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Hyperventilation
“이지야, 너 만나고 있는 사람 있잖아. 그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해?”
“태철 오빠요?”
“……어.”
“지금까지 만나 왔고 결혼할 사람이라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해요. 언니 저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어?”
“아까부터 언니 표정이랑 말투가 안 좋아서요.”
고이지는 자신을 볼 때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내고 있는 의진에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략 결혼하는 거 때문에 그렇죠?”
“저기, 이지야. 그게 아니라…….”
“저 괜찮아요. 솔직히 언니네 집안은 그런 거 없어서 이렇게 결혼하는 게 이해 안 갈 수도 있지만 사실 저 아무렇지 않아요. 그리고 항간에 떠도는 태철 씨 회사가 안 좋은 거는 뭐, 회사 운영하다 보면 좋았다 안 좋았다 하는 거라서 그것도 크게 신경 안 써요. 저랑 결혼하고 나면 아빠가 도와주실 거 같아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밝게 말하는 후배를 보며 사실을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의진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지야. 사실 있잖아. 그러니까…….”
“의진아. 내가 말할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의진을 보며 태경은 자신이 말하겠다며 그녀를 달랬다.
“사실 오늘 제가 의진이랑 함께 나온 이유가 있어요.”
“이유요?”
“네, 이지 씨에게 꼭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저한테요?”
“네. 반드시 꼭 알아야 하는 이야기예요.”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차태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 남자 친구요?”
“네, 듣기 힘든 이야기가 될 거예요.”
“…….”
고이지는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자기 이야기만 신나게 하느라 몰랐는데, 아까 두 사람을 만나러 룸에 들어왔을 때부터 표정이 안 좋았다.
“언니랑 선생님 표정에 걱정이 가득해서 듣기 전부터 떨리네요. 어떤 건데 그러세요.”
“예전에 10년도 전에 차태철 집에서 집안일을 도와주시던 부부가 있었어요. 그 부부에게는 아들과 어린 딸이 있었는데, 딸이 차태철과 비슷한 또래였고, 차태철의 어머니와 집안일을 하는 부부는 사이가 좋았어요. 그 아이들도 그랬나 봐요.”
태경은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 갔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유혁진과 오창규에게 들은 사실 그대로 전부 말했다.
조용히 집중하던 고이지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믿을 수 없는 말에 점점 굳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재 유혁진 씨는 교도소에 복역 중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때 일로 세상을 떠난 동생분의 사진이에요. 유혁진 씨도 의진이와 나도…….”
“다, 다, 닮았어……!”
태경의 뒷말이 나오기도 전에 고이지가 다음 말을 이었다.
“이 여자분 나랑 닮았네요. 여기, 사진 속에 있는 여자분이……. 하!”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은 고이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니까 이 여자 분이 ㅌ…… 태, 태철 오빠한테 몹쓸 짓을 당하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거죠? 그것 때문에 한 가족이 다 무너졌고요.”
“맞아. 이지야.”
“하! 언니!”
드르륵-
경악스러운 이야기를 전부 들은 고이지는 고개를 흔들며 의자에서 급히 일어났다.
“어, 언니 농담이 너무 지나쳐요. 태철 오빠 그런 사람 아니야. 사람의 심성이란 게 그렇잖아요. 나한테 좋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 있고 반대로 나한테 나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내가 보기에는 언니랑 선생님이 뭔가 잘못 안 거 같은데?”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고이지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마 누구라도 결혼할 상대방의 이런 과거를 갑자기 알게 된다면 쉽게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지야……. 나도 며칠 전에 알았어. 그래서 너한테 급하게 연락하고 선배랑 같이 나온 거야.”
“언니, 그 사람 길 가다 집 없는 고양이만 봐도 가끔 편의점에서 간식 사다가 주고 그래요. 하!”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려 오는 손끝을 진정시킨 고이지는 숨을 몰아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까 10년도 더 전에 일이라고 했죠? 그때 태철 씨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고 했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도 짓을 할 수가 있겠어요.”
“차태철이 병원에 입원한 건 사실이에요. 시기는 정확히 모르지만, 두 번 정도 입원한 거로 알고 있어요. 한 번은 육체적인 병으로 입원한 게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로 입원했고.”
“잠시만요. 말씀하시는데 죄송하지만, 정신적인 문제라는 게 어떤 문제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몇 번의 자해 소동으로 가족들이 입원시킨 적이 있어요. 그리고 함께 일한 사람의 말로는 폭언과 폭행이 심하고 분노 조절이 쉽지 않았는데 이지 씨를 만나고 좀 바뀌었다고 했어요.”
“그, 그럼……. 나머지 한 번은요?”
“나머지 한 번은 고인이 된 동생분 오빠에게 다쳐서 입원했어요.”
“하!”
“이지야, 네가 놀란 것도 못 믿는 것도 당연해. 그런데 전부 사실이고 그날, 동생 분이 직접 녹음한 파일도 있어.”
“하아! 하!”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가운데 한 손으로 벽에 기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고이지가 순간 바닥에 주저앉았다.
털썩-
“이지야?”
드르륵-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의진과 태경이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고이지에게 다가갔다.
고이지의 흉부가 방금 전보다 더 빠르게 올라왔다 내려감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지야, 정신 차려. 선배? 아무래도 의지가 하이퍼…….”
“맞아. 하이퍼벤틸레이션 심드롬(Hyperventilation syndrome(과호흡 증후군)이야.”
과호흡 증후군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주된 원인은 정신적 스트레스로 과한 호흡으로 인해 이산화탄소가 많이 배출되어 발생한다.
차태철 이야기로 충격을 받은 고이지는 과호흡이 와서 어지러움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은 것이다.
‘깨끗하다.’
다행히 다섯 번째 바이탈은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봉지 얻어 올게요.”
“고이지 씨? 지금 과호흡이 와서 그래요. 괜찮아요.”
“선배 여기요.”
급하게 룸을 뛰어나간 의진은 카운터에서 투명 봉지를 가져왔다.
“자! 날 따라 숨을 쉬어 봐요. 천천히 들이마시고 좋아요. 다시 내뱉고…….”
공기로 팽창시킨 봉지를 고이지 입에 갖다 댄 태경은 그녀를 안심시키며 차분하게 응급처치를 진행했다.
“천천히, 내 구호에 따라서 천천히 숨을 들이마셔요. 하나, 둘, 셋…… 일곱. 좋아요. 그다음 이제 반대로 숨을 내뱉을 건대. 방금 전보다 더 천천히 할 거예요. 하나, 둘…… 아홉, 열. 잘했어요. 아주 잘하고 있어요.”
발 빠른 응급처치로 고이지의 상태는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이지야, 괜찮아?”
“하아! ……네. 살짝 어지러움이 있는데 아까보다는 괜찮은 거 같아요.”
“그러지 말고 일단 우리 병원으로 가자. 가서 링거 맞고 좀 안정을 취해야 할 거 같아.”
“그래요. 이지 씨, 지금 어지러움도 느끼고 그게 좋겠어요.”
“……네. 그럴게요.”
고이지는 온몸에 힘이 빠져 기운이 없었다.
이대로 혼자 있다가는 또 과호흡이 올까 봐 걱정됐기에 두 사람의 말대로 병원에 가기로 했다.
태경과 의진은 고이지를 부축하며 택시를 잡고 급히 우리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온 뒤, 검사를 마친 고이지는 1인 병실에서 안정을 취하며 수액을 맞았다.
아무래도 시끄러운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고, 차태철에 관한 이야기가 남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가는 응급실보다 1인 병실이 나을 거 같았다.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많이 놀란 고이지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드르륵-
“이지야, 좀 괜찮아?”
잠시 뒤, 검사 결과와 함께 의진과 태경이 병실로 찾아왔다.
“네. 어지러운 것도 없고 이제 괜찮아요.”
“좀 더 누워 있지그래?”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저,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상체를 일으켜 세운 고이지가 태경을 보며 물었다.
“검사 결과 특이점 없이 다 정상이에요. 아까 카페에서 설명했던 대로 충격으로 인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과호흡이 온 거예요.”
항상 모든 환자의 검사 결과를 봐야 정확하지만, 고이지의 다섯 번째 바이탈이 워낙 깨끗했기에 태경은 검사를 진행하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었는데 바로 과호흡이었다.
과호흡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심리적으로 안정적이지 않으면 자칫 또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당분간 차태철의 일로 스트레스를 계속 받을 고이지가 또다시 과호흡이 오지 않을까, 그 점이 염려스러웠다.
“고3 때 입시 준비하면서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과호흡이 한 번 온 적 있었어요. 그래서 아까 카페에서도 과호흡이구나 싶었는데 언니랑 선생님 덕분에 빨리 좋아진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이지야, 언니가 미안해.”
의진으로 진심으로 후배에게 미안했다.
차태철에 관한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그 엄청난 사실 때문에 충격받은 후배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게다가 지금 눈으로 보이는 고이지의 모습 때문에 마음이 더 그랬다.
아까 카페에서 충격받았을 때와 달리 겉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예상과 다르게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 이상 없이 멀쩡한 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과호흡이 왔을 정도로 힘들었으면서 후배가 일부러 괜찮은 척 애쓰고 있는 게 보였기에 마음이 더 안 좋았다.
“언니가 왜 미안해해요.”
“네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아니에요. 언니, 전 괜찮아요. 그리고 언니 잘못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아까 했던 말 있잖아요? 두 분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지 말고 오늘은 안정을 취하고 괜찮아지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는 게 어때요?”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제가 당사자인데 알 건 알아야죠. 답해 주세요.”
“유혁진 씨가 교도소에서 치료차 우리 병원에 왔고, 그 사람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알게 됐어요.”
“저, 언니랑 선생님께 부탁이 있어요.”
“뭔데? 말해 봐.”
“…….”
말해보라는 말에 고이지는 한참을 망설였다.
“이지야, 괜찮으니까 말해 봐.”
“아까 선생님께서 그랬죠? 녹음파일이 있다고요.”
“맞아요. 차태철과 동생분 육성이 담긴 파일이 있어요.”
“그거 저한테 전송해 주실 수 있나요?”
“이지야. 그거 듣기 힘들지 않을까?”
혹시라도 고이지가 파일을 듣고 더 큰 충격을 받을까 봐 의진은 주고 싶지 않았다.
“알고 있어요. 부모님에 의해 시작된 만남이지만 그 사람을 짧은 시간 만난 것도 아니고 꽤 만났어요. 두 분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제 입장에서는 확인이 필요해요.”
과거의 차태철과 지금의 차태철 사이에서 고이지는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진실을 알고자 확인이 필요했다.
정확한 진실을 알아야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제 인생이 걸린 중요한 일이예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뭔지 전 알아야죠.”
“그래요. 맞아요. 카페에 녹음기를 가져간 것도 믿기 힘든 이야기의 진실을 알려 주려고 가져간 거예요. 그런데 이지 씨 모습을 보고 막상 이걸 들려줘도 될지 의진이랑 내가 고민을 좀 했어요.”
“언니랑 선생님이 절 걱정해서 그런 거라는 거 알고 있어요. 그래도 마주해야죠.”
“파일은 내가 전송해 줄게요.”
“감사합니다. 저 이만 가 볼게요.”
“왜? 벌써? 너 아직 수액 더 맞아야 해.”
“여기 누워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정말 그랬다. 지금 머릿속이 복잡하고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과호흡이 와서 놀라기는 했지만, 괜찮아졌으니 더 이상 병원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지금 고이지의 머릿속에는 차태철의 과거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정말 괜찮아? 혼자 갈 수 있겠어?”
“네, 언니. 제가 연락드릴게요. 오늘 감사했어요.”
고이지는 복잡한 눈빛으로 의진과 태경에게 인사를 한 뒤 병원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