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방수밴드
태경의 느닷없는 손 타령에 노인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오른쪽 손을 좀 올려 보시겠어요?”
“원장님, 전 손은 아픈 곳이 없는데…….”
“네, 알고 있습니다. 아파서 올려 보라고 한 거 아닙니다.”
“그러면 왜?”
“여기…….”
손을 올린 것도 아니고 내린 것도 아닌 상태로 엉거주춤하고 있는 노인의 오른손을 태경이 슬며시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 때문에요.”
태경이 가리킨 노인의 오른손에는 상처가 있었다.
큰 상처는 아니고 작은 상처로, 건조한 손에 생기는 거스러미가 뜯겨 피가 뭉쳐 있었다.
“이 상처요? 이것 때문에 그런 건가요?”
“네.”
아까 노인의 복부 초음파를 볼 때부터 태경은 오른손에 있는 저 상처가 신경 쓰였다.
그건 이 노인이 특별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아닌 노인이다 보니 더 신경이 쓰였다.
모든 환자에게 신경 쓰는 태경이었지만, 아무래도 아이와 노인 환자가 오면 마음이 더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닌데요.”
“큰 상처는 아니지만 이게 또 거스러미가 뜯어지면서 피도 나고 은근히 아프거든요.”
손톱 주변에 피부가 갈려져 생기는 거스러미를 보통은 아무렇지 않게 잡아 뜯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멀쩡한 피부가 함께 벗겨져 피가 나고 그 부위가 쓰라리고 생각보다 꽤 아프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은근히 불편할 때가 있다.
태경은 피가 뭉쳐진 노인의 손을 보고 처치해 주고 싶었다.
“제가 일하다가 왔는데 아마 일하면서 뜯어진 거 같네요. 피 좀 나고 따갑긴 한데 그래도 괜찮은데…….”
“괜찮지만 빨리 아물면 더 좋으니까요. 어르신 일하세요?”
“네, 감사하게도 몸이 건강해 아직 일하고 있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자, 됐습니다.”
노인의 오른손에 난 상처를 소독한 태경은 방수 기능이 있는 밴드를 잘라 붙여 줬다.
“이게 방수가 되니까 씻을 때 떼지 마시고 여기 하얗게 부풀어 오르면 그때 떼시면 됩니다. 그리고 손 건조하지 않게 보습을 유지하는 게 좋아요. 핸드크림 바르시면 좋고요. 없으면 그냥 로션을 바르세요. 다음에 또 생기면 손으로 뜯지 마시고 그땐 손톱깎이로 잘라 주세요. 아셨죠?”
“예, 그렇게 할게요. 부끄러운 노인 손이 오늘 아주 제대로 대접받네요.”
“부끄럽긴요. 제가 보기에는 열심히 살아오신 멋진 손처럼 보이는데요?”
“선생님만 하겠습니까.”
“……네?”
“이 상처들 수련하며 생긴 상처들이죠?”
노인은 태경의 손에 생긴 오래된 상처의 흔적을 가리켰다.
“아, 네.”
“이렇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메스를 쥐고 훈련했을까 싶네요. 상당히 열심히 공부하셨나 봅니다. 꼭 발레리나의 발 같네요.”
노인은 태경의 손을 안쓰러운 듯이 쓰다듬었다. 노인의 손은 투박했지만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혹시 발레리나의 발을 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발레리나는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만 그 화려한 공연을 위해 수만 시간을 연습하고 또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발톱이 수십 번씩 빠지고 뼈가 튀어나와서 못생긴 발이 되지요. 그래서 유명한 발레리나일수록 발이 더 못생겼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손을 보니까 생각이 나서 말해 봤습니다. 정말 멋진 손입니다.”
“…….”
태경은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좀 어리둥절한 느낌이었다.
손에 상처가 가득한 것도 아니었다. 오래전,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고 싶다는 생각에 마장동에서 돼지 장기를 닥치는 대로 사서 연습하던 시절이 이었다.
그때 생긴 상처들이고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항상 손에 있던 상처라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걸로 이렇게 칭찬받으니 태경은 기분이 묘했다.
새벽 5시간 가까워진 시간, 살짝 느껴지던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제가 해야죠. 진료 잘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예, 원장님도 수고하세요.”
인자한 웃음과 함께 진료실을 나간 노인을 보며 태경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다섯 번째 바이탈이 양호했기 때문이다.
비교적 가벼운 냄새가 느껴질 뿐 독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나이에 비해 건강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시각-
진료실을 나온 노인은 접수처에서 계산을 마치고 병원을 나섰다.
아직 어두운 새벽 거리를 걸어가던 노인은 인근에 있는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역 안에 있는 물품 보관함에서 쇼핑백을 꺼내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5분 정도 시간이 지나고 노인은 놀랍게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화장실을 나왔다.
처음 허름하고 낡은 운동화와 오래된 옷과 중절모를 쓰고 있던 그는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슈트와 깨끗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또한 와이셔츠 소매에서 느껴지는 빛나는 커프스 버튼에서는 상당한 세련미도 느껴졌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를 손으로 정리한 그는 어딘가로 전화하더니 쇼핑백을 들고 들어왔던 곳과 떨어진 출구를 이용해 밖으로 나갔다.
“대표님?”
노인이 밖으로 나가자 키가 큰 중년 남자가 빠르게 다가와 90도로 인사하며 쇼핑백을 들었다.
“진료는 잘 받고 오셨습니까? 봉사 끝나고 바로 가셔서 피곤하지는 않으셨고요?”
“평생 해 온 일인데 이 정도로 아직 끄떡없어.”
“어디 안 좋은 곳은 없으시죠?”
“저번 달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건강 검진받았는데 안 좋을 게 뭐 있겠나. 담낭에 용종이야 늘 달고 살았으니 새로운 것도 없고 괜찮아.”
“어떠셨어요?”
“병원 건물이 안에는 깔끔하게 리모델링했는데 연식이 좀 된 거 같아.”
“예. 오래된 건물 맞습니다.”
“그래도 깨끗하고 관리를 아주 잘한 모양이야.”
“대표님. 그거 말고 본론을 말씀하시죠?”
“그 친구?”
“예. 그분이요.”
“왜? 자네도 궁금한가?”
“당연하죠. 대표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인상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분이 화제의 인물이잖아요. 아동학대 사건이랑 백화점 사건으로 인해 꽤 알려진 의사입니다.”
“진국이야. 이만 가지.”
노인은 딱 한마디만 남기고 고급 세단에 올라탔다.
탁-
“진국이요?”
“그래.”
노인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차를 출발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 그 정도예요?”
오랫동안 노인을 보필한 남자는 꽤 놀라며 반문했다. ‘진국’이라는 단어는 노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극찬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직업상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나. 그러다 보니까 사람을 보는 눈이 생겼어. 사람은 말이야, 굳이 오래 보지 않아도 그 사람과 대화해 보면 어느 정도 파악이 되거든. 그런데 이 친구 말이야 뭐랄까……. 내면이 단단하고 속이 깊은 느낌이 들었어.”
“인상이 좋으셨나 보네요.”
“요즘은 권위 의식에 사로잡힌 의사들이 꽤 있어. 의사들이 마치 뭔가 상당히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환자를 대하거든.”
“저도 가끔 병원 갈 때 그런 의사를 만나면 말 꺼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러면 안 돼. 의사가 될 때 선서를 하는데 거기 이런 내용이 있어. 이제 의업에 종사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무슨 드라마 대사처럼 멋지네요. 그런 게 있는 줄 몰랐습니다.”
“멋진 선서처럼 봉사하는 마음을 갖고 환자를 봐야 하는데 요즘은 그저 돈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게 참 아쉬워.”
“그런데 돈 앞에 장사 없다고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뻔히 보이는데 그걸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양심이란 게 있잖아. 너무 돈만 좇으면 안 돼. 내가 회의 시간에도 항상 말하지 않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줘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권위 의식을 내려놓고 상대방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해야 한다고.”
“맞습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낫게 하는 사람이지 권위적인 사람이 되면 안 돼. 그러면 환자들이 불편해하거든. 그런데 김태경 그 친구는 그런 게 없어. 환자와 눈높이를 맞추고 진심으로 진료를 하는 게 아주 인상 깊었어.”
“결국 그분 칭찬하려고 하신 거죠? 말씀하시는 거 보니 마음에 쏙 드셨나 봅니다.”
“마음에 쏙 들어.”
“일전에 말씀하신 건 고 비서 통해 오늘 안으로 병원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요란하지 않게 조용히 처리해.”
“알겠습니다. 회사로 출발하겠습니다.”
노인은 태경이 붙여 준 밴드를 보며 흐뭇한 미소와 함께 혼잣말을 속삭였다.
“……가 역시 보는 눈이 정확했어.”
* * *
우리병원-
“김병만 님, 진료실 들어가실게요.”
“네.”
“이민이 님 처방전 있습니다. 약국은 나가셔서 조금만 내려가시면 보여요.”
“네, 감사합니다.”
출근하기 전, 평소처럼 진료를 보려는 사람들로 대기실이 가득 찼다.
그렇게 정신없는 시간이 지나고 병원 안에는 여유가 찾아왔다.
“임 선생님 식당에 안 보이던데 응급실 가셨나?”
“아니요. 사무실에 계세요.”
“고마워요.”
작은 상자가 담긴 쇼핑백을 든 장득칠이 접수처 안쪽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와 임정숙 간호사를 찾았다.
“임 선생님.”
“네, 부르셨어요.”
“이거요.”
“장 요원, 이게 뭐죠? 먹는 건가?”
임정숙 간호사가 아닌 문서 작업을 하고 있던 최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응했다.
“아니요. 방금 전에 어떤 남자분이 원장님께 전해 드리라고 하던데 원장님이 진료실에 안 계셔서 가져왔습니다.”
“원장님한테요? 누구라고는 말 안 하고요?”
“제가 물어보니까 자기도 심부름 온 거라고 잘 모른다고 하던데요.”
“그래요? 누구지?”
“안에 종이나 뭐 명함 같은 거 있지 않을까요?”
최 팀장이 쇼핑백 안을 살펴봤지만, 명함이나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는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누가 보냈을까?”
“아이구! 우리 팀장님 되게 궁금하신가 보다.”
“정체불명의 상자가 원장님 앞으로 왔는데 당연히 궁금하지. 임 선생은 안 궁금해요?”
“조금 궁금하긴 해요.”
“거봐요.”
“원장님께서 뭐 배달시킨 거 아닐까요?”
“장 요원도 참. 원장님이 직원들 간식 빼놓고 뭐 배달시킨 적 봤어요? 이게 뭘까?”
궁금함을 참다못한 최 팀장은 급기야 쇼핑백 안에 있던 상자를 꺼내 들었다.
“어머! 팀장님, 그걸 왜 꺼내요?”
“맞습니다. 원장님 앞으로 온 건데 팀장님이 보면 안 되죠?”
“보긴 누가 봐요. 그런 게 아니라 살짝 흔들어 보려고 그런 겁니다.”
“그걸 왜 흔들어요? 그러지 말고 얼른 도로 넣어 두세요.”
“살짝 흔들어 보면 대충 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요.”
탁- 탁-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만하고 얼른 넣어 두세요.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데 그러다 쏟아지기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임정숙 간호사와 장득칠의 만류에도 최 팀장이 계속 상자를 흔들던 그때였다.
“이게 왜 쏟아져요. 그런 일 없으……!”
열십자로 닫혀 있던 상자 밑 부분이 열리며 안에 있던 내용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이, 이게 지금…….”
“……!”
상자 안에 물건을 보자 모두 얼음처럼 굳어졌다.
놀랍게도 상장 안에 있던 건 오만 원짜리 현금다발 뭉치였고 그중 종이가 풀린 한 뭉치 때문에 바닥 위에 돈이 가득했다.
세 사람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휘둥그레진 눈으로 돈다발을 응시했다.
“서, 설마 이거 돈인가요?”
“난 내 눈이 이상한 건 줄 알았는데……. 장 요원이 보기에도 돈이죠?”
“예, 제 평생 이런 돈다발은 처음 봅니다. 원장님 돈일까요?”
“혹시 우리 원장님께서 숨겨진 재벌은 아니시겠죠?”
“두 분 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얼른 돈이나 주워요. 팀장님? 발 좀 치워요!”
임정숙 간호사의 호통에 돈다발을 보고 놀란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돈을 주웠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 어라. 여기 쪽지가 있네.”
“이리 주세요!”
돈을 줍던 최 팀장이 돈다발에 꽂혀 있는 쪽지를 꺼내자 임정숙 간호사가 빠르게 낚아챘다.
“팀장님 또 보려고 그러죠? 제가 원장님께 드릴게요.”
“안 그래도 임 선생 주려고 했어요. 하! 하! 하!”
돈을 줍던 최 팀장은 갑자기 뭐가 좋은지 실소를 터트렸다.
“갑자기 왜 웃고 그러세요?”
“그게 아니라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셋이 몰래 공금 횡령하는 사람들 같지 않아요? 그냥 이 상황 자체가 황당해서 그런지 웃음이 나네요.”
“어휴! 정말 이상한 소리 그만하시고 돈이나 주어요.”
“임 선생님 여기…….”
바닥에 쭈그린 세 사람이 열심히 돈을 줍던 그때 태경이 들어왔다.
“다들 뭐 하세요?”
바닥에 널린 돈다발을 본 태경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