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84화 (383/472)

384화. 악인의 최후

다음 날, 저녁-

고이지는 부모님과 함께 서울의 고급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빠, 엄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 차태철과 결혼은 물론이고 약혼식도 하지 않겠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전날 잔뜩 부은 눈으로 집에 들어온 고이지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부모님에게 차태철과 그 집안이 숨겼던 모든 사실을 공개했다.

기막힌 사실에 부모님은 당연히 분노했고, 입이 무거운 비서실장을 시켜 예전 차태철의 집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사람을 찾아 확인까지 마쳤다.

기함을 금치 못한 사실에 분개한 고이지의 부모님은 당장 변호사를 선임해 뻔뻔한 차태철과 그 집안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이를 갈았다.

‘아빠! 잠시만요.’

하지만 고이지가 이를 말렸다. 차태철과 그의 부모가 있는 자리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인간들을 왜 굳이 만나려고 하느냐는 부모님에게 고이지는 뻔뻔한 인간들이 절망하는 걸 직접 봐야 분이 풀릴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원래 함께 모여 저녁을 먹기로 한 약속을 깨지 않고 호텔로 온 것이다.

투명한 엘리베이터가 올라가자 고이지의 어머니가 표정 없는 딸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늘 밝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과 대조적인 딸의 모습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이지야, 너 정말 괜찮겠니?”

아버지 역시 딸을 걱정했다.

“괜히 너까지 무리할 필요 없어.”

“그래. 아빠랑 엄마가 만나고 갈 테니까 넌 그냥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아.”

“아니야. 내가 여길 어떤 심정으로 왔는데요. 이대로 돌아가면 억울해서 못 살아. 그리고 생각보다 괜찮으니까 두 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고이지는 씩씩한 표정으로 부모님과 함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아이고!”

직원 안내에 따라 조용한 룸으로 들어서자 평소처럼 차태촌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았다.

“사돈 어서 오세요. 안사돈과 우리 이지도 어서 와라.”

반가운 마음에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지만, 고이지의 부모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바로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

생전 처음 보는 싸늘한 반응에 차태촌과 부인, 차태철 모두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은 티를 내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퇴근 시간이다 보니 길이 막히네요. 오시는데 힘드셨죠?”

“그러게요. 오늘 이 자리에 오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하는지. 이거 원…….”

“사돈, 밖에서 뭔가 언짢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언짢은 일? 참나. 아까운 시간 낭비하기 싫으니까 본론부터 빨리 말하죠. 우리 이지, 그쪽 집안과 결혼하지 않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아버님?”

“아버님은 누가 네놈 아버님이야?”

놀란 아버지와 어머니 반응 뒤로 역시나 놀란 차태철이 고이지의 아버지를 불렀지만 불호령이 떨어질 뿐이었다.

“사돈어른, 정말 왜 그러십니까. 결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시는 건지…….”

“애들 장난? 그래! 당신 말 잘했어. 인륜지대사인 결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어디 감히 귀한 우리 딸을 범죄자 아들이랑 결혼시키려고 해? 어! 이거 아주 못된 인간들이야.”

“버, 범죄자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뭐야! 말이 지나쳐? 이게 진짜…….”

“아빠. 제가 말하게요.”

버럭 소리를 지르는 아빠를 말린 고이지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차 부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들 유현진 씨, 아시죠? 여기 있는 누구 때문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분이잖아요.”

“……!”

유현진이란 말에 맞은편에 앉은 세 사람의 얼굴 위로 당황스러움이 번졌다.

그중에서도 차태철의 표정이 가장 눈에 띄게 변했는데 그는 애써 침착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유, 유현진이라니? 우리는 처음 들어 보는……!”

“뭐! 이 새끼야?”

순간 화가 폭발한 고이지의 아버지가 컵 안에 담겨 있는 물을 차태촌의 얼굴에 뿌리며 욕을 쏟아냈다.

“처음 들어 봐?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어! 당신 아들이 저지른 건 범죄야! 범죄.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 어디 내 딸과 우리 집안을 농락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봐. 그게 가려지나.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 거야. 돈이 계급이고 권력이 아니라 있는 만큼 다른 사람들 도와주라고 있는 게 돈이야. 남들보다 돈 좀 있다고 그걸로 범죄자 자식 감싸고 한 가정을 박살 내? 짐승만도 못한 것들.”

“유, 유 회장님. 일단 고정하시고 제 말 좀 들어…….”

“듣긴 뭘 들어? 내 딸이 상처받았는데 듣긴 뭘 들어! 저놈도 당신들도 전부 다 쓰레기야.”

가만히 있던 고이지의 어머니가 참다 못하고 소리를 높이며 일어나며 차태철 어머니를 노려봤다.

“남편이랑 아들이 똥오줌 못 가리고 설치면 부인이라도 바로잡았어야지?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있더니 당신도 방관자야.”

“우리 가족을 속인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

차태철과 그의 가족에게 엄포를 놓은 고이지와 부모님은 그대로 룸을 나갔다.

“야! 이 자식아?”

그러자 차태철이 아들을 한심하게 노려보며 화를 냈다.

“너, 도대체 처신을 어떻게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설마 네가 떠들고 다닌 거야?”

“아닙니다.”

“또 술 처먹고 실수로 말한 거 아니냐고?”

“아니에요. 아버지. 그런 적 없어요. 이지는 제가 술 마시는 줄도 몰라요. 정말 몰라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대답한 차태철은 그대로 고이지를 쫓아 룸을 나갔다.

“이런. 젠장!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다가 왜 인제 와서 이런 일이 터지냐고! 어떤 쥐새끼를 입을 놀린 거냐고!”

쨍-

아들의 결혼으로 회사를 일으키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긴 차태촌은 컵을 집어 던지며 짜증을 냈다.

벽에 부딪힌 컵은 지금 차 회장 일가의 모습처럼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래도 김 변호사에게 전화해서 혹시라도 일이 크게 퍼지지 않게 막아야겠어. 그리고 오늘은 고 회장이 화가 많이 난 거 같으니까 그만 가고. 당신, 내일 나랑 고 회장댁 가서 사과하자고.”

“…….”

“왜 말이 없어? 당신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훗! 사과? 사과라니.”

넋 나간 사람처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던 차태촌의 부인이 실소를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남편에게 다가갔다.

드르륵-

“무슨 사과요? 우리 아들이 멀쩡한 남의 귀한 자식을 죽게 했는데 실수였으니 한 번만 봐 달라고 사과할까요? 아니면 그 집안이 우리 집 때문에 풍비박산 난 거를 사과할까요?”

“여…… 여보?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때! 우리는 태철이를 설득해서 자수시켰어야 했어. 당신의 삐뚤어진 욕심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우린 부모로서 자격이 없어. 난 당신이 원망스러워.”

“……!”

아내의 생전 처음 보는 모습에 놀란 차태촌은 말문이 막혔다.

“당신이 진짜 부모라면 이제라도 떳떳하게 바로잡아.”

김난이는 아들 때문에 평생 마음에 족쇄를 차고 살았다.

그동안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남편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른 척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늘 아들이 저지른 잘못이 공개되길 바랐다.

“당신이 그나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까 또다시 더러운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남편과 이혼을 결심한 김난이는 모른 걸 정리하고 다음 날 아들을 데리고 경찰서에 가기로 마음먹은 뒤 룸을 나갔다.

얼이 빠진 차태촌은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어디 있지?”

룸을 나온 차태철은 정신없는 사람처럼 호텔 주차장까지 내려와 고이지를 찾았다.

“이지야? 이지야!”

이쪽, 저쪽 고개를 돌리던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차를 타려고 하는 고이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자, 잠시만……. 나 꼭 할 말이 있어. 잠깐이면 돼.”

아주 절실한 차태철의 모습을 보고 있던 고이지는 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부모님은 저딴 놈이랑 말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다.

“부모님이 기다리셔서 오래 못 있어. 할 말이 뭔데?”

“미, 미안해. 이지야.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미안? 나한테 뭐가 미안한데?”

그녀를 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못해 처절함까지 느껴지는 차태철과 달리 고이지의 표정은 싸늘했다.

“다. 전부 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널 속이고 너희 부모님을 속여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이지야, 뭔가 오해가 있어.”

“뭐?! 오해?”

“네가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거 사실 아니야. 뭔가 잘못 전달된 부분도 있어. 그, 그냥 젊은 남녀가 만났다가 헤어지고…….”

“너! 양심이란 게 아예 없구나? 사람이 어떻게 이래? 하긴. 넌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거야.”

차태철이 과거 일을 인정한 뒤 진심으로 사과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기대했던 고이지는 기가 막혔다.

더 이상 그녀의 마음과 눈빛에는 차태철이란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라고? 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그럼! 너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그 사람이랑 가족들은 뭔데? 네가 어떤 인간인지 전부 기억나게 해 줘?”

분개한 고이지는 핸드폰에 있던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내가 너한테 한 짓을 폭로하겠다고? 네가 무슨 힘이 있는데? 누가 네 말이나 들어 줄 거 같아? 반반한 얼굴 때문에 예뻐해 줬더니 기어오르기나 하고 너 그러다 진짜 다친다. 입 닫고 얌전히 살아.

-차, 차태철……. 내가 죽어서라도 너 가만두지 않게 할 거야. 언젠가는 온 세상에 네가 한 짓 다 공개할 거라고.

-할 수 있으면 어디 해 봐!

그러자 조롱하는 자신의 목소리와 겁에 질린 유현진의 목소리가 차례로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차태철은 동공이 팽창하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아니야! 시……실수였어. 어린 마음에…… 그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쫙-

헛소리가 계속되던 그 순간 참다못한 고이지가 온 힘을 실어 차태철의 싸대기를 날렸다.

“개소리 집어치워. 너! 내가 그 여자랑 닮아서 나 좋아한 거지?”

“……!”

“역겨운 새끼! 앞으로 그분께 속죄하면서 평생 감옥에서 보낼 생각해.”

고이지가 자리를 떠나고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던 차태철은 호텔 바로 들어가 술을 진탕 마시고 거리를 배회했다.

사실 유혁진 동생이 세상을 떠나고, 차태철은 그날 이후 술이 없으면 잠을 쉽게 들지 못했다. 하다못해 한 모금이라도 마셔야 악몽을 꾸지 않았다.

술을 꽤 마셨지만, 평소와 달리 전혀 취하지 않은 그는 편의점에 들어가 소주를 샀다.

“저, 손님 잔돈 가져가셔야죠.”

“필요 없어.”

오만 원을 카운터에 던진 그는 다량의 신경 안정제와 소주 한 병을 그대로 들이켠 뒤 밖으로 나왔다.

“시발! 나한테 왜 그래!!”

차태철은 거리를 걸어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그러는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피해 갔다.

“이미 지난 일이잖아! 이제야 나도 좀 행복하게 살겠다는데 왜 이러냐고! 이, 이지야?”

인파들 속에서 소리를 지르던 차태철은 어느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미친 듯이 쫓아가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내가 잘못했어. 이지야? 이지야!”

술에 취한 그는 다른 여자를 보고 고이지로 착각한 것이다.

“뭐예요?”

“이지야, 내가 이렇게 빌게. 나 버리지 마. 잘못했어. 이미 지난 일이잖아?”

“이봐! 당신 뭐야?”

깜짝 놀란 여자와 함께 있는 남자 일행이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차태철을 두 손을 싹싹 빌며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차태철은 자주 유현진의 꿈을 꾸며 괴로움에 시달렸다.

“나도 평생 괴로웠다고! 나도 괴로웠……! 하!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고이지로 보이던 여자의 얼굴에서 순간 유현진의 얼굴이 떠오른 차태철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식겁했다.

“나! 아니야! 네가 한 선택이잖아!”

“술 취했으면 시비 걸지 말고 집에나 가요.”

“오빠, 저런 사람 상대하지 말고 그냥 가자.”

이미 여자와 남자는 가던 길을 간 상태였지만, 차태철은 정말 누가 있는 것처럼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내가 죽으라고 한 게 아니잖아! 내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패닉에 빠진 사람처럼 얼이 빠진 차태철은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다만 그는 자기가 차도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이 꼴이 되니까 속 시원하냐! 이제 시원해?”

“어! 저 사람, 위험하게 왜 저래?”

“이봐요? 이쪽으로 와요.”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소리쳤지만, 차태철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너 같은 거 때문에 내가 감옥 갈 거 같아!”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계속 안쪽으로 뒷걸음질 치던 그는 별안간 고개를 돌려 도망가려는 듯 차도로 뛰어들었다.

“보란 듯이 더 잘 살 거야. 절대 안 가! 절대……!”

쾅-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주행 중이던 차에 받힌 차태철은 공중에 붕 떠오른 뒤 그대로 아스팔트 바닥 위로 떨어졌다.

“어머, 세상에! 사람이 치었어요.”

“아까 소리 지르더니 술 먹고 뛰어들었나 보네.”

붉은 피가 가득한 바닥 위에서 차태철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으며 그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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