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85화 (384/472)

385화. 마지막 인사

다음 날-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수 쌤.”

출근한 임정숙 간호사가 접수처 직원들과 인사 후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사이 태경이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아니, 설마 지금 출근한 거예요?”

“네. 지금 출근한 거 맞아요.”

“왜요?”

당직이 아닌 이상 우리 병원 직원들의 출근 시간은 오후였다. 그런데 당직도 아닌 임정숙 간호사가 일찍 나와 일할 준비를 마치자 태경의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본 것이다.

“임 선생님 오늘 당직 아니잖아요?”

“아니죠.”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이게 참 며칠밖에 안 됐는데 사람 마음이 참 희한해요. 그새 정이 들었는지…….”

“유혁진 환자요?”

“네.”

오늘은 그동안 입원해 있던 유혁진이 퇴원하는 날이다.

임정숙 간호사는 점심쯤 다시 교도소로 출발하는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그냥 단순하게 도주하려 했던 탈옥범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병원 직원 중 소수만 알고 있는 그의 사정을 임정숙도 알았기에 무서운 범죄자라는 타이틀보다 안타까운 재소자라는 생각이 더 커졌다.

그래서 따뜻한 인사 한마디라도 전하기 위해 일찍 왔다.

“애들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서 쉬는데 이상하게 빨리 오고 싶더라고요. 아무래도 안 되겠기에 엄마한테 일찍 간다고 말하고 나왔어요.”

“우리 임 선생님, 참 정이 많은 사람인 거 아세요?”

“무슨 말씀이세요. 원장님만 하려고요. 전 아직 멀었죠. 그리고 유혁진 환자 가장 신경 쓴 사람도 원장님이시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당직 상관없이 병원 붙박이로 진료하는 태경 역시 유혁진이 입원해 있는 기간 동안 평소보다 더 신경 쓰느라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병원을 비우지 않았다.

“오늘 퇴원인데 유혁진 환자는 어때요? 병원에 더 있고 싶다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전혀요. 빨리 교도소로 돌아가고 싶대요.”

“아니, 왜요?”

“햇볕 쐬면서 걷고 싶대요. 24시간 수갑 차면서 거의 병실에만 있으니까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닐 거예요.”

“하긴 그러네요. 사람이 몸을 자유롭게 움직여야 하는데 여기서는 제약이 따르니까 그것도 참 고충일 거예요.”

“그렇죠.”

-이번에는 사건 사고 소식입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 가던 사이 접수처 직원이 대기실 TV를 켜자 뉴스 소리가 들려왔다.

-간밤에 사건, 사고가 몇 건 있었는데요, 먼저 삼토그룹 차태촌 회장의 아들인 차태철 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뉴스 앵커 소리에 대화하고 있던 태경이 놀라며 TV 앞으로 걸어갔다.

-어제, 저녁 차태철 씨가 술에 취해 차도로 뛰어들다 주행 중이던 차량에 숨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주변 CCTV 영상과 당시 현장에 있던 시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차태철 씨는 갑자기 돌발적으로 차도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망한 차 씨가 오래전 범죄를 은닉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면서 파장을 주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주신융 기자가 전해드리겠습니다.

‘차태철이 죽었다고?’

깜짝 놀란 소식에 어떻게 된 일인가 태경이 생각하던 그때, 의진이 정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선배?”

두 사람은 태경의 진료실로 자리를 옮겼다.

“방금 저 뉴스 소식 맞아? 차태철이 정말 사망한 거야?”

“네, 맞아요. 모두 사실이에요.”

아침잠이 가시기도 전에 고이지에게 연락받은 의진은 서둘러 그녀를 만나러 나갔다.

후배와 만난 자리에서 어젯밤 있던 모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고이지에게 부탁받은 게 있어 출근을 서둘렀다.

“고이지 씨는 좀 괜찮아?”

“안 그래도 계속 연락이 안 돼서 걱정됐는데 보니까 괜찮은 거 같아 한시름 놨어요. 이지가 생각보다 씩씩하더라고요.”

고이지는 차태철이 보여 준 마지막 모습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여운을 털어 버릴 수 있었다고 전했다.

모든 잘못을 바로잡고 자기가 저지른 일에 처벌받겠다고 했다면 고이지는 오히려 흔들렸을 것 같다고 전했다.

하지만 과거 일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감추려는 모습에 눈곱만큼 남아 있던 마음마저 지울 수 있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도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지만, 크게 슬프지도 않았다고 전했다.

“이지는 머리도 식힐 겸 미국 언니네 집에 당분간 머문다고 공항으로 갔어요.”

“여기 있으면 한동안 계속 소식이 들릴 텐데 그게 낫겠네. 그나저나 사건을 일으킨 피의자가 사망했으니 사건은 종결되겠어.”

“네, 다만, 차태촌 회장은 다른 사건으로 경찰 조사가 진행될 거 같다고 들었어요.”

“그 사람도 문제가 많은 사람이네.”

“이지 말로는 회사 경영에 관한 비리 문제인데, 차 회장의 부인이 경찰서에 찾아가 직접 제보했다고 했어요.”

“그래? 그게 쉬운 일이 아닌데 대단한 결정을 했네.”

“그리고 이거, 이지가 부탁한 거예요.”

“부탁?”

“네, 꼭 좀 전달해 달라고 했어요.”

의진과 한참 동안 대화를 이어 가던 태경은 작은 봉투를 건네받은 뒤, 유혁진의 병실로 올라갔다.

드르륵-

“교도관님, 정말 죄송하지만 유혁진 환자와 둘이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교도관들이 수갑을 확인한 뒤 병실 밖으로 나가자 태경은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그리고 뉴스 전문 채널을 몇 군데 확인하더니 차태철 소식이 나오는 채널에 소리를 높였다.

“죽었다고요?”

차태철의 사망 소식과 함께 그가 저지른 과거 만행까지 뉴스에서 나오자 유혁진은 놀란 동시에 어리둥절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원장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나와 정 선생에게 들은 말을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약혼녀가 공개했고, 아마 그 충격으로 거리를 배회하다 술에 취해 사고가 난 거 같아요. 그리고 차 회장은 회사 문제랑 이것저것 다른 일로 고소당해서 시끄러운 상태라고 했어요.”

“하!”

태경은 의진에게 들은 모든 이야기와 돌아가는 상황에 관해 전부 말했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유혁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원장님, 제가 지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뭐랄까 어이가 없습니다.”

차태철을 마음으로 죽이고 또 죽였지만, 유혁진은 실제로 그가 죽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과거의 죄를 인정하고 그에 따른 법의 심판을 받기 바랐다.

“참!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이네요.”

“그러게요. 그리고 안타깝지만 차태철의 사망으로 사건 조사는 힘들 거 같아요.”

“이런 경우 공소권 없음으로 더 이상 수사 진행을 하지 않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태철의 예전 일을 언론에서 어떻게 알았을까요? 혹시 그 여자분이 알린 건가요?”

“아니요. 정 선생 후배가 알린 게 아니라 차태철 어머니가 알렸어요.”

“사, 사모님이요?”

차 회장의 부인은 남편의 잘못뿐만 아니라 아들이 한 짓도 경찰에게 모두 고백했다.

그렇게 모든 사실을 고백한 뒤 집으로 돌아오다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병원으로 달려가 차태철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남편과 장례식도 없이 오전에 아들을 화장했다.

조용히 장례 치른 뒤, 남편과 함께 유혁진 동생과 부모님의 봉안당을 찾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고인에게도 사과를 전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김난이 또한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못난 자식을 둔 죄와 자식이 차마 하지 못한 사과를 하고 싶었기에 이혼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부탁해 함께 찾아갔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사람인데……. 사모님이 왜? 왜 인제 와서 그런 결정을 했을까요?”

“글쎄요.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서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도 양심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내가 했던 말 다시 생각해 봤어요.”

“그 말씀이라면 여전히 괜찮습니다.”

태경은 일전에 재심을 거절했던 유혁진에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그의 대답은 여전했다.

굳이 형량을 줄이기 위해 재심을 하기보다는 열심히 해서 모범수로 나오겠다고 했다.

“전 누구처럼 비겁하기는 싫습니다. 제가 사람을 죽인 건 분명하고 그 죗값은 떳떳하게 다 받고 나오고 싶어요.”

“알았어요. 유혁진 환자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대신 정말 도움이 필요하면 그땐 언제라도 나한테 연락해요.”

“네, 원장님.”

“나, 유혁진 환자한테 줄 게 있어요.”

“저한테요?”

“네. 이거, 받아요.”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유혁진을 향해 태경은 가운 주머니에서 편지 봉투를 건넸다.

“이게 뭔데요?”

“차태철 어머니가 유혁진 환자에게 남긴 편지예요.”

“이걸 왜……?”

“그건 편지 안에 있지 않을까요? 이만 가 볼게요.”

드르륵-

태경이 병실을 나가고 밖에 있던 교도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웬 편지야?”

“뭐야, 설마 원장님께서 준 편지야?”

“오늘 퇴원하니까 주신 건가? 하여간 참 대단한 사람이야.”

교도관들은 편지를 보고 태경이 준 거라고 생각하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들고 있던 편지를 멍하니 보고 있던 유현진은 천천히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내 읽었다.

-유혁진 씨, 안녕하셨어요. 저 김난이입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떤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편지지를 꺼내 놓고 한참을 고민했어요.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쓴 건, 유혁진 씨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고 또 너무 늦어서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안 믿겠지만, 지난날 동안 단 하루라도 편한 날이 없었어요.

내 아들, 태철이가 저지른 일을 저도 남편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라는 이유도 내 자식이라는 이유로 잘못된 판단으로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태철이의 손을 잡고 경찰서까지 가는 생각을 하고 또 했지만,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났고 저도 겁이 났어요.

정말 죄송해요. 부모로서 엄마로서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내 자식 때문에 삶이 고통이었을 모든 가족분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합니다.

전 이번에 태철이의 결혼이 어그러지면서 죄를 숨기고 살 수는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라도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반성하며 모든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훗날, 유혁진 씨를 직접 찾아뵙고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약속드릴게요.

조금이나마 유혁진 씨의 마음이 편해졌으면 좋겠어요. 항상 건강하길 바랄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하!”

편지를 읽은 유혁진은 다른 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거 같았다.

김난이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편지의 주인공이 차태철이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동생아, 보고 있니?’

유혁진은 창밖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동생을 떠올렸다.

‘이제는 너도 마음이 편했으면 좋겠어. 거기서 편히 지내고 오빠도 이제 열심히 살아 볼 테니까 지켜봐 줘.’

그 후, 유혁진은 김난이의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왜? 원장님이 편지에 잔소리라도 하신 거야?”

“네?”

“편지 읽은 모습이 하도 진지하길래 물어봤어.”

“아, 네. 원장님이 열심히 살라고 그러시네요.”

“당연히 그래야지.”

“맞는 말씀 하셨네.”

그 뒤, 다른 환자보다 조금 일찍 점심을 먹은 유혁진은 마지막 진료를 보고 교도관들과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병원 안에서 임정숙 간호사와 의진과 미리 인사를 나누었기에 주차장에는 태경만 나와 있었다.

“원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애 많이 쓰셨어요.”

“아닙니다. 저보다 우리 교도관님들이 고생하셨죠. 여러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네요.”

“그럼요. 다 원장님 덕분입니다. 이봐! 자네 아까부터 정말 이럴 거야?”

교도관이 땅만 쳐다보고 있는 유혁진의 수갑 찬 팔을 툭 치며 말했다.

“제가 뭘요.”

“뭐긴! 자네 병실에서 주차장 내려올 때까지 풀칠한 것처럼 입을 꾹 닫고 있잖아.”

“원장님께 인사 안 할 거냐고?”

“저기 원장님. 그거 아직 갖고 계십니까?”

교도관들의 재촉에 머뭇거리던 유혁진이 입을 열었다.

“그거?”

“저번에 제가 이름이랑 사인했던…….”

“당연하죠. 잊어버리지 않게 늘 갖고 다닙니다.”

태경은 세 가진 조건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유혁진의 사인이 담긴 쪽지를 꺼내 보였다.

“그거 잠깐 저 좀 주실 수 있으세요?”

“이거요? 설마 찢으려는 건 아니죠?”

“원장님도 참! 설마요. 그런 거 아닙니다.”

“자요.”

쪽지를 받은 유혁진은 교도관에게 볼펜을 빌려 빠르게 뭔가를 써 내려간 뒤 태경에게 다시 돌려줬다.

“됐습니다.”

“뭘 쓴 거예요?”

“이름이랑 사인 지웠습니다.”

“유혁진 씨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꼭 지켜요.”

“글쎄요. 전, 그만 가 보겠습니다. 원장님. 살려 주시고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유혁진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모든 마음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전한 뒤, 웃는 얼굴로 차에 올랐다.

태경은 유혁진이 탄 차량이 주차장을 완전히 벗어나자 발길을 돌리며 쪽지를 펼쳐봤다.

-원장님, 저 꼭 모범수로 나올 수 있게 노력할 테니까 원장님도 저 받아 주는 곳 없으면 그땐 빵집 약속 지켜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어디 가지 마시고 지금처럼 우리 병원에서 도움이 필요한 아픈 환자를 위해 힘써 주세요. 항상 건강하십쇼.

쪽지를 본 태경은 얼굴 위로 미소를 보이며 병원으로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