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83화 (382/472)

383화. 숨기는 거 없어?

고이지가 병원을 나간 뒤, 태경은 유혁진의 병실을 찾았다.

“그러니까 우리 병원에 근무하시는 선생님과 차태철이 만나고 있는 여자가 아는 사이였다는 거죠?”

전날, 유혁진은 태경이 차태철과 결혼할 여자를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짧은 시간에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환자 일로 바쁜 거 같아 따로 물어보지 않았었다.

“정확히는 제 여자 친구와 선후배 사이예요.”

“그 선생님이 원장님과 만나고 계신 분이라는 말씀이세요.”

“맞아요. 사실 차태철과 만나고 있는 사람과 일면식이 없는 내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우연히 여자 친구와 선후배 사이라는 걸 알게 돼서 도움을 받았어요. 물론 차태철이 있는 자리에서 말한 건 아니고 여자 친구가 후배를 만나는 자리에 함께 나가서 이야기했죠.”

“……아 그렇군요.”

어쩐지 유혁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태경을 보고 있던 고개를 떨구며 이불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차태철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지 못해서 실망했어요?”

“…….”

“나도 유혁진 씨의 부탁이라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아는 사람끼리 연결되다 보니까 현실적으로 그게 쉽지 않았어요. 미안해요.”

“예?! 원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유혁진은 고개를 번쩍 들고 급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미안이라니요? 실망하지도 않았고 기분 안 좋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예요.”

“반대요?”

“네, 원장님께도 그렇고 여자 친구분이라는 그 선생님께도 그렇고 제가 면목 없고 죄송해서 그런 겁니다.”

분명 원했던 일이었고, 지금도 일을 벌인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차태철이 한 짓은 잘못한 일이었기에 그가 괴로워하고 좌절했으면 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다만, 유혁진은 그 여자가 태경의 여자 친구의 후배라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생판 모르는 자신을 이렇게까지 도와준 사람인데 본인 때문에 태경과 의진이 곤란한 상황에 놓인 건 아닌가 싶었다.

“원장님 여자 친구분의 후배일 줄을 몰랐습니다.”

“나도 몰랐던 사실인데, 유혁진씨가 모르는 게 당연하죠.”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 전혀 아니에요. 나 역시 여자 친구의 후배라서 이 일을 어떡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그런데 여자 친구가 꼭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사실대로 밝혔어요. 오히려 아는 사람이어서 모른 척 침묵했으면 나중에 더 후회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다행이네요.”

“그런데 괜찮겠어요? 유혁진 씨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어요.”

“원장님 말씀은 차태철에게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맞아요.”

차태철과 결혼을 계획하고 약혼식을 코앞에 둔 고이지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됐고, 확인하겠다는 이유로 녹음 파일까지 받았다.

하지만 어쩌면 차태철에게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고 그럴 가능성이 낮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부모님의 소개였고 정략결혼으로 만난 사이지만, 두 사람이 만난 시간은 짧지 않았고 바로 오늘 아침까지 아무 고민 없는 사이좋은 커플이었다.

누군가 그랬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정이라고.

그 정 때문에 잘못된 굴레에 갇혀 잘못된 관계를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분명 그 두 사람에게도 지금까지 쌓은 ‘정’이 있을 것이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고이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진실을 알고도 이 일을 덮고 침묵한다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땐 다른 방법으로 두 사람에게 다시 말할 건가요?”

“아니요. 원장님, 그럴 생각 없습니다.”

“왜죠?”

“사실 원장님이 두 사람이 아닌 그 여자에게 말했다고 했을 때, 차태철이 더 크게 절망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혼하고 싶던 여자 입에서 숨기고 싶은 추한 진실을 듣는 게 고통 그 자체일 테니까요. 그런데 당사자가 침묵한다면 그런데도 차태철을 선택했다는 건데, 제가 다시 말을 한다면 그땐 차태철보다 그 여자분이 상처받을 거 같아서요.”

괜히 착한 척을 하는 건 아니었다.

고이지가 동생을 닮아서 신경이 쓰였던 거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 건 아니었다.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될 텐데, 그때는 함께 살았던 고이지에게 화살이 쏟아질 게 뻔했다.

그뿐 아니라, 그녀의 가족까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려 온갖 욕을 다 먹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커져 고이지가 잘못될까 봐 그게 걱정됐다.

가족을 잃어 봤기에, 그 심정을 알기에 그런 결말은 원치 않았다.

차태철을 잡으려다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어떤 마음인지 알겠네요. 아! 그리고 혹시 유혁진 씨 복역한 사건에 대해 다시 재심해 볼 생각은 없어요? 내가 실력 좋은 변호사 소개해 줄 수 있어요.”

태경이 말한 실력 좋은 변호사는 의진의 친언니로, 의진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 사항이었다.

유혁진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의진은 언니를 통해 그를 무료로 변호해 줄 생각이었다.

“아니요. 원장님 말씀은 감사한데 괜찮습니다. 제가 법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죽인 건 사실이고, 그날 그놈들을 찾아가면서 이렇게 될 거라고 각오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제가 벌인 일인데 제가 책임지는 건 당연하니까요.”

“그럼 동생분 사건에 대한 차태철을 고소하는 건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그건…….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원장님도 이제 아시겠지만, 그런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에게 데다 보니 그쪽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아서요.”

유혁진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태경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혹시 나중에 생각 바뀌면 그때 말해 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대화를 마친 태경은 병실을 나와 병동 회진을 시작했다.

* * *

병원을 나온 고이지는 택시 승강장으로 걸어가 택시에 탑승했다.

“어서 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아무 대답이 없자 택시 기사는 다시 한번 물었다.

“기사님, 죄송하지만 시내 좀 몇 바퀴 돌아 주시겠어요?”

“예?”

“제가 생각을 좀 정리해야 하는데 운전할 정신이 아니라 택시를 탔어요.”

“아, 예……. 알겠습니다.”

기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룸미러를 통해 본 고이지의 행색이 요금을 떼어먹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택시를 출발시켰다.

택시가 정처 없이 시내를 오갈 동안 고이지는 수많은 생각을 하고 또 했다.

‘어떡하지? 어떡해야 할까?’

‘뭔가 착오가 있는 건 아닐까?’

‘의진 언니랑 선생님이 알고 있는 게 잘못될 수도 있는 거잖아?’

고이지의 입장에서 차태철의 과거를 믿기란 더 힘들었다.

“하아!”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머릿속만 점점 더 복잡해지던 그때였다.

-지이이잉

-이지야, 어디야?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핸드폰 진동 소리와 함께 미리보기 창에 메신저 내용이 보였다.

보낸 사람은 당연 차태철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답장하지 않는 고이지를 걱정하며 계속 연락하고 있었다.

-저녁 뭐 먹을지 생각해 놨어? 오빠가 데리러 갈 테니까 이거 보면 바로 연락해.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함이 묻어나는 남자친구의 메시지에 고이지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지이이잉

그리고 곧이어 또다시 진동 소리가 울렸다. 당연히 차태철인 줄 알았는데 보낸 사람은 태경이었다.

-김태경입니다. 녹음 파일 보냅니다. 오늘 이야기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꽤 장문의 글자가 이어졌는데 자세히 보니 과호흡으로 쓰러진 고이지를 걱정하는 글이었다.

-이지야, 언니야. 너 좀 괜찮아? 걱정돼서 톡 남겼어.

태경이 보낸 글을 읽고 있던 사이, 의진이 보낸 메신저가 도착했다.

의진 역시 장문의 글을 보냈으며 태경과 똑같이 건강을 염려하며 무리하지 말고 쉬라는 따뜻한 글이었다.

그 어떤 문장에도 차태철에 관한 내용이나 녹음 파일을 들어 보라는 내용은 없었다.

핸드폰 화면을 계속 보고 있던 고이지 눈에 태경이 보낸 ‘진실’이라는 제목의 녹음 파일이 들어왔다.

“기사님, 죄송한데 이 근처에 공원 같은 곳이 있을까요?”

계속 고민하던 고이지는 결심한 듯 기사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는 없고 좀 더 가면 공원이 하나 있어요.”

“그러면 거기에 내려 주세요.”

잠시 뒤, 택시가 공원 입구에 멈추고 택시에서 내린 고이지는 공원 안쪽 걸어가 사람들이 뜸한 벤치에 앉았다. 그런 뒤 곧장 차태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지야,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어?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오빠 그런데 아무래도 저녁 약속 취소해야 할 거 같은데 어쩌지?”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 없어. 오늘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서 기분 좋아서 와인을 좀 했더니 만만치 않네.”

평소에 술을 못 하는 고이지는 술 핑계를 댔다.

메신저로 약속 취소를 알리려고 했지만, 그러면 전화가 올 게 뻔했고 따로 물어볼 말이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걸었다.

-술도 못하는 사람이 술을 마시면 어떡해? 지금 어딘데? 내가 갈까?

“오긴 어딜 와. 일 안 해? 나 집에 가고 있어. 아! 맞다. 오빠? 나 물어볼 게 있는데…….”

-뭐든 물어봐.

“아니, 내가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까 친구들이 그러더라고. 남자고 여자고 결혼하기 전에 서로 속이는 거 없이 다 알아야 한다고.”

-당연하지. 같이 살 사람인데 속이는 게 있고 그러면 안 되지.

“예전에 말했지만, 난 오빠한테 숨긴 거 하나도 없거든. 숨기고 싶었던 일이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전부 말했어.”

-알지. 내가 이지 너 처음 본 날도 사람이 되게 솔직하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말인데 오빠,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없어?”

-숨기는 거?

“어, 과거에 잘못한 일이나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을 힘들게 했다거나 나한테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런 거?”

고이지가 차태철에게 전화를 건 진짜 이유는 녹음 파일을 듣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양심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없지.

“없다고?”

-응.

“정말 없어?”

-그럼. 우리 아버지 엄하셔서 나 은근히 새가슴이라 소심한 거 알잖아?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왜 힘들게 해. 우리 할머니가 나 어릴 때 사람 괴롭히면 다 돌려받는다고, 손해 봐도 도와주면서 살라고 하셨어.

“그렇구나. 알았어. 오빠 나 집에 다 와서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이따 전화할게.

“아니야. 나 오늘은 일찍 잘게. 잠이 너무 쏟아져서. 내가 내일 연락할게.”

서둘러 전화를 끊은 고이지는 잠시 망설이다 가방에서 무선 이어폰을 꺼내 태경이 보낸 녹음 파일을 재생시켰다.

파일이 재생될수록 침착하던 그녀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지더니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파일 안에는 그날 있던 일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정황이 담긴 두 사람의 대화가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지금보다 목소리가 어린 느낌이 있었지만, 누가 들어도 차태철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그는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말하고 있는 여자를 조롱하며 협박하고 있었다.

여자는 상당히 힘들게 말을 이어갔다.

파일을 듣고 있는 고이지에게 그녀의 괴로운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파일을 끝까지 다 들은 고이지는 차오르는 분노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한참을 울고 있던 그녀는 모든 결정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다고 하여도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과거가 아니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묻을 수 없고, 묻혀서도 안 되는 진실이었다.

도저히 차태철을 용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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