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사표
유혁진을 보낸 태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진료실과 응급실을 오가며 환자를 진료했다.
긴장감이 느껴지던 우리 병원도 다시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출근할 걸 그랬나?”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고 의국실로 온 이찬희는 자료를 보고 있는 최모나에게 물었다.
“유혁진 환자 가는 거 못 봐서?”
“응. 퇴원할 때 인사하고 싶었거든.”
“왜? 주로 선생님이 전담하셔서 우린 거의 보지도 못했잖아?”
“그거야 그렇지. 내가 수술에 참여했던 환자라 그런 것도 있고 뭔가 그 환자 말이야. 뭐랄까……. 처음 봤을 때 눈빛이 좀 슬퍼 보였거든.”
“그래서 힘내라는 말이라도 하려고 했어?”
“역시, 우리 개모나. 내 마음을 너무 잘 알아. 예뻐라.”
“어허! 그러다 혼난다. 여기 병원 안이야. 손 치워라.”
이찬희가 여자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자 최모나가 의국실 밖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네, 개모나 님! 냉큼 치웠습니다.”
“그런데 이 선생이 안 해도 파이팅 넘치게 응원 많이 받았을 거야.”
“누구한테?”
“누군긴 누구야. 선생님이지. 이 선생이 느낄 정도면 선생님도 당연히 그런 생각 하시지 않겠어? 안 그래도 평소 환자에게 파이팅 넘치는 분이잖아.”
“그렇지. 우리 선생님이라면 넘치게 하고도 남지.”
“맞다! 이 쌤, 너 그건 어떻게 됐어?”
“뭐가 어떻게 돼?”
“어어! 반응이 왜 이래? 너, 수상하다.”
노트북 모니터를 보며 간이식 자료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최모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이찬희를 노려봤다.
“수상하다니 뭐가?”
“진짜로 5억 당첨되고 모른 척하는 건 아니지?”
“5억이라니 갑자……! 맞다. 복권! 내 복권.”
이찬희는 얼마 전, 변비 환자의 변을 직접 파내다가 변을 뒤집어쓰고 복권을 샀었다. 일단 그림 두 개는 일치했기에 당첨은 확실했는데 금액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동안 유혁진 일로 정신없었기에 까맣게 잊고 있던 복권이 이제야 생각났다.
“생각도 못 하고 있었네. 내 복권 어디 있니? 복권아…….”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여기!”
책상 이곳저곳을 뒤지던 이찬희는 서랍 안에 있던 복권을 꺼내 보였다.
“찾았다! 일등! 도와주세요.”
복권을 들고 있는 손을 높이 든 이찬희는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속삭였다.
“저, 정말 지금까지 열심히 다른 사람들 피해 안 주고 나름 착하게 살았습니다. 1등 당첨되게 해 주세요. 1등 당첨돼서 서울에 내 집 하나 장만하게 해 주시면 정말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장가가고 싶습니다. 1등 주세요.”
“아니야. 5억으로 서울에서 집 못 사.”
“아! 쫌. 개모나 제발. 내가 1등 되면 너 원하는 건 다 해 줄게. 같이 좀 빌어 주라.”
“원하는 거? 정말?”
“당연하지.”
“우, 우……리 이 선생 당첨되게 해 주세요.”
이찬희의 말에 최모나도 복권이 당첨되길 빌었다.
“오케이, 그럼 나, 갔다 올게.”
“어딜? 복권 안 긁어?”
“저번에 선생님이 긁다가 말았으니까 이번에도 마저 긁으셔야지. 간다.”
“하여간. 유난은. 괜히 선생님께 혼나지 말고. 난 응급실 들어간다.”
“아! 잠깐.”
“뭐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밖에 아무도 없어요. 간다.”
의국실 문까지 갔던 이찬희는 다시 돌아와 최모나 볼에 입을 맞춘 뒤 태경에게 향했다.
똑똑-
“선생님?”
“어, 이 선생 들어와.”
“바쁘세요?”
진료실에 들어온 이찬희는 과하게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괜찮아. 그 부담스러운 표정을 보니까 뭔가 부탁이 있나 본데……. 뭐야?”
“역시! 선생님은 촉이 좋으십니다. 이거 좀마저 긁어 주십사 하고 왔습니다.”
“복권? 이거 아직도 안 긁었어?”
“네.”
“이 선생이 긁으면 되잖아?”
“그때 선생님이 긁으셨으니까 끝까지 해 주셔야죠. 중간에 긁는 사람이 바뀌면 안 되거든요.”
“그래, 알았다. 동전?”
“여기 있습니다.”
계속 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는 태경은 빨리 복권을 긁었다.
“대박!”
그리고 잠시 뒤, 감격에 겨운 이찬희가 격한 목소리가 진료실에 울렸다.
“당첨됐어! 선생님 저 당첨됐어요.”
“그렇게 좋아?”
“그럼요. 무려 백만 원이나 당첨됐는데 좋죠.”
당첨금액은 백만 원이었지만, 1등을 외치던 이찬희는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5억 노렸던 거 아니었어?”
“노렸던 건 맞지만 워낙 큰 액수라 기대는 안 했어요. 백만 원이 현실적이고 좋은데요. 이게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오늘 간식과 야식은 제가 책임집니다. 하하하!”
기분이 한껏 좋아진 이찬희가 진료실 문을 열자 그 앞에 오창규가 서 있었다.
“아! 깜짝아.”
“죄송해요. 들어가려던 참인데 문이 갑자기 열릴 줄 몰랐어요.”
진료실로 들어오려던 오창규는 갑자기 튀어나온 이찬희를 보며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별말씀을. 그보다 오 쌤, 나 복권 당첨됐어요. 그것도 백만 원이나.”
“정말요?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내가 이따 진짜 비싼 고급 커피 사 줄게요.”
“아, 감사합니다.”
“여러분 저 복권 당첨됐습니다!!”
“정말?”
“얼마예요?”
“무려 백만 원입니다.”
복도를 지나며 소리치는 이찬희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오창규가 진료실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이찬희 선생은 참 에너지가 좋아요. 그렇죠?”
“네, 원장님.”
“오 선생 왜 퇴근 안 했어요? 어제 당직했잖아?”
당직자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근무복을 입고 있는 오창규를 보며 태경이 물었다.
“그게…… 원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누가 보면 벌 받는 줄 알겠네.”
“네?!”
“오 선생 말이에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시선을 바닥을 보고 서 있는 모습이 꼭 벌서는 사람 같잖아요. 일단 앉아요.”
“아, 네.”
딱 봐도 표정이 좋지 않은 오창규는 여전히 고개를 내린 채 태경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차 마실래요? 아니면 음료수?”
“아니요. 괜찮습니다.”
“얼굴 보니까 할 말 있어서 찾아온 거 같은데 말해 봐요.”
“왜…….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하세요. 저한테 할 말 없으세요?”
“내가 뭐 할 말 있다고 했었나? 글쎄. 난 오 선생한테 따로 할 말이 없는데.”
“이거…….”
오창규는 할 말이 없다는 태경에게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흰 봉투를 내밀었다.
“너무 뻔한데……. 이건 물어보나 마나 당연히 사표겠죠?”
“네, 원장님. 사표 맞습니다.”
사실 오창규는 태경이 일을 그만두라는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자 직접 사표를 전하러 왔다.
“형님 일도 다 해결됐고 제가 더 이상 여기서 일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요.”
“왜요?”
“죄송해서요. 제가 일하고 싶어서 들어온 것도 아니었고 여러 가지 폐를 끼친 거 같아 너무 죄송해서요.”
“그래요? 그런데 오 선생은 여기서 일하는 동안 싫었어요?”
“아니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바닥을 보고 있던 오창규는 은연중에 본심이 튀어나온 듯 고개를 들고 강하게 말했다.
“형님을 도와주려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우리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즐겁게 일했습니다. 환자분들도 직원들도 다들 좋고 여기서 일하는 게 정말 좋았어요. 저도 이 일이 저랑 이렇게 잘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단 한 순간도 가식적으로 일한 적은 없었습니다.”
“오 선생이 어떤 마음으로 일했는지 나도 알아요. 이거 사표라고 했죠?”
“네. 원장님.”
찌익-
“……!”
태경은 갑자기 책상 위에 있는 사표를 찢었다. 그 모습을 본 오창규는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쳐다봤다.
“왜, 드라마 보면 상관이 실수한 후배가 쓴 사표를 멋지게 찢으면서 회사 못 나가게 잡잖아요. 나 지금 그거 하는 거예요.”
“워, 원장님 아무 그래도 제가 어떻게…….”
“오 선생?”
“……네?”
“오 선생이 보기에 병원 책임자로서 내가 일 잘하는 거로 보여요?”
“그럼요. 저뿐만 아니라 수간호사 선생님도 그렇고 다른 선생님들 전부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일을 잘할 수 있는 건 나를 잘 서포트해 주는 직원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중에는 오 선생도 포함이고.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우리 병원에서 함께 일해요.”
태경은 잘못은 뉘우치고 반성하는 오창규를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가 잘못한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잘못이 악의를 갖고 한 행동이 아니고 누군가를 돕기 위한 선택이었기에 그 잘못을 덮기로 했다.
“대답 안 해요? 내가 하나만 물어볼게요. 우리병원에서 일하기 싫어서 그래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그럼 계속 일하는 거로 합시다. 알았죠?”
“네, 원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걱정하시는 일 없이 더 열심히 일할게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다만 오 선생이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아 뒀으면 하는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이제 오창규 선생 본인의 삶을 살아요. 주변에 오지랖도 좀 그만 부리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
“예, 알겠습니다.”
“그럼 얼른 퇴근하고 내일 봐요.”
“정말 고맙습니다. 원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오창규가 진료실을 나가자 태경은 책상 위에 찢어 놓은 사표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혼잣말했다.
“아, 좀 더 멋있게 찢을걸. 아쉽네.”
* * *
여울동 사거리-
“하아! 하아!”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 여자가 숫자가 줄어드는 횡단보도를 미친 듯이 뛰어가고 있었다.
마치 누구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던 여자는 우리병원 정문이 보이자 더 빠르게 뛰어갔다.
“실례지만 말 좀 물어볼게요.”
여자는 정문 앞에 서 있는 장득칠에게 다가왔다.
“네, 말씀하세요.”
“지금 진료 보려면 오래 기다려야 할까요? 여기 원장님 진료를 보려고 하거든요.”
“원장님이요? 아니요. 지금 접수하시면 외래는 오래 기다리실 거 같지는 않은데요.”
장득칠은 대기실을 쳐다본 뒤 다시 여자에게 답했다.
“아직 분비는 시간대가 아니라 서요. 앞에 두 분 계시네요.”
“네, 감사합니다.”
빠르게 대화를 마친 여자는 접수처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우리 병원 처음이신가요?”
“네, 처음이에요. 진료 보려고요.”
“여기, 성함이랑 생년월일 적어 주시고요. 어디가 불편하셔서 오셨어요?”
“그게…….”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다리요. 다리가 좀 불편해서요.”
접수처 직원과 대화하면서도 여자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다리요. 알겠습니다. 앉아 계시면 성함 불러 드릴게요.”
“진료까지 오래 걸릴까요?”
“아니요. 갑자기 응급 환자가 오지 않는 이상 오래 걸리지는 않아요.”
“네, 감사합니다.”
접수를 마친 여자는 자기 이름이 빨리 호명되길 바라면서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때때로 핸드폰을 확인하며 정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여자는 진료실 쪽에 시선을 고정하며 빨리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10분 지나자 여자가 전보다 더 초조한 표정으로 정문을 보던 그때였다.
Rrrrrrrrrr
탁-
“……!”
별안간 울리는 벨 소리에 놀라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여자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화면 위에 뜬 ‘시어머니’란 단어를 보며 거의 기겁하는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저기요. 핸드폰 떨어졌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근처에 앉아 있던 사람이 핸드폰을 들어 여자에게 건네자 그녀는 그제야 부랴부랴 핸드폰을 챙겼다.
“네, 어머니. 저예요.”
작은 목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핸드폰을 받은 여자는 급하게 밖으로 나가 통화를 이어 갔다.
-그래. 어디니?
“가는 길에 화장실이 급해서 잠깐 화장실에 왔어요. 그럼요. 네, 바로 갈게요.”
상당히 조심스럽게 통화한 여자는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 접수처 직원에게 다가갔다.
“아까 접수한 사람인데요. 제가 일이 있어서 진료 안 보고 그냥 갈게요.”
“진료 안 보신다고요?”
“네, 죄송합니다.”
“다리가 불편해서 오셨는데 진료 안 보셔도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그럼 수고하세요.”
접수처 직원보다 더 아쉬운 듯한 여자는 인사를 한 뒤 병원에 왔을 때처럼 급하게 뛰어 병원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