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396화 (395/472)

396화. 말할 수 없는 고통

“다들 뭐 하세요?”

바닥에 널린 돈다발을 본 태경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 원장님 그게 말이죠.”

갑작스러운 태경의 등장에 돈을 줍던 최 팀장이 상황을 설명했다.

“원장님 앞으로 돈이 왔습니다.”

“예?! 제 앞으로 돈이 왔다고요?”

“네, 상자가 배달왔는데 제가 뭔가 하고 흔들어 보다가 돈이 쏟아져서 저희가 줍고 있던 겁니다.”

“어떤 남자분이 원장님께 전해 드리라는 말만 남기고 이걸 주고 그냥 갔어요.”

“원장님, 여기 쪽지가 있어요.”

장득칠에 이어 임정숙 간호사가 상자 속에 있던 쪽지를 건넸다.

태경은 건네받은 쪽지를 펼쳐 안에 내용을 확인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마음으로 환자들을 살피며 성심성의껏 의술을 펼치는 원장님의 모습에 감동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환자 곁에 있어 주세요. 작은 정성을 보탭니다. 이 기부금으로 병원에 필요한 곳과 도움이 필요한 환자를 위해 사용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익명의 환자가-

“기부금이네요.”

“어쩐지……. 그런데 누가 보낸 걸까요?”

“누구라고는 안 쓰여 있어요?”

“네, 익명의 환자라고 쓰여 있고 내용을 봐서는 우리 병원에서 진료받은 환자 중 한 사람인 거 같아요.”

태경의 말에 임정숙 간호사와 최 팀장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환자들 위주로 떠올렸지만 한두 명이 아니라 한 사람을 특정하기 어려웠다.

“이거, 원! 머리를 굴려 봐도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네요.”

“원장님. 이 돈은 어떡할까요?”

“액수가 상당합니다. 자그마치 삼천만 원이에요. 삼천!”

조금 전, 떨어진 돈다발을 정리하던 최 팀장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액수를 확인해 봤다.

“삼천이요? 상당히 큰돈이네요. 이렇게 하죠.”

“어떡해요?”

“혹시라도 이 돈을 주고 간 분이 다시 찾으러 올 수도 있으니까 잘 보관하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으면 기부금 명목으로 올리는 거로 하죠.”

“네, 원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기, 팀장님.”

태경과 임정숙 간호사가 사무실을 나가고 아이러니한 표정으로 돈 상자를 보고 있던 장득칠이 물었다.

“예?”

“기부금을 다시 찾으러 온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아, 그거요. 가끔 가족과 상의 없이 기부금을 냈다가 가족들이 찾으러 오는 경우가 있어요.”

“기부금으로 낸 돈을 다시 달라고 한다고요?”

“그렇죠. 원장님 성격상 그런 일이 있으면 다시 돌려드리니까 일단 지켜보자고 한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 돈도 찾으러 올까요?”

“마음 같아서야 안 찾으러 오면 좋겠지만, 그거야 나도 모르죠.”

최 팀장은 돈이 든 상자를 들고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는 금고에 보관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왔다.

* * *

어느 가정집-

한 남자의 아내이자 엄마인 그녀의 이름은 김연주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언제나처럼 온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청소를 마친 뒤, 거실에 걸려 있던 시계를 본 김연주는 주방으로 향했다.

상황버섯과 브로콜리, 빨간색과 노란색, 주황색이 섞여 있는 미니 파프리카, 가지, 등 푸른 생선과 지방이 없는 살코기까지.

냉장고에서 영양소가 가득한 건강한 식재료를 꺼내 김연주는 하나씩 손질하기 시작했다.

각종 채소를 씻고 또 씻고 조금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씻고 있는 그녀의 표정 위로 묘한 비장함과 함께 쓸쓸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식재료를 열심히 손질하던 그때였다.

철컥-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다 김연주는 집중하던 손길을 멈췄다.

이 시간에 집에 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함께 사는 시어머님과 남편은 회사에 있을 시간이었다. 게다가 집에 올 일이 있으면 항상 연락을 미리 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집에 올 사람이 없었다.

‘누구지?’

이런저런 생각을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김연주는 살짝 무서운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설마 도둑인가 싶은 생각에 칼을 쥐고 있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천천히 주방에서 나와 현관 쪽으로 발길을 옮기던 바로 그때였다.

‘엄마!’

“엄마아아!!”

우렁찬 소리와 함께 제멋대로 벗어 던진 신발을 뒤로한 채 밝은 표정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산아? 진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녀의 사랑스러운 아들, 딸이었다.

탁-

그런데 김연주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아이들을 보고 놀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나도! 진이도 학교 다녀왔지요.’

‘엄마, 칼 떨어졌어.’

‘엄마 괜찮아?’

놀랐던 김연주는 아이들의 말에 자신이 칼을 떨어뜨렸다는 걸 인지하고 얼른 칼부터 주방에 갔다 두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진이 너 화장실 간다고 하지 않았어?’

‘맞다! 쉬 마려. 화장실 갔다 올게.’

오빠의 말에 참았던 소변이 마렵기 시작한 여동생이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고,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김연주가 아들 곁으로 다가와 쭈그려 앉으며 눈높이를 맞췄다.

‘사……산이? 정말 산이 맞아?’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처럼 파르르 떨리는 손길로 김연주는 아들의 손을 만지고 얼굴을 살포시 감싸 쥐었다.

그녀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뚫어져라 쳐다봤다.

‘엄마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래?’

엄마의 모습을 보며 산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산아? 산아…….’

‘응. 엄마. 나. 산이 맞아. 엄마 아들 이산.’

‘그러네. 맞네. 진짜 엄마 아들 산이가 맞네.’

‘엄마 꿈꿨어?’

눈앞에 아이가 진짜 아들인 걸 확인한 김연주는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기뻐했다.

‘으! 엄마 숨 막혀.’

‘미안. 엄마가 너무 기뻐서.’

‘뭐야, 둘이서만 안고. 나도! 나도 엄마랑 오빠 다 같이 안을 거야.’

그사이 볼일을 보고 화장실에서 나온 둘째 딸 진이가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두 사람을 와락 끌어안았다.

‘진아, 몸은 괜찮아? 아프지 않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신을 안은 딸의 손을 떼어 낸 김연주는 아까 아들에게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딸이 괜찮은지 물으며 살폈다.

‘엄마도 참. 내가 아프긴 왜 아파?’

‘정말 안 아파? 배 괜찮아?’

‘응. 나 아픈 적 없는데? 나 달리기도 엄청 빠르고 엄청 씩씩하잖아.’

‘맞아. 우리 진이는 엄청 씩씩해. 다행이다.’

누가 봐도 건강하고 생기 넘치는 사랑스러운 딸에 잔망스러운 모습을 본 김연주는 다행이라는 표정과 함께 다시 한번 아들과 딸을 끌어안았다.

‘엄마, 근데 오늘 오빠 생일파티 하는 거 맞지?’

‘어? 생일?’

‘오늘 오빠 생일이잖아.’

‘오늘이 산이 생일이라고?’

‘응’

생일이라는 말에 김연주가 얼른 핸드폰 날짜를 확인하자 정말 아들의 생일이 맞았다.

‘산아 미안해.’

본인 생일은 잊어도 아이들 생일은 잊어 본 적 없던 그녀는 미안한 얼굴로 아들에게 말했다.

‘엄마가 깜빡했어.’

‘난 괜찮아. 그리고 원래 생일은 엄마가 힘들게 나를 낳은 날이라고 해서 내가 아니라 엄마한테 감사한 마음 전하는 날이라고 했어.’

‘산아 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었어?’

‘책에서 봤어.’

평소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다정한 아들은 종종 어른같이 말을 하고는 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생일 파티 그런 거 안 해도 괜찮아.’

‘아! 왜애. 생일 파티 해야지. 그래야 케이크도 먹잖아. 진이는 초코케이크 먹고 싶은데…….’

‘진아, 오늘은 오빠 생일이니까 오빠가 먹고 싶은 거 먹고 초코는 내일 엄마가 사 줄게.’

‘알았어.’

‘아니야. 엄마. 나도 초코케이크 먹고 싶어.’

‘그래. 알았어.’

그 뒤, 퇴근한 남편이 초코케이크를 사 오고 시어머니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선물을 잔뜩 사 왔다.

‘생일 축하합니다.’

케이크를 중심으로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아들의 생일을 축하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산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우리 산아 생일 축하해.’

‘아빠도 생일 축하해.’

‘오빠, 생일 진짜 많이 축하해.’

산이가 케이트에 꽂힌 초를 힘차게 불자 가족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다들 여기 보세요.’

그리고 이 행복한 순간을 남기고 싶은 김연주는 핸드폰을 들고 사진 촬영을 하였다.

‘하나, 둘, 셋.’

찰칵-

‘우리 산이 진이 진짜 멋지고 예쁘게 나왔네. 맞다! 생일 선물 갖고 싶은 거 있어?’

‘엄마 나 사실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말만 해. 엄마가 다 해 줄게.’

‘진이 이대로 두면 내가 있는 곳으로 올지도 몰라. 진이는 여기 오면 안 돼. 빨리 병원 데려가. 내 동생 도와줘.’

‘뭐? 산아.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 더 이상 시간이 없어. 진이마저 오면 엄마도 아빠도 너무 힘들잖아. 난 진이가 빨리 건강해져서 다시 예전처럼 웃으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엄마가 그만 울었으면 좋겠어. 나 그만 갈게. 엄마.’

‘산아, 가긴 어딜 가. 산아?’

그렇게 이해할 수 없던 아들의 말을 듣고 있던 그녀는 아들을 부르다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 *

“여보?”

“산아…… 가지 마.”

“여보, 연주야?”

“……!”

남편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뜬 김연주는 몇 초 동안 멍한 상태로 있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 밤샌 것 때문에 여기서 쪽잠 들었나 보다. 당신 아침도 안 먹었지? 뭐 좀 먹을래?”

남편의 말에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던 그녀는 재빨리 아들 산이 방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철컥-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책과 책상 위에 놓인 필기구와 교과서, 그리고 바닥 한쪽에 있는 책가방과 주름 하나 없이 펴진 침대 위 이불까지.

주인 잃은 방에 물건들은 오늘도 어제처럼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보, 산이는?”

“뭐?”

“산이 생일 축하했는데.”

아들 방에서 나온 김연주가 향한 곳은 딸 이진의 방이었다.

“…….”

문고리를 잡고 벌컥 문을 열려던 손길이 순간, 멈칫하며 의식적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미세하게 열린 문틈 사이로 가습기가 켜진 방 안에서 힘들게 잠이 든 딸의 얼굴이 들어왔다.

너무나 익숙한 방안 풍경을 보자 조금 전 행복했던 일상이 꿈이었음을 깨달았다. 김연주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표정으로 아들 산이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앉았다.

“여보, 괜찮아?”

“아니, 우리 방금까지 다 같이 산이 생일 파티하고 진이도 씩씩하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흘리는 김연주를 본 남편 이재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토닥였다.

“꿈꾼 거야? 한동안 안 꾸더니 꿈에 산이 나왔네. 맞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이재산은 아내를 따뜻하게 다독였다.

“우리 산이…… 산이가 하! 여보 우리 산이가 자기 생일이라고 내가 축하받아야 한다고 그랬어. 진이도 아픈 곳도 없고 씩씩하고 건강한 모습이어서 그래서……. 난 그게 진짜인 줄 알고 핸드폰으로 사진도 찍었는데…….”

사실 소파 위에서 눈을 뜨자마자 김연주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게 꿈이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너무도 선명한 아이들의 모습에 어쩌면 실제이지 않을까 하는 모래알 같은 희망에 잠시 혼동이 왔었다.

“괜찮아. 연주야 괜찮아.”

“보고 싶어. 하! 우리 산이…… 너무 보고 싶어. 여보 산이 생일 케이크도 못 챙겨 줬는데…….”

미치도록 보고 싶은 아들은 생일 전날,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고 앞에 가족들은 이별할 시간도 없이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렇게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이를 떠나보내고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났어도 여전히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은 잊히지 않고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여보. 아까 꿈에서 산이가 진이한테 시간이 없다면서 도와주래.”

사고로 아들을 잃은 김연주와 이재산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는데, 바로 둘째 딸 진이였다.

언제부턴가 딸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그 정도가 전보다 더 심했다. 하지만 이들 가족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병원에 갈 수 없다는 거였다.

사람이 아프면 병원에 가고 치료하는 게 당연했지만, 그 당연한 일이 이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자 악몽 그 자체였다.

“연주야, 우리 진이 데리고 병원 갈까?”

병원이란 말에 김연주는 살짝 움찔했다.

“나 당신한테 고백할 거 있어. 실은 며칠 전에 병원 갔었어.”

“병원에 갔다고? 어떻게?”

“진이 약 때문에 외출했다가 갔는데 접수하고 기다리는 동안 어머님께 전화 와서 너무 놀라서 그냥 나왔어. 여보 나 있잖아.

그날 무슨 일이 있어도 진료 보고 진이 상태에 관해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거든? 그런데 막상 진료 본다고 생각하니까 그때 기억이 막 떠오르면서 진정이 되질 않는 거야. 어머님 전화 받고 나오기는 했는데 솔직히 전화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어.”

“연주야, 내가 며칠 동안 계속 고민해 봤는데 이제 방법이 달리 없는 거 같아. 해 볼 수 있는 건 병원 말고 다 해 봤잖아. 힘들겠지만, 병원에 가는 수밖에 없어.”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런데 어떻게? 어머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내가 인터넷 찾아봤는데 예전에 아동학대 사건을 해결해서 뉴스에 나온 의사가 있어. 그분이 환자들을 정말 많이 도와준대. 그래서 그 선생님을 찾아가 볼까 해. 우리 집에서도 그렇게 멀지 않아.”

“거기 혹시 여울동 우리 병원이야?”

“맞아! 당신도 설마 그 병원 간 거야?”

“어. 인터넷 보니까 거기 원장님이 환자에게 잘해 주신다고 해서…….”

김연주는 갑자기 하던 말을 뚝 끊고 멈칫했다.

“당신, 왜 그래?”

이재산의 말에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김연주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문 앞 걸어갔다.

문에 기를 대고 잠시 집중하던 그녀는 별안간 문을 확 열었다.

“……!”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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