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후배
유혁진과 대화를 마치고 응급실로 내려온 태경은 바로 오창규에게 들렀다. 그에게 물어볼 게 있었기 때문이다.
“오 선생? 혹시 유혁진 환자 동생분 사진 있나요?”
“네. 있어요.”
태경이 유혁진 동생의 사진을 왜 보려고 하는지 오창규는 짐작한 듯 따로 이유를 묻지 않았다.
“미안한데, 좀 볼 수 있을까요?”
“아, 네. 잠시만요.”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이상 정말 그 두 사람이 닮았는지 궁금했다.
유혁진의 말을 못 믿거나 의심해서가 아니라 혹시나 한 마음에 확인하려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 한 가지에 꽂혀 오롯이 거기에만 몰두하고 심하게 집착하게 되면,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그대로 믿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쉽게 말해 차태철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착각한 건 아닌가 싶었다.
행여 유혁진이 차태철에게 집착한 나머지 그가 만나고 있는 여자가 동생과 닮아 보인다고 믿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만에 하나 정말 그런 거라면 유혁진의 정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진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이게 제가 갖고 있는 현진이 사진입니다.”
오창규는 예전에 여려 명이 함께 찍었던 사진을 찾아 보여 줬다.
“그 여자분은 아마 인터넷에서 검색하시면 쉽게 볼 수 있을 거예요.”
“그 사진 나한테 전송해 줄 수 있어요?”
“바로 보내 드릴게요.”
“그래요. 고마워요. 두 사람이 닮았다고 하던데 혹시 오 선생이 보기에도 두 사람이 닮았나요?”
“네. 닮긴 닮았어요.”
“알았어요. 일 봐요.”
잠시 뒤, 응급실 상황을 체크하고 진료실로 향하는 태경을 오창규가 뒤따라오며 불렀다.
“저기, 원장님?”
“네?”
“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
갑자기 쫓아와서 뜬금없이 하는 오창규의 말을 태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형님이 한 말 거짓말이 아니에요.”
“오 선생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형님이 병원에서 도주하려고 했던 이유가 차태철을 죽이려고 나간다고 했나요?”
“아니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그 말 전부 사실이에요. 원장님께서 모든 이야기를 들으시고 믿기 힘드시겠지만, 형님은 정말 그놈을 해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오 선생은 지금 유혁진 환자가 한 말을 내가 믿지 못할까 봐 거짓말이 아니라고 한 거예요?”
“……네. 맞습니다.”
오창규는 태경이 유혁진의 말을 믿지 못할까 봐, 그래서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봐 걱정됐다.
“그런데 오 선생 아까 나한테 그러지 않았어요? 유혁진 환자 도주하려는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맞습니다. 그 이유는 형님이 저한테 말해 주지 않아서 정확히 모릅니다.”
“그 이유를 모르면서 어떻게 차태철을 죽이려고 나가는 건 아니라고 확신하죠?”
“형님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한테 편지 한 장을 주셨어요.”
유혁진은 교도소에 들어간 뒤 처음 한두 번을 빼고는 어머니의 면회를 거부했다. 당연히 어머니를 보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못난 모습을 더는 보여 드리기 죄스러워 계속 면회를 거부하게 됐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오창규는 면회하러 갈 때마다 유혁진에게 어머니 소식을 전해 드렸고, 반대로 어머니께는 아들의 소식을 전해 드렸다.
유혁진과 그의 어머니 모두 오창규에게 그만하라고 했지만,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이었고 면회도 자주 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유혁진의 어머니가 병상에 있을 때 병문안을 온 오창규에게 직접 쓴 편지를 전해 줬다.
‘창규야,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한데 이거 혁진에게 좀 전해 줘. 직접 주고 싶은데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줄 수가 없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형님께 전해 드릴게요.’
편지를 열어 보진 않았지만, 어머니를 통해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우리 혁진이가 이제 그만 다 내려놓았으면 좋겠어. 그놈들을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마음도, 분노로 세상을 등진 마음도 다 내려놓고 본인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어. 혁진이 그러고 있는 거 보면 아버지도 동생도 위에서 편치 않을 거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러면서 절대 더 이상 살인을 하지 말라고, 그놈의 더러운 피를 네 손에 더는 묻히지 말라며 부탁했다.
“그 편지가 돌아가시기 전 남긴 거라 형님한테는 어머니의 유언과도 같았어요. 그래서 형님이 원장님께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한 겁니다. 형님은 어머니와의 약속은 지킬 사람이니까요.”
태경은 그제야 머뭇거리던 유혁진이 왜 마지막 조건을 받아들였는지 이해됐다.
본인의 설득을 들으면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이 담긴 편지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 선생 말을 들어 보니 이해가 되네요. 그런데 유혁진 환자 말고 자기 인생 찾을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거 같은데…….”
“예?”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도 도움이 좀 필요한 거 같아요.”
“그게 누군데요?”
“글쎄요. 누군지 곧 알게 되겠죠.”
“……?”
“아니에요. 일 봐요.”
머리를 긁적이는 오창규를 뒤로한 채 태경은 혼잣말하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나만큼이나 오지랖 넓은 사람이 또 있네.”
책상 의자에 앉은 태경은 모니터에 차태철과 결혼 소식을 전한 여자를 검색했다.
검색창에 예랑물산 결혼이라는 단어를 입력하자 관련 기사가 바로 나왔고 두 사람의 얼굴이 나온 사진도 볼 수 있었다.
-삼토그룹 차남 차태철과 예랑물산 막내딸 고이지 씨가 약혼을 발표했습니다.
“진짜네.”
유혁진의 말대로 동생과 차태철이 만나고 있는 여자는 확실히 닮은 느낌이긴 했다.
태경은 오창규에게 전송받은 핸드폰 속 사진과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 있게 도와준다고 했지만, 과연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난감했다.
막말로 무작정 회사로 찾아간다고 해도 이름이 알려진 기업의 딸이 일면식도 없는 자신을 쉽게 만나 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생긴다고 해도 그다음이 또 고민이었다.
차태철이 저지른 지난 이야기를 듣는 자체가 여자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이야기도 아니고 엄청난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그렇게 깊어진 생각이 고민으로 이어지던 그때였다.
똑똑-
“네~”
“야식 배달입니다.”
“예, 들어오세요.”
시키지도 않은 야식 배달에 당연한 듯 들어오라고 말하는 태경의 눈빛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철컥-
“샌드위치 배달입니다.”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의진이 샌드위치를 흔들며 진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 그래도 출출했는데 역시 여자 친구밖에 없네.”
“내가 딱 맞게 온 거네요.”
“그럼.”
태경과 의진은 서로에게 비밀이 없었다.
일하다가 잘 풀리지 않을 때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서로였고, 환자에 관한 것도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사소한 이야기조차 전부 공유했다.
그런데 어제저녁부터 자정이 훌쩍 지나 새벽이 된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의진이 보기에 태경이 조금 이상했다.
뭔가 평소의 바쁜 거와는 다른 느낌으로 중간중간 표정도 심각해 보였고 일이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가가려 했지만, 느낌상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진은 지금까지 태경을 찾지 않았다.
지금도 무슨 일인지 알기 위해 진료실을 찾은 게 아니었다.
항상 다 말하던 사람이 말하지 않은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어볼 생각도 없었다.
다만, 정말 큰일은 아닌지 괜찮은 건지 걱정되어 야식과 함께 얼굴을 보려고 찾아온 것이다.
“와! 이거 엄청 맛있는데?”
진짜 출출했던 태경은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선배 배 많이 고팠구나? 그러다 체하겠어. 천천히 먹어요.”
의진은 샌드위치와 함께 가져온 따뜻한 차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저녁에 미리 시켜 둔 건데 오늘 선배가 많이 바빠 보여서 지금 갖고 왔어요.”
“그러게. 오늘 바빠서 얼굴도 잘 못 봤네.”
“아까 선배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여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좀 걱정됐는데 지금 보니까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무슨 일인지 안 물어봐?”
“음……. 아마도 지금 우리 병원에서 가장 화제 되는 인물이 유혁진 환자니까. 그 환자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싶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태경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의진을 쳐다봤다.
“역시! 내 여자 친구여서가 아니라 사람이 참 스마트해.”
“뭐, 똑똑한 남자 친구에게 영향을 받아서 그런 거 같네요. 그래서 일은 잘 해결된 거 맞죠?”
“뭐, 일단 가장 큰불은 껐고 나머지도 잘 해결해 보려고 하고 있어.”
“잘됐네요. 자! 그럼 드시던 샌드위치 마저 드세요.”
“아. 예.”
모니터에 등을 지고 책상 끝에 걸터앉아 있던 의진은 태경이 내려놓은 샌드위치를 다시 건네주며 뒤돌아섰다.
“선배? 나 잠깐 메일 확인 좀 해도 되죠?”
“당연하지. 여기 앉아서 해.”
“아니에요. 낮에 교수님께 메일 보낸 게 있는데 보셨는지 확인만 하면……. 어! 이지네.”
메일에 접속하려고 모니터를 보던 의진은 태경이 보고 있던 차태철의 결혼 기사를 보며 아는 척했다.
“선배가 이지 결혼 기사는 왜 보고 있었어요?”
“누구?”
“여기, 이 친구요.”
입안에 있던 샌드위치를 재빨리 삼킨 태경이 물어보자 의진이 기사에 있던 여자를 가리키며 답했다.
“이 사람?”
놀란 표정을 짓던 태경이 재차 물었다.
“이 여자 아는 사람이야?”
“기억 안 나요? 내가 저번에 한 번 말했는데. 후배가 곧 약혼하는데 선배랑 함께 초대받았다고 같이 가자고 했잖아요.”
“……!”
그러고 보니 한 달 전, 의진이 후배의 약혼 소식을 전하며 함께 가자는 말을 했었는데, 그 여자가 차태철과 만나는 여자일 줄은 몰랐다.
“고등학교 후배예요.”
지금 생각해 보니 의진이라면 저 여자를 알고 있는 게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의진이 태경의 가족에 대해 다 알고 있듯이 태경도 의진의 가족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잘나가는 로펌에 대표였고, 가족들 역시 그 로펌 소속으로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법조인 집안으로 명성이 높았다.
한마디로 대단한 집안이라는 소리였다.
예전 의예과 시절, 집이 상당히 잘사는 조금 잘난 척이 심한 동기가 하나 있었다.
어느 날 자신감이 넘치고 활기찬 애가 동아리에 들어간 뒤 죽상을 하고 수업에 들어왔다.
늘 하이텐션을 자랑하던 애가 죽상을 하고 있으니 다른 동기들이 이유를 물었는데, 동아리 선배가 같은 동네 사람이라 좀 불편하다고 했다.
동네 사람이 뭐 그리 문제냐고 묻자 자기가 사는 동네는 한 집만 건너면 누가 누군지 다 알 수 있다는 했다.
쉽게 말해 상류층 커넥션이 있어서 어느 정도 다들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의진이 예랑물산 딸을 알고 있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은 아이라는 거였다.
‘그럼 설마?’
순간 진지하게 생각하던 태경은 의진이 차태철에 관해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선배, 아직도 기억 안 나죠? 바빠서 내가 한 말 잘 못 들었구나?”
“아니야. 생각났어. 의진아 혹시 이 남자도 알아?”
“누구? 차태철 씨?”
“응.”
“알긴 알아요. 자세히 알 거나 친분이 있는 건 아니고 예전에 같은 동네 사람이었다는 것만 알아요.”
“혹시 두 사람 어떻게 만났는지 알아? 사이는 좋아?”
“중매로 만났다고 하는데……. 맞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언니가 이지가 차태철 씨를 만난다는 말을 듣고 괜찮은 건지 저한테 물어봤던 적이 있어요.”
“괜찮은 건가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