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오른쪽 손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시죠?”
“전혀 없어요.”
퇴근 시간에 몰려드는 외래 진료를 끝낸 태경은 응급실 환자를 둘러본 뒤 병동으로 올라와 회진을 돌고 있었다.
“저기, 원장님. 제가 환자 연락처를 물어보는 건 안 되는 거죠?”
회진을 보고 있는 태경에게 조응기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네, 환자분. 그건 환자의 개인 정보라서 안 됩니다.”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조응기는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응급실 할아버지 때문에 그러시죠?”
“예. 어떻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번호를 안 가르쳐 주시네요.”
“환자분이 할아버님께 많이 고마우셨나 봐요.”
“그럼요. 아까도 우연히 뵀는데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시고 가셨어요. 보답이라도 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네요.”
“아마 할아버지도 환자분이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거 알고 계실 거예요.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는 환자분이 할아버지에게 보답하는 길은 퇴원 후 건강하게 살면 될 거 같은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원장님도 귀인이 틀림없습니다. 말씀하시는 게 달라요.”
“귀인이요?”
“네, 병원 오기 전에 귀인 세 명으로부터 도움받는다고 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원장님이십니다.”
“전 한 것도 없는데…….”
“한 게 없다니요. 제 병도 고쳐 주시고 수술까지 잘해 주셨잖아요. 귀인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좋은 의사 만나는 것도 복이라고 하는데 제가 그 복을 제대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저도 감사합니다. 그럼 또 뵐게요.”
“네, 수고하세요.”
그 후 태경은 다른 병동을 차례로 돌며 회진을 마쳤다.
“원장님 피곤하세요?”
회진을 마치고 함께 1층으로 내려가는 임정숙 간호사가 물었다.
“저요? 아닌데. 피곤해 보여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늘 정 쌤 오프잖아요.”
“그런데요?”
“아까 이 쌤이 오늘 정 쌤 쉬는 날이라서 원장님이 기운이 없는 거 같다고 했거든요. 그 말을 듣고 보니까 왠지 그런 거 같아서요.”
“이 선생이 별소리를 다 하네요. 오전에 수술방에서 나올 때만 해도 얼빠진 사람처럼 축 처져 있더니 살아났나 봐요.”
“우리 이 쌤도 많이 성장해서 이제 실수로 기죽어 있고 땅굴 파고 들어가지는 않아요. 예전에는 하루 며칠을 그랬다면 요즘은 빨리 털어 버리던데요.”
“그러게요. 처음이랑 비교하면 이 선생이나 최 선생이나 잘하고 있어요. 빡빡한 사람 밑에서 이만큼 버티고 있는 것도 기특해요.”
“원장님이 어딜 봐서 빡빡해요. 어디를 가도 원장님 같은 스승 만나기 어려워요. 이 쌤이나 최 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요. 우리 직원들이 밤낮이 바뀐 병원에서 왜 일하는지 아세요? 바로 원장님 때문이에요.”
“너무 좋은 말씀 해 주시는 거 아니에요? 저도 직원들이 곁에 있어서 든든합니다.”
“직원들 때문에 든든한 게 아니라 정 선생님 때문 아니고요?”
“정 선생은 보고 싶죠.”
“큭!”
갑자기 뒤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리자 태경과 임정숙 간호사가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언제 왔는지 이찬희가 입을 가리며 뒤따라오고 있었다.
“이 쌤 언제 왔어요?”
“콜 와서 2층 왔다가 내려가는 중이에요. 아! 전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정 쌤을 애타게 보고 싶어 하신다는 그 애틋한 말 전, 정말 못 들었습니다.”
“이 선생?”
“선생님도 참.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성인 남녀가 만나 연애하면 보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요.”
“우리 이 쌤 너무 간 거 같은데…….”
이찬희가 잔뜩 신난 표정으로 떠들자 임정숙 간호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찬희야?”
“네. 선생님.”
뒤이어 태경이 이찬희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작은 소리로 말하자 이찬희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한마디만 남긴 채 쏜살같이 계단을 내려갔다.
“너무하세요!”
“내 마음이야. 얼른 가.”
“뭐라고 하셨는데 이 쌤이 저래요?”
“두 시간 안으로 오늘 수술한 거 정리해서 가져오지 않으면 보름 동안 당직시킨다고 했거든요.”
“저런! 충분히 놀랄 만하네요.”
“임 선생님, 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저기…….”
태경은 어울리지 않게 잠시 뜸을 들였다.
“뭔데 그러세요.”
“그게 처음 인사드리러 갈 때 선물로 어떤 게 좋을까요?”
“인사라면……. 설마! 정 쌤네 집이요?”
임정숙 간호사의 말에 태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결혼 날짜 잡았어요?”
“날짜를 잡은 건 아니에요. 정 선생 부모님도 우리 어머니도 다들 궁금해하셔서 말 그대로 인사드리러 가는 자리예요. 우리 둘 다 언제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니까 부모님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궁금하실 거 같아서 인사드리고 결혼 이야기도 해야죠. 제가 인사드리러 가겠다고 했어요.”
“잘하셨네. 남자가 먼저 이야기해 주면 또 여자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갈 때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여자 친구인 의진의 집에 인사드리러 가기로 한 태경은 작은 고민이 있었다.
“정 쌤한테 좀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아무것도 사지 말라고 하면서 괜찮다고 하는데 제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럼요. 처음 인사드리러 가는데 빈손은 좀 그렇죠. 언제 가시는데요?”
“다음 달에 갈 거 같아요.”
“아직 시간은 있네요. 사실 가장 무난한 게 과일이긴 해요.”
“과일 바구니 그런 거요?”
“네. 보통 과일 많이 하거든요.”
“저도 그 생각을 하긴 했는데 뭔가 더 좋은 게 없을까 해서요.”
“예전에 정 쌤한테 부모님이 떡을 좋아하신다고 얼핏 들었던 거 같은데.”
“떡이요?”
“네. 대화하다가 나왔는데 확실하지는 않아요. 그러지 말고 제가 정 쌤한테 티 나지 않게 살짝 물어볼까요?”
“그러면 저야 좋죠.”
“일단 내가 정 쌤한테 물어보고 알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임정숙 간호사의 도움으로 한결 마음이 편해진 태경은 진료실로 향했다.
* * *
새벽 4시 반이 조금 지난 시간.
고동색이 깃든 빛바랜 면바지와 오래된 낡은 운동화 그리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쓰는 중절모를 쓴 노인이 우리병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키는 170 초반에 평범한 체격의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인은 전체적으로 초라한 인상을 풍겼다.
“실례합니다.”
정문으로 들어온 노인은 접수처에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지금 진료가 가능한가요?”
“예, 그럼요. 어디 불편해서 오셨어요?”
“아파서 온 건 아니고 복부 초음파를 보려고 왔습니다.”
“그러세요? 저희 병원 오신 적 있으신가요?”
“아니요. 처음입니다.”
“그러면 여기 성함이랑 연락처 적어 주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 그런데 원장님 진료로 볼 수 있을까요? 여기 원장님께서 진료를 잘 봐주신다고 해서요.”
“원장님께서 진료 보실 거예요.”
노인이 대기실 의자에 앉고 접수처 직원이 환자의 정보를 입력하던 그때였다.
철컥-
“지금 갈 테니까 아티반 준비해 줘요.”
진료실에서 나온 태경이 전화를 끊으며 급하게 복도를 뛰어갔다.
“수 쌤, 응급환자예요?”
“아니, ICU(중환자실) 환자 섬망 때문에 콜온 거야.”
“지금 외래 환자분 오셨는데 오래 걸릴까요? 복부 초음파 보신다고 하셨거든요.”
“그래? 내가 환자분에게 말할게.”
접수처 직원과 대화하던 임정숙 간호사가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전 우리병원 수 간호사예요.”
“아, 네. 안녕하세요.”
“진료 보러 오셨다고 전해 들었는데 저희 원장님께서 지금 중환자실에 가셨거든요. 그래서 좀 기다리셔야 할 수도 있어요. 시간 없으시면 다른 선생님께 진료 보실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해 드릴까요?”
“아니요. 나이 들면 남는 게 시간입니다. 바쁠 일이 없어요.”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어서요.”
“당연히 급한 환자부터 봐야죠. 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혹시라도 노인이 오래 기다릴까 싶어서 물어봤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면 기다리시다가 너무 오래 걸린다 싶으면 그때 말씀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여기 화장실은 어디인가요?”
“저쪽으로 돌아가시면 바로 있어요.”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간 노인은 볼일을 보고 나왔다.
그런데 다시 대기실로 가지 않고 복도를 걸어가며 병원을 둘러보던 그는 계단을 이용해 병동으로 올라갔다.
천천히 걸어 다니며 병원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그가 다시 1층으로 내려오자 임정숙 간호사가 다가갔다.
“저기, 오시네? 안 보이셔서 가신 줄 알았어요.”
“아닙니다. 화장실 갔다 잠시 병원 구경 좀 했습니다.”
“지금 진료실로 들어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노인은 임정숙 간호사의 안내를 받으며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철컥-
“안녕하세요.”
“저한테 진료 보시려고 기다리셨다고요. 꽤 기다리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의사가 급한 환자를 보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 일로 사과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복부 초음파를 보러 오셨다고요?”
“네. 예전에 병원 갔을 때 주기적으로 관찰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 올해는 병원을 못 가서 오늘 왔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럼 제가 초음파를 볼게요. 여기 베드 위에 누워 보세요.”
노인이 진료 베드 위에 눕고 임정숙 간호사가 초음파 준비를 도와준 뒤 밖으로 나갔다.
“젤이 조금 차가울 수 있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셔 보시고 잠시만 참아 보세요.”
태경은 노인의 복부를 아주 꼼꼼하게 체크하며 초음파 검사를 마쳤다.
“다른 곳은 다 괜찮은데 어르신 담낭에 작은 용종이 있어요. 여기 모니터 보이시죠? 용종 하나가 있고 크기는 0.2mm입니다.”
“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꽤 오래전에 용종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1년 전에 병원에서 초음파 했을 때 의사가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심각한 건가요?”
“아니요. 현재는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보통 담낭에 용종이 생기면 다른 장기처럼 조직 검사가 힘들기 때문에 용종의 크기와 나이, 담석 여부와 용종 개수 등을 위주로 판단하고 있어요.”
“아, 네.”
“그런데 환자분께서는 지금까지 크기 변화가 없고 담석도 없으니까 지금처럼 추적 관찰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평소 소화불량이나 명치 쪽이 불편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네, 나이는 있지만 운동도 꾸준히 하고 소식을 해서 그런지 소화는 잘됩니다.”
“건강관리를 잘하고 계시네요.”
“나이 들어서 아프면 나보다도 자식들이 고생이니까요.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몸이 젊은 사람들처럼 좋을 수는 없으니까 할 수 있을 때 해야죠.”
“맞습니다. 바쁘시더라도 나이가 있으시니까 가능하면 6개월에 한 번은 꼭 초음파를 받 아보세요.”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드르륵-
“잠시만요.”
“네?”
“잠시 그대로 앉아 계세요.”
“진료 끝난 거 아닌가요?”
“진료는 끝났는데…….”
진료를 끝낸 노인이 의자에서 막 일어나려던 찰나, 노인보다 먼저 일어난 태경이 일어나려는 노인을 말렸다. 그러더니 진료실과 연결된 처치실에서 무언가를 들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환자분 실례지만, 손 좀 올려 보시겠어요?”
“손이요?”
“네.”
태경의 느닷없는 손 타령은 노인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오른쪽 손을 좀 올려 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