 집착하고,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걸 알면서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감히 유혁진 씨의 상처받은 마음을 다 안다고는 하지 못해요.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가족들은 당신이 차태철에게 매달리며 살고 있는 모습을 바라지 않을 겁니다.”

“…….”

“오히려 더 보란 듯이 행복하고 더 보란 듯이 잘사는 모습을 바라고 있을 거예요. 당사자가 아니라고 함부로 하는 말도 아니고 그게 어렵다는 거 나도 알아요. 그래도 난 유혁진 씨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차태철을 마음에서 죽이고 자기 삶을 살아요.”

“그거 아십니까?”

잠시 정적이 지나고 조금 전까지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심각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실소를 터트리며 구긴 인상을 풀며 말했다.

“뭐가요?”

“원장님 정말 이상한 의사입니다. 살다 살다 원장님 같은 의사 처음 봅니다.”

“뭐, 그런 소리는 종종 듣고 있습니다.”

“아니, 뭔 놈의 의사가 사람 몸이나 고치지 왜 마음까지 고치려고 속을 들쑤시고 그럽니까?”

“몸이고 마음이고 다치고 아프면 고치는 게 의사지. 꼭 몸의 상처만 고쳐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그런 법은 없지만, 보통 의사들은 다들 그렇게 삽니다. 원장님처럼 환자들 이야기 잘 들어 주는 그런 의사도 많이 없어요.”

“나도 보통 의사예요. 그런데 남들이 그런다고 나도 그래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내가 원래 오지랖이 좀 넓어요. 왜요? 불만이에요?”

“네, 불만입니다.”

“불만을 갖는 건 유혁진 씨 마음이니까 내가 뭐라고 할 건 아니고. 그래서 내가 제시한 조건 지킬 수 있겠어요?”

“…….”

태경의 물음에 유혁진은 답을 할 듯 말 듯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요. 지금 시간도 새벽이고 오늘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피곤할 텐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면 내일 다시…….”

“아니요. 지킬……게요. 지키겠습니다.”

“정말이죠? 그럼 잠시만요…….”

태경은 가운 주머니에 갖고 다니는 메모지 한 장을 찢더니 조금 전, 제시한 조건을 급히 써 내려간 종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자! 여기 밑에 이름하고 싸인 적어요.”

“……!”

“그렇게 쳐다볼 거 없어요. 나중에 딴말할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확실하게 증거를 남겨야죠.”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당연하죠.”

“알겠습니다. 자요! 됐죠?”

자기 이름과 사인을 남긴 종이를 유혁진이 태경에게 건넸다.

“오케이. 됐어요. 피곤할 텐데 그만 쉬어요.”

“저기, 원장님?”

병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태경을 유혁진이 불러 세웠다.

“네?”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저도요. 고마워요.”

“예? 저한테 뭐가……?”

“죽지 않고 마음 고쳐먹어 줘서 그게 참 고마워요. 유혁진 환자.”

드르륵-

‘그게 고맙다니…….’’

태경이 고맙다는 말을 남기며 병실을 나가자 유혁진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병실 문을 보고 있다 속으로 말했다.

‘당신 진짜 이상한 의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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