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87화 (386/472)

387화. 택시 기사와 손님

철컥-

“원장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진료를 마친 태경은 거동이 살짝 불편한 노인을 부축하며 진료실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제가 감사하죠. 그런데 오늘은 왜 혼자 오셨어요?”

“우리 손주 녀석이 요즘 데이트하느라 바빠요. 대학 가서 여자 친구 안 생긴다고 투덜거리더니 요즘 여자 친구가 생겼거든요. 아주 얼굴이 활짝 피었습니다.”

“흐뭇하신가 봐요.”

“그럼요. 할멈이랑 연애 때 생각도 나고 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그나저나 혼자 오시기 힘들지 않으셨어요?”

“힘들긴요. 집이랑 가깝고 걸어가면서 햇볕도 쐬고 좋아요. 사람이고 식물이고 햇볕을 받아야 건강하잖아요.”

“맞습니다. 어르신.”

“원장님. 바쁘신데 그만 들어가세요.”

“제가 저 앞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아니고, 일 없어요. 그러지 말고 얼른 일 보세요.”

태경이 정문까지 부축하려 하자 노인이 손사래를 치며 진료비 계산을 마치고 혼자 병원을 나갔다.

“훈이 할아버지 왜 혼자 가려는 지 모르시죠?”

함께 있던 임정숙 간호사가 태경에게 물었다.

“이유가 있어요?”

“원장님이 배웅해 주다가 다른 어르신들이 보면 질투해서 원장님 피곤해지실까 봐 그래요.”

“정말요? 에이, 설마요.”

“정말이에요. 우리 병원 오는 어르신들끼리 노인정도 같고 친한 분들이 몇 분 계신데, 원장님이 한 분에게만 친절하면 다른 분들이 엄청 서운해하신대요.”

“그건 또 몰랐네요. 가만 보면 어르신들이 참 귀여우세요.”

“원래 나이 들면 애가 된다고 하잖아요.”

“정말 그런 거 같아요. 다음 외래 환자는 아직 없죠?”

“네, 없어요.”

“그럼 저 자료 좀 보고 있을게요. 환자 오면 콜해 주세요.”

“네.”

“원장님.”

태경이 진료실로 막 들어가려는 사이 사무실에서 나온 최 팀장이 불러 세웠다.

“네, 팀장님.”

“업체에서 게시판 시안 보내 왔는데 한 번 봐 주십사 해서요.”

“네.”

최 팀장이 내민 A4 종이는 대기실 한쪽 벽면에 병원 정보를 제공하는 오래된 판넬의 새로운 디자인 시안이었다.

“요즘 병원 인테리어 대세가 밝은 브라운에 나뭇결이 살아 있는 느낌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래요. 괜찮네요. 이렇게 진행하죠. 비용은 너무 오버되지 않게 팀장님이 잘 조율해 주세요.”

“처음 견적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으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

“원장님?”

“아, 네. 그렇게 하세요.”

최 팀장과 대화하며 걸음을 옮기던 태경이 별안간 미간을 좁혔다.

‘뭐지?’

대기실 의자 밑에 떨어진 책을 발견하고 줍기 위해 그쪽으로 간 순간 다섯 번째 바이탈이 느껴진 것이다.

‘이상한데…….’

정말 뭔가 이상했다. 그동안 익숙하던 바이탈 양상과 좀 달랐다.

보통 태경이 느끼는 다섯 번째 바이탈은 아픈 사람에게서 직접 적으로 그 냄새가 나는 경우다.

다섯 번째 바이탈이 느껴지면 그곳에 냄새를 풍기는 환자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이 그랬다.

그 때문에 태경은 응급실이든 밖에서든 위급한 환자가 근처에 있으면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냄새를 따라서 환자에게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환자가 없는 대기실 그것도 특정 위치에서만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것도 가벼운 증상을 나타내는 1, 2단계가 아니라 포르말린 냄새인 4단계로, 냄새만 놓고 따져 봤을 때 이 냄새를 풍기는 사람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럴 수도 있는 건가?’

그런데 진짜 이상한 건 이 부분이었다. 포르말린 냄새의 강도가 너무 약한 것이다.

보통 4단계인 포르말린 냄새는 냄새 자체가 강하기 때문에 이렇게 순하게 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냄새 강도가 약해지려면 3단계, 2단계 이런 식으로 단계별로 약해져야 하는데, 4단계인 포르말린 냄새를 유지한 채 이렇게 약한 냄새를 느낀 건 처음이었다.

냄새가 미약해 어느 방향으로 이동했는지조차 알기 힘든 수준이었다.

“…….”

태경은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생각에 잠겼다.

‘병동?’

잠시 병동 환자가 내려왔다 올라간 건가 싶었지만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병동에 있는 환자라면 냄새가 강해 모를 리가 없었다.

‘이게 어떤 경우지? 이거 찜찜한데…….’

태경은 응급실과 외래까지 오늘 진료한 환자를 차례대로 기억하며 뭔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답답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찜찜한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태경이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이유는 다섯 번째 바이탈이 4단계인 포르말린이기 때문이다.

4단계면 암이나 그에 준하는 병이기 때문에 최대한 빠른 대처가 필요했다. 게다가 길 가다 느낀 냄새도 아니었고 병원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만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걱정스러웠다.

골똘히 생각하던 머릿속으로 뭔가 스쳤다.

-원장님, 외래 진료 취소됐습니다.

조금 전, 진료실에서 접수처 직원이 남긴 취소된 외래 환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맞아! 혹시 그 환자와 관련 있지 않을까?’

태경은 곧장 접수처로 향했다.

“혹시 저 자리에 누가 앉았었는지 기억해요?”

답답함을 참지 못한 태경이 CCTV를 확인하기 위해 보안실로 가기 전 혹시나 한 마음에 접수처 직원들에게 물어봤다.

“언니, 저 자리에 앉은 사람 기억해요?”

“아! 그 사람이네.”

당연히 모를 거라 생각했던 거와 달리 직원이 알고 있었다.

“그 왜 아까 급하게 들어와서 진료 본다고 접수했다가 그냥 가신 분.”

“아, 맞다! 처음 본 여자분이셨는데 다리가 불편하다고 진료 본다고 했다가 죄송하다고 그냥 갔어요.”

환자들이 붐빌 시간이나 대기실에 사람이 많았다면 기억을 못 했겠지만, 외래 환자가 몇 명 없었기에 직원들은 어렵지 않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분 뭔가 불안한 표정이었어요.”

“그 사람이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고요?”

“네, 원장님.”

‘다리? 다리라고?’

태경은 다리에 난 병명으로 4단계까지 갈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려 했지만, 워낙 많았기에 쉽지 않았다.

“혹시 그 사람 성함이나 연락처 있어요?”

“그게 외래 취소해서 전산에 있던 환자 정보는 삭제했고 종이에 적은 건……. 잠시만요.”

접수처 직원은 데스크 안쪽에 있는 상자 안에서 종이를 들추며 여자의 번호를 찾았다.

“파쇄하려고 넣어 둔 건데, 다행히 아직 있네요.”

“원장님, 그런데 환자 전화번호는 뭐 때문에 그러세요?”

“혹시 아는 분이 오시기로 하셨어요?”

안 그래도 굳이 취소한 외래 환자의 전화번호를 묻는 거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옆자리에 앉은 다른 직원이 핑곗거리를 대 줬다.

“네, 어머니 아는 분께서 오시기로 했다가 그냥 가셨다고 해서 혹시 그분인가 해서요.”

“아는 분이시구나.”

“아, 네.”

적당히 둘러댄 태경은 본인 휴대폰을 꺼내 종이에 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휴대폰 너머 예상치 못한 답변이 되돌아왔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 주십시오.

‘없는 번호라고? 뭐지?’

전화를 안 받을 수는 있어도 없는 번호라고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가 번호를 잘못 적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잘못 적은 건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혹시나 기존에 우리 병원에 왔던 환자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관리실 CCTV를 확인했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태경은 찜찜한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접수처로 가서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혹시 아까 그 다리 불편하다고 했던 환자 말이에요.”

“네, 원장님.”

“그 환자 다시 오면 그땐 나한테 꼭 알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여자가 앉았던 자리에는 더 이상 포르말린 냄새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사람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네…….’

태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섯 번째 바이탈이 뭔가 잘못되길 바랐다.

* * *

어느 아파트 단지-

단지에서 나온 중년 남성이 도로변에 빈 차 표시가 있는 택시를 세운 뒤 얼른 올라탔다.

“택시 운행하시죠?”

“그럼요. 어서 오세요.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oo 대교로 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택시에 탄 남자는 가만히 창밖을 보다가 혼잣말로 속삭였다.

“젠장! 날씨 한번 끝내주게 좋네.”

입이 주먹만큼 나온 그는 계속 창밖을 보다 핸드폰으로 오늘의 운세를 클릭했다.

“새로운 시작.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큰 어려움이 한 방에 해결된다. 귀인 세 명을 만나 문제를 해결하고 답답한 마음이 편해지며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다.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지 않으면 계속 넘어질 수 있으니 남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안 되는 일에 계속 미련을 두지 말고 지나간 일도 강물처럼 흘려보내라. 그동안 괴로운 것이 있었다면 오늘을 기점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자신의 운세를 읽은 남자는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부정했다.

“하여간에 단 한 번도 맞는 게 없냐? 오늘을 기점으로 사라진다고? 하긴. 뭐 그렇게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니네.”

“손님, 무슨 속상한 일이 있으세요?”

뒷좌석에 앉아 계속 구시렁거리는 승객이 신경 쓰였던 기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오늘의 운세를 보는데 맞는 게 하나도 없네요. 아니, 1년 동안 빠지지 않고 봤으면 좀 맞아야 하는데 매번 이래요.”

“저도 예전에는 그런 거 자주 봤는데 가끔가다 재미 삼아 보셔야지, 안 그러면 기분만 상합니다.”

“기사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안 좋은 일 있으시면 마음 푸세요. 세상 살다 보면 흐린 날도 있고 비 오고 천둥 치는 날도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날씨가 궂어도 맑은 날이 오는 것처럼 지금 안 좋은 일 때문에 마음 상하셨어도 곧 기분 좋은 날들이 오실 겁니다.”

“거참. 기사님 말씀을 참 잘하십니다. 오늘의 운세보다 기사님 말이 더 와닿네요.”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택시 기사 일이 힘들어서 근무하다 보며 웃을 일이 없다는데, 기사님은 성격이 참 좋으신가 봐요.”

중년 남자는 택시를 탈 때부터 지금까지 친절하게 응대하며 웃고 있는 기사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웃는 거예요. 진짜 택시 하면서 오래 앉아 있지, 이상한 손님도 많지. 이게 정말 힘들어요.”

“그럼요. 힘들죠.”

“그런데 계속 짜증 내고 불만만 갖고 있으면 저만 스트레스받으니까 그때부터 생각을 고쳐서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이상한 손님들도 나중에는 얌전해지고 일하는 데 수월하더라고요.”

“기사님은 일한 지 오래되셨나요?”

“아니요. 이제 조금 있으면 5년 채워 갑니다. 예전에 소방서에서 소방차 운전사로 일했는데 퇴직하고 손주들 용돈벌이로 하고 있어요.”

“기사님 참 마인드도 멋지시고 대단하시네요. 전 평생 별 볼 일 없는 회사원으로 살았습니다.”

“아니, 회사원이 왜 별 볼 일 없습니까? 남자들 넥타이 매고 와이셔츠 입고 다니는 게 얼마나 멋진데요. 이 세상에 별 볼 일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긴 하죠. 저건 가족사진이죠?”

남자는 운전석 쪽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며 물었다.

“네. 일하다 힘들 때 보면 힘이 나거든요. 잔소리는 좀 있지만, 우리 와이프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자식들도 번듯하니 잘 자라 주었고 손주 녀석들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릅니다. 하하!”

“행복해 보이시네요. 저도 우리 집사람이 못난 남편 만나서 고생했는데 사람이 참 착해요. 우리 애들도 그렇고 저도 가족 때문에 그나마 살았습니다.”

“좋은 가족을 만나는 것도 복이라고 하잖아요. 손님과 전 복 받은 사람이네요.”

“뭐, 그렇죠.”

기사 말에 대답하는 남자는 어쩐지 표정이 밝지 않았다.

“이제 oo 대교인데 다리 지나서 횡단보도 쪽에 세워 드리면 될까요?”

“아니요. 죄송하지만 저기 앞에 세워 주세요.”

“네? 저 앞이요?”

기사는 다리 중간에 세워 달라는 남자 말에 다시 한번 되물었다.

“네.”

“예, 알겠습니다.”

oo 대교는 다리 중간에 보행객과 기사들을 위한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가끔 급한 손님들이 화장실 앞에서 내리는 경우가 있었기에 기사는 그런가보다 싶었다.

탁-

“기사님 때문에 즐겁게 대화하며 올 수 있었습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감사하죠. 손님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잠시 뒤, 현금으로 계산하고 잔돈 1,700원을 받지 않은 채 묘한 인사를 남긴 남자는 다리에서 내렸다.

택시에서 내린 중년 남자는 화장실을 지나쳐 대교 보행자 도로를 조금 걸어가다 멈췄다.

그리고 좌우를 한 번 살피더니 다리 아래쪽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며 유심히 보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중년 남자는 갑자기 오른쪽 다리를 난간에 올리기 시작했다.

“저기요! 손님!!”

때마침 차를 출발하려던 택시 기사가 그 모습을 보고 빠르게 뛰어와 남자를 불렀다.

“안 그래도 기분이 싸하면서 설마 했는데……. 손님! 이러시려고 다리에 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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