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81화 (380/472)

381화. 세 사람의 대면

“중매로 만났다고 하는데……. 맞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언니가 이지가 차태철 씨를 만난다는 말을 듣고 괜찮은 건지 저한테 물어봤던 적이 있어요.”

“괜찮은 건가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되게 오래된 일인데 그 집이 한때 좀 시끄러웠나 봐요. 언니도 자세히는 모르고 그때 동네에서 떠돌던 소문이 차태철 씨가 아파서 한동안 소란을 피웠다고 했어요.”

그 당시 의진은 병원에서 먹고 자고 하는 날이 많았기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렇구나. 저기…….”

태경은 지금 이 상황이 상당히 난감했다.

사실 조금 아까 전, 그러니까 의진이 사진 속 여자를 안다고 했을 때는 만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겠구나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막상 입을 떼려고 하자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의진아? 나 할 말이 있는데…….”

“뭔데 자꾸 선배답지 않게 뜸을 들여요.”

“일단 여기 앉아 봐.”

태경은 의자를 가져와 서 있는 의진을 앉히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를 들어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이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그 결혼 상대가 예전에 큰 잘못을 한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면 의진이 넌 어떻게 할 거야.”

“내가 아는 사람은 상대가 했던 잘못을 모르고요?”

“어. 몰라.”

“그 잘못이라는 게 정말 큰 잘못이라면 난 말할 거 같아요.”

“네가 말한 걸로 인해 두 사람의 결혼이 깨질 수도 있는데 그래도 말할 거야?”

“그 정도로 큰 잘못이예요?”

“어. 용서받기 힘든 잘못이야.”

“그러면 말할 거예요. 물론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상대를 용서하고 받아들일지 헤어질지는 아는 사람이 판단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사람인데 만약 말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거 같아요.”

“그래. 그 말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왜 물어본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선배 표정도 갑자기 심각하고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의진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알았지?”

“……네.”

“2층 병동에 있는 유혁진 환자 알지?”

“그럼요. 지금 병원 직원 중에 그 사람 모르는 사람 없잖아요.”

“실은 아까 그 환자에게 좀 문제가 있었어.”

“무슨 문제요? 어디 많이 안 좋아요? 척추 괜찮다고 하지 않았어요?”

의진은 유혁진이 안 좋다는 말이 건강 관련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작은 소동을 일으키면서 죽겠다고 죽고 싶으니까 죽여 달라고 했어.”

“왜요?”

“알고 보니까 유혁진 환자가 교도소에 복역한 이유가 있었는데 여동생이 안타깝게 사망했고 그 일과 관련이 있었어.”

태경은 차분하게 유혁진 가족에게 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

의진이 예랑물산 딸과 선후배 관계이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설명하는 동안 차태철의 이름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혁진 환자가 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된 거야.”

“어머!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어떻게 그런 나쁜 xx가 있을 수 있어요.”

이야기를 들은 의진은 당연하게 분노하며 놀란 모습을 보였다. 아마 누구라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내가 그 환자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거든. 자기 동생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결혼을 발표했는데 그 여자에게 모든 사실을 대신 전해 달래.”

“유혁진 환자 참 힘들었겠다. 뭔가 전 그 사람이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알 거 같아요. 그 나쁜 놈은 행복할 자격이 없어요. 한 가족의 삶을 다 망쳐 놓고 어떻게 본인만 행복하게 살겠다는 거, 그건 양심을 가진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니죠. 하긴 애초에 양심이 있던 다면 그런 짓을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태경 못지않게 환자 일이라면 열심인 의진은 마치 자기 일처럼 분노하며 반응했다.

“그런데 선배, 그 여자한테는 어떻게 말하려고요?”

“그게, 나도 그 부분을 염려했는데, 의진아. 사실 네가 아는 사람들이야.”

“네? 제가 아는 사람이 유혁진 환자……! 잠깐만요. 선배!”

잠시 동안 멍해진 얼굴로 생각하던 의진은 그제야 태경이 했던 말이 어떤 말인지 이해됐다.

“설마! 설마 그 남자와 여자가…….”

태경을 보던 떨리는 눈빛이 모니터 속 기사로 옮겨졌다.

“차태철 씨와 이지 얘기예요? 그래요?”

“어. 맞아.”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나도 아까 네가 기사를 보면서 후배라고 말할 때 그때 알았어.”

“하!”

기가 막힌 상황에 의진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하며 황당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태경 역시 놀란 그녀를 위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배, 그런데 아까 유혁진 환자 동생분이랑 후배가 닮았다고 했죠? 동생분 사진 한번 볼 수 있어요?”

“아까 오 선생이 보내 준 거야. 여기.”

태경은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확대한 뒤 건넸다. 핸드폰으로 향한 시선이 모니터로 향한 다음 다시 핸드폰으로 향했다.

“정말이네…….”

의진이 보기에도 두 사람은 닮았다. 쌍둥이처럼 똑같이 닮은 건 아니었지만, 생김새나 사진 속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비슷했다.

가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고 누구와 닮았다고 하는 말처럼 두 사람의 닮기도 그 정도였다.

“의진아, 난 그래도 후배한테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네 의견은…….”

“당연하죠!”

태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진이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말해야죠. 그게 맞아요. 당연히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길에 떨어진 지갑을 몰래 갖고 오거나 가게에서 계산하지 않은 물건을 가지고 나온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다른 것도 아니고 성폭행으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고 가족의 삶까지 망가뜨렸어요.”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요. 만약 이대로 말하지 않고 두 사람이 결혼까지 하게 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지한테 미안할 거 같아요. 선배가 아까 그랬죠? 유혁진 환자가 동생은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니라 차태철이 그렇게 만든 거라고요. 그 말이 맞아요.”

이 엄청난 일을 알게 될 후배가 걱정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진은 이 사실을 전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 방금 선배 이야기 듣고 차태철이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을 거 같지 않아요. 성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들이 그 고리를 쉽게 끊을 수 없다는 거 선배도 잘 알잖아요. 난 오히려 후배가 결혼 전에 이런 일을 알게 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그랬다.

만약 결혼이 진행된 다음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후배한테는 그게 더 괴롭고 힘들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의진아. 그 후배랑 좀 만나게 자리 좀 마련해 줄 수 있을까?”

“네, 제가 연락해서 약속 잡을게요.”

시간을 길게 끌 필요가 없다고 느낀 의진은 그날 오전에 후배에게 바로 연락했고, 바로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 * *

다음 날-

두 사람은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사방이 뚫린 카페에서 할 수 있는 대화가 아니었기에 따로 이야기할 수 있는 룸이 있는 카페를 찾았다.

“어서 오세요.”

“룸 예약한 사람인데요. 예약자 이름은 정의진입니다.”

“확인되셨어요. 안내해 드릴게요.”

예약한 룸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일찍 온 건 아니지?”

“네. 이지는 10분 뒤쯤 도착할 거 같아요. 이게 그 녹음기예요?”

태경이 꺼낸 작은 녹음기를 보며 의진이 물었다.

“어. 어제 오 선생이 줬어.”

전날, 유혁진에게 부탁받은 오창규는 출근한 뒤 태경에게 녹음기를 전해줬다.

동생이 그날 일을 자필로 적어 뒀던 다이어리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사에게 뺏긴 유혁진은 녹음기의 존재는 알리지 않았다.

차태철과 동생의 육성이 담긴 녹음기는 다이어리보다 더 확실한 증거였다. 하지만 그 당시 말도 안 되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유혁진은 녹음기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찰에게 잡히기 전날, 녹음기를 개인 금고에 보관하며 대리인으로 오창규를 세워 뒀다.

예랑물산 딸을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혁진은 오창규에게 부탁해 녹음기를 금고에서 꺼내 왔다.

그동안 꼭꼭 숨겨 왔던 녹음기를 태경에게 준 이유는 혹시라도 여자가 그 말을 믿지 않을까 봐, 그래서 준비한 거였다.

“선배는 녹음기 들어 봤어요?”

“아니. 안 들어 봤어. 오늘 이 녹음기를 들어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저도요.”

두 사람이 평소보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 가고, 곧이어 오늘의 주인공이 도착했다.

“의진 언니?”

“이지야?”

“약혼식 이야기 때 만나고 두 달 만이네요.”

“맞아. 오는데 힘들지 않았어?”

“아니요. 택시 타고 편하게 왔어요.”

“바쁠 텐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

“바쁘긴 언니가 더 바쁘죠. 약혼식은 뭐 크게 준비할 건 없어요. 어! 이쪽이 언니랑 결혼을 생각하고 만나신다는 그분 맞죠?”

차분한 두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의 고이지가 태경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맞아. 내 남자 친구야.”

“안녕하세요. 김태경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고이지라고 해요. 그런데 저, 선생님 알아요. 예전에 아동 학대 사건 때 인터뷰 하신 거 봤거든요. 저, 그때 TV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진 언니 남자 친구분인 줄 몰랐어요. 선생님 되게 멋지세요.”

“별말씀을요. 아닙니다.”

“이지야, 일단 앉아.”

솔직하고 밝은 고이지는 자리에 앉은 것도 잊은 채 반가워하고 있었다.

“뭐 좀 마실래?”

“전, 애플 티 마실게요. 두 분은 뭐 드실래요?”

“제가 다녀올게요. 앉아 있어요.”

고이지가 주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태경이 먼저 일어났다.

“의진이는 아메리카노 마실 거지?”

“네, 선배.”

태경이 주문하기 위해 룸을 나가자 고이지는 한껏 밝은 톤으로 말했다.

“언니 남친 분 직접 보니까 더 잘생기셨는데요? 언니랑 되게 잘 어울려요.”

“그래. 고마워.”

“두 분 같은 병원에서 일한다고 하셨죠?”

“응.”

“저한테는 미래 형부네요. 본 지 오 분도 안 됐는데 뭔가 좋은 분 같아요.”

“배울 점도 많고 마음도 따뜻하고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저씨랑 아주머니도 아세요?”

“아직 보지는 않았고 내가 말씀드려서 알고 계셔.”

“나 결혼한 다음에는 언니가 가겠네요. 저 솔직히 어제 연락받고 언니 남자 친구분이랑 같이 만나자고 할까 했는데 실례 같아서 안 했거든요. 그런데 언니가 두 분이 같이 나온다고 해서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저기……. 이지야? 그 사람 어떻게 만나게 됐어? 부모님 통해서?”

“네, 뭐. 뻔하죠. 사실 결혼 생각 크게 없는데 우리 집안에서는 혼자 사는 건 안 되거든요. 어른들이 가정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부모님이 그랬고 우리 오빠랑 언니가 그랬듯이 저도 뭐, 선본 거죠.”

“그 사람이 너한테 잘해 줘?”

“저한테는 엄청 잘해요. 태철 씨가 저한테 더 적극적이고 정성이어서 그런 면을 보고 좀 마음이 열린 거 같아요.”

“아, 그래.”

“엄마한테 그 사람이 날 좋아하는 것만큼 난 그 사람을 안 좋아한다고 했더니 연애결혼이나 중매나 살다 보면 다 정붙이고 사는 거 똑같다면서, 여자는 자기한테 잘하는 남자랑 살아야 속 안 썩고 행복하다고 하시는데 맞는 말 같아요.”

의진이 테이블 밑에서 맞잡은 손을 쥐었다 펼치며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주문한 음료를 들고 태경이 돌아왔다.

“음. 애플 티 맛있다. 아까 들어오면서 보니까 여기 케이크가 너무 맛있어 보이는 거예요.”

“그럼 먹을래?”

“아니요. 약혼식 때 입을 원피스를 맞췄는데 좀 타이트해서 다이어트 중이에요.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하면 싸울 일도 많고 피곤하겠지만 요즘은 재미있어요.”

얼굴에서 느껴지는 고이지의 행복함을 보며 두 사람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후배의 행복이 깨질 거라는 걸 의진은 잘 알고 있었다.

어떡하면 최대한 상처를 덜 받을까 고민했지만,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고이지와 평범한 대화를 주고받던 의진은 결심이 선 듯 후배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이지야……?”

“네, 언니.”

“너 만나고 있는 사람 있잖아. 그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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