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더, 덩이요? 그럼 암인가요?
“귀인?”
“어. 아까는 이게 뭔 개떡 같은 소리인가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귀인 세 명이 맞았어.”
“그게 누군데?”
“택시 기사님이랑 아까 응급실에서 정신 차리라고 혼낸 할아버지. 그리고 여기 의사 선생님.”
“할아버지는 또 누구야? 그런데 의사는 환자를 당연히 치료하는 사람인데 귀인까지는 아니지 않아?”
“그런가?”
“귀인이니 뭐니 난 그런 거 모르겠고, 당신 건강이나 신경 써.”
“알았어. 퇴원하면 당신 따라서 운동도 꾸준히 잘할게.”
“진짜지? 저녁마다 나랑 한 시간씩 걷기다.”
“한 시간이 뭐야. 두 시간씩 걸을게.”
“됐어. 무리하지 마.”
큰돈을 잃고 안 좋은 마음을 먹었던 조응기는 방황을 끝내고 다시 심기일전했다.
그는 입원해 있는 동안 태경을 비롯한 의료진 말을 잘 듣고 회복에 전념하며 차차 몸이 호전됐고, 5일간의 병원 생활을 마친 뒤 퇴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간 조응기는 몸이 회복되자 원래 약속되어 있는 외래 진료를 가지 않았다.
아예 진료 자체를 취소한 건 아니었고, 중요한 일이 생겨서 다음에 다시 갈 생각이었다.
중병도 아니고, 큰 수술을 한 것도 아니었기에 당장 진료가 급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퇴원 후 여러 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여보. 저녁 먹어요. 여보?”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마친 아내는 남편을 불렀다.
“애들은?”
“학원이랑 알바 갔죠.”
“언제 애들 집에 있는 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야겠네.”
“주말에 한 번 가요.”
“그래. 여보, 난 저녁 됐어.”
조응기는 밥그릇에 밥을 담으려는 아내를 말렸다.
“왜요? 저녁 안 먹어?”
“어. 생각이 없네.”
“당신 오늘 점심도 안 먹었다면서? 끼니 놓치면 배고파하는 사람이 배 안 고파?”
“그러니까 배가 고파야 하는데……. 여보, 나 좀 이상한 거 같아.”
“뭐가 이상한데?”
아내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남편 말에 집중했다.
“뭐가 이상한데?”
안 그래도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먹는 게 신통치 않아 좀 이상하긴 했다.
“여기가 이상한 거 같아.”
조응기는 배를 가리켰다.
“맞다! 당신 퇴원하고 나서 병원 진료 보러 오라고 했는데 안 갔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그때 가지 그랬어?”
“그날 회사에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것 때문에 못 갔어. 그리고 괜찮은 거 같아서 굳이 또 가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러다 다음에 가려고 했지.”
“가긴 뭘 가. 말하는 거 보니까 은근슬쩍 안 가려고 했네.”
“…….”
“아니, 병원에서 오라고 했으면 가야지. 퇴원하고 몸 괜찮은지 보려고 오라고 한 건데 그걸 왜 당신 마음대로 정해. 난 당신이 다음에 가도 된다고 해서 병원에서 그렇게 말한 줄 알았어.”
“나도 이럴 줄은 몰랐지.”
“많이 아파요? 거기 밤에도 문 연다고 했잖아. 그러지 말고 지금 응급실 가자.”
“아니야. 내일 병원 갈게.”
“아프다면서? 지금 안 가도 괜찮겠어?”
“괜찮아. 당신 얼른 밥 먹어. 나 들어가서 좀 쉴게.”
다리 위에서 119에 실려 갈 만큼 그 정도의 극심한 통증이 아니었던 조응기는 다음 날 병원에 가기로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그저 침대에 누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했다.
* * *
다음 날-
조응기는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바로 우리 병원으로 왔다.
“조응기 님?”
“네.”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간호사의 안내를 받은 그는 바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철컥-
“안녕하세요. 선생님.”
조응기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멈칫했던 태경이 인사를 하며 그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배 아픈 건 좀 어떠세요?”
“선생님께서 치료 잘해 주신 덕분에 통증은 사라졌어요. 그리고 저 이제 술도 거의 끊었습니다.”
“그거참 반가운 말이네요. 근데 그 힘든 술을 어찌 끊으셨어요?”
술 때문에 몸이 망가진 환자들을 여럿 봤지만, 이렇게 단호하게 끊었다고 말하는 환자는 많지 않았기에 태경은 술을 끊었다는 말이 상당히 반가웠다.
조응기가 퇴원하면서도 술을 끊겠다고 말했었는데 정말 끊을 줄은 몰랐다.
“그때 그 어르신 있잖아요. 그분 말을 듣고서 도저히 술을 먹을 수가 없더라고요.”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왔던 조응기는 응급실에서 조금 괴팍한 시한부 노인에게 인생 조언을 들었다.
그의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깊은 깨달음을 느끼며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다짐한 뒤 술까지 끊기로 한 것이다.
“정말 잘하셨어요. 그 어르신이 말씀을 좀 강하게 해서 그렇지 환자분을 생각해서 한 말이니까 혹시라도 마음 상하지 마세요.”
“마음이 상하긴요. 감사한 분인데요. 오히려 호되게 말씀해 주신 덕분에 저도 정신 차릴 수 있던 건데 감사해야죠. 그런데 선생님, 저 배가 좀 이상해요.”
태경은 조응기가 이상하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올 때 퇴원할 때와는 다른 다섯 번째 바이탈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상한데요?”
“그게 막 아프거나 통증은 아닌데 배가 자꾸 더부룩하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배가 찬 느낌입니다.”
“일단 여기 누워 보세요.”
태경은 우선 조응기를 진료실 베드에 눕게 했다. 그리고 배 주변을 눌러 보다가 췌장이 있는 명치 주위를 눌렀다. 그러자 덩이가 만져지는 게 느껴졌다.
“환자분. 이쪽에 덩이가 만져지네요?”
“더, 덩이요? 그럼 암인가요?”
덩이가 만져진다는 말에 조응기는 상당히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암이라고 해도 이렇게 빨리 커지지는 않아서요. 아마 췌장염의 합병증 같은데 영상부터 촬영하고 검사한 뒤에 바로 다시 봐 드릴게요.”
“암은 아닌 거죠? 저기 선생님 저, 앞으로 진짜 열심히 살기로 다짐했거든요. 이게 뭐가 됐든 선생님께서 잘 좀 치료해 주세요.”
조응기는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검사부터 진행한 뒤에 제가 결과 보고 확실히 알려 드릴게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진료실을 나간 조응기는 의료진에 설명을 들은 뒤 곧장 CT실로 향했다.
일반 대학병원에서는 CT 촬영하는 데 며칠이 걸리고 그 결과를 갖고 다시 진료를 보는 것만 해도 며칠이 걸리는 법이다. 그 사정은 어느 대학병원에 가나 비슷했다.
하지만 우리병원은 약간 다르다. 그 이유는 태경이 병원에 결정권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에게 검사가 필요하면 거의 모든 검사가 그날에 다 이루어진다.
이유는 간단했다. 환자들 때문이었다.
환자들이 검사와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심적으로 불안하고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고 싶었다.
대학병원은 시스템상 그게 힘들겠지만, 우리병원은 가능했기에 환자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들 수 있었다.
태경이 처음 우리 병원에 와서 이런 시스템으로 바꿔나갔을 당시 직원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유난을 떤다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 환자를 위한 그의 마음을 알게 된 직원들도 이해하며 협조했다.
조응기가 진료실을 나간 뒤 태경은 바로 방사선실로 전화를 걸었다.
-방사선실입니다.
“네, 선생님 전데요. 거기 조응기 씨라고 곧 내려갈 텐데 그 환자 CT 좀 빨리 부탁할게요.”
-네, 원장님.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그 뒤, 몇 시간에 걸쳐서 CT 촬영과 검사가 진행됐고, 검사를 마친 조응기가 다시 진료실로 돌아왔다.
철컥-
“검사받느라 고생하셨어요. 앉으세요.”
“고생은요. 저기, 선생님 저 결과 나왔나요?”
“네, 방금 나왔어요.”
조응기가 들어오기 직전까지 모니터로 결과를 보고 있던 태경의 시선이 다시 모니터로 향했다.
마우스로 화면을 내리자 아니나 다를까 췌장 옆에 떡하니 큰 낭종이 있었다.
“에고! 이게 크네…….”
영상을 보고 있던 태경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조응기 환자분, 여기 보이시죠?”
“이게 뭔가요?”
의사가 아닌 본인이 보기에도 뭔가 이상함을 느낀 조응기는 긴장한 눈빛으로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낭종입니다.”
“낭종이요? 아니, 이게 왜……?”
“췌장염으로 인한 합병증이에요.”
췌장염을 앓게 되면 아무런 합병증 없이 완치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일부 환자는 가성낭종 등과 같은 합병증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췌장염으로 인해서 췌장액이 저류가 된 낭종이 생기는 경우가 가장 흔한 합병증이다.
여기서 더 진행되면 괴사가 진행되기도 하고, 그 괴사로 인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안에 저류된 것을 빼 주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어떻게 빼 주느냐는 것이다.
췌장 낭종은 수술해서 아예 열어 놓는 것이 가장 결과가 좋다. 하지만 낭종을 장에 연결해서 열어 놓으려면 우선 낭종 벽이 안정화되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래, 이 정도면 괜찮네.’
환자의 CT를 꼼꼼하게 살핀 태경은 조응기에게 현재 상태와 수술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그가 상당히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지금 환자분이 수술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군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으면 그냥 수술하겠습니다. 전, 오늘이라도 좋아요. 어차피 해야 하는 수술 빨리하면 좋죠.”
“굉장히 적극적이시네요.”
“네. 그냥 이제 뭐든 열심히 적극적으로 살아 보려고요. 인생 한 번 살지 두 번 사는 거 아니잖아요. 최선을 다해 살아야죠.”
“정말 잘 생각하셨어요. 그러면 일단 수술 일정은 이틀 뒤에…….”
“선생님, 좀 더 빨리는 안 될까요?”
태경이 수술 일정은 보고 있는 사이 조응기가 말했다. 그는 가능한 빨리 수술하길 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오늘 당장 해도 상관없거든요. 그리고 몸 안에 낭종이 있다고 하니 빨리 떼어 버리고 싶기도 하고요.”
“그럼 내일 오전에 일찍 하는 걸로 하죠? 어때요?”
“네, 좋습니다.”
기존 수술 스케줄 때문에 이틀 뒤에 하려고 했던 태경은 적극적인 조응기의 태도를 보고 일정을 조율한 뒤 내일 수술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행히 영상 속 낭종 벽이 안정화되어 있기 때문에 수술은 바로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수술이 결정되고 조응기는 병동으로 이동해 입원 수속을 마쳤다.
“아니, 뭐야? 조 씨 다시 온 거야?”
“술 마시고 췌장 망가진 사람 술 다시 마시면 안 되는데 설마 또 술 마셨어?”
처음 병원에 왔을 때 입원했던 병실로 들어가자 그를 알아본 장기 입원 환자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췌장염으로 낭종이 생겨서 수술하려고 입원했어요.”
“아, 그래? 그래도 큰 병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수술이야 우리 원장님이 알아서 잘하실 테니까 마음 푹 놓고 있어.”
“그럼요. 걱정 안 합니다.”
입원실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은 조응기는 수술 소식을 듣고 온 가족에게 필요한 옷가지와 입원에 필요한 물건을 받았다.
“정말 옆에 없어도 되겠어?”
“당연하지. 내일 수술인데 오늘 뭐 하러 있어. 여기 있으면 잠자리 불편해서 안 돼.”
“그럼 내가 있을 테니까 엄마랑 누나는 집에 가.”
“뭐래!”
옆에 있던 고등학생 아들이 말하자 첫째인 누나가 코웃음을 쳤다.
“너, 내일 학교 안 갈 거야?”
“지금 학교가 문제야? 아빠가 내일 수술하시는데 아들인 내가 옆에 있어야지.”
“까불지 말고. 나 내일 수업 빠져도 되니까 오늘은 내가 아빠 옆에 있을게.”
“학교를 빠지긴 왜 빠져. 둘 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엄마 모시고 집에 가.”
“내가 아빠 간호해 줄게.”
“됐거든. 여보, 이놈들 데리고 얼른 집에 가. 아주 정신이 없어.”
조응기는 겉으로 귀찮은 것처럼 말했지만, 못난 아빠를 생각해 주는 자식들이 고마웠다.
“그래. 아빠 쉬셔야 하니까 우리 이만 가자. 당신 필요한 거 없어?”
“수술하는 사람이 필요한 게 뭐 있어. 늦으면 운전 힘들어. 얼른 가.”
“알았어. 내일 일찍 올게.”
“됐어. 당신 출근해야지.”
“그래도 와야지. 출근이 문제야. 혹시 밤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걱정 말고 당신이나 애들하고 문단속 잘하고 자. 갈게.”
“아빠 전화할게.”
“그래, 조심히 가.”
가족들의 병문안을 마치고 조응기는 좋은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그는 아침 일찍 수술방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여보, 나 갔다 올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수술 잘 받고 와.”
“알았어.”
“환자분 수술실로 이동하겠습니다.”
“네.”
조응기는 아내의 응원을 받으며 수술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