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병원 소리 꺼내지도 마
“아주머니!”
문밖에서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던 중년 여자를 본 김연주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자, 작은 사모님, 전 그냥…….”
외국인 동포 출신으로 입주 가정부인 중년 여자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뭐 하시는 거냐고 물었잖아요?”
“그게 그러니까 저는 그냥 아까 식사를 통 못 하시길래 요깃거리라도 하시라고 바나나랑 딸기를 좀 갈아왔슴다.”
가정부는 눈치를 보면서 들고 있는 쟁반을 앞으로 내밀었다.
“누가 아주머니보고 주스 갈아오라고 시켰어요?”
탁-
거침없는 손길이 쟁반을 내려치자 머그컵에 담겨 있던 주스가 바닥으로 쏟아지며 사방으로 튀었다.
“제가 괜스레 작은 사모님 마음을 불편하게 했나 봅니다. 아이고! 이거 아까워서 어쩌나.”
“여보, 왜 그래?”
처음 보는 아내의 모습에 당황한 이재산이 그녀를 말렸다.
“당신한테 주스 주려고 온 거잖아. 아주머니, 괜찮으세요?”
“전 괜찮슴다. 날래 신경 쓰지 마시라요.”
“아주머니, 미안합니다.”
“미안하긴요. 당치도 않슴다.”
“미안이라니? 당신이 아줌마한테 왜 미안해?”
“당신 진짜 왜 그래.”
이재산은 감정이 격해진 아내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거 놔!”
“진이 때문에 당신 마음이 힘들다는 거 내가 잘 알아. 그래도 아주머니에게 그러는 건 너답지 않아. 우리 가족을 위해서 일해 주시는 분이잖아.”
김연주는 아픈 딸을 돌보면서 힘들지언정 다른 사람에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해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온 가정부에게 마음을 쓰며 따뜻하게 챙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가정부를 대하는 아내의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뀌었다.
이재산은 그때마다 물어봐도 아무 일 없다는 대답만 듣고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보니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당신 아주머니랑 아무 일 없는 거 맞아?”
“…….”
“내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는 거야?”
“여보, 아주머니 이번 달까지만 일하고 그만뒀으면 좋겠어.”
“뭐! 갑자기? 어머니가 데려온 사람이라 쉽지 않을 거야. 게다가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관두라고 해.”
“잘못한 게 없다고? 아주머니가 우리 감시하고 있어. 이래도 잘못한 게 없어?”
“뭐라고?”
너무나도 황당한 이야기에 이재산은 아내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감시라니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이랑 내가 진이 문제로 병원 가야겠다는 이야기 처음 꺼낸 날. 그 한 달 전부터 어머님이 평소보다 더 연락이 잦아졌다는 생각 안 해 봤어?”
“어머니 연락?”
“어. 아주머니가 어머니께 다 보고하고 있었어.”
이재산과 김연주 가족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병원에 가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거의 병원을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심하게 아픈 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데려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자연치유와 온갖 온라인에 떠도는 확인되지 않은 방법을 동원해 아이의 상태를 살피며 그걸로 치료를 이어 갔다. 특히 시어머니가 그런 방법들로 아이가 나을 거라는 믿음이 강했다.
하지만 온갖 방법에도 어쩐 일인지 아이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갈수록 증세가 심해졌다.
증세가 심해질수록 아이의 고통 소리와 통증도 함께 늘어갔다.
생각이 많아진 부부는 마지막으로 병원에 가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자신들보다 더 병원을 불신하는 시어머니에게 말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부부는 더 이상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시어머니가 먼저 아들 내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너희들 설마 진이 데리고 병원 갈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고 한번 가서 상담이라고 해 볼까 해서요.’
‘미쳤니? 돌았어? 그때 일 잊은 거야? 연주가 네가 아범에게 병원 가자고 꼬드겼니?’
‘아, 아니요. 어머니 진이가 많이 힘들어해서 같이 내린 결정이에요.’
‘진이가 힘들어하는 걸 아는 사람이 병원 가자는 말을 해? 산이가! 우리 장손이!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죽은 거 잊었어?’
‘…….’
‘그때 네가 산이를 병…….’
‘어머니!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이 사람 잘못 아니에요.’
‘그래, 굳이 따지면 병원 때문이지. 그래도 그때 연주가 산이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면 죽지는 않았을 거야.’
‘어머니!’
‘알았다. 그만하마. 대신 두 번 다시 그 병원 소리 꺼내지도 마.’
병원에 데려가겠다는 말에 시어머니는 분노했고, 그 광기 어린 분노는 고스란히 며느리인 김연주에게 향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두 사람의 관계는 주변에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큼 사이가 좋았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아꼈고 며느리도 시어머니를 잘 따랐다.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좁혀지지 않는 간격이 있는 게 고부 관계인데 두 사람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그런데 결혼 후 어렵게 낳은 첫 손주인 산이가 사고로 죽자 충격으로 쓰러진 시어머니는 그 모든 화살을 며느리에게 돌렸다.
김연주 역시 아들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게 어쩌면 자신 탓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가슴을 찌르는 시어머니의 모진 소리도 온몸으로 맞아가며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만, 내 새끼를 위해서라면 더 이상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시어머니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상하게도 시어머니는 부부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었고, 심지어 김연주가 잠시 외출할 때도 그 동선조차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감시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의심은 시어머니가 데려온 가정부로부터 시작됐고 확신이 섰다.
어느 날, 평소처럼 진이를 간호한 뒤 간신히 잠이 든 딸을 확인하고 잠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남편에게 전화가 왔고 늘 그랬듯 아이의 상태를 체크하며 부부는 이런저런 이야기 나눴다.
전화를 끊고 난 뒤 아이가 잠들 때 샤워하려고 가정부에게 말하고 욕실로 향했다가 핸드폰을 방에 두고 와서 다시 욕실을 나갔다.
딸이 언제 엄마를 찾을지 몰라 김연주는 늘 핸드폰을 눈에 보이는 곳에 두어야 안심이 됐다.
그렇게 핸드폰을 들고 혹시나 그사이 딸이 깨지는 않았는지 보려고 방을 나와 딸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정부의 방을 지나는 순간, 김연주는 멈칫하고 말았다.
‘네, 사모님. 작은 사모님께서 또 병원 이야기를 꺼내는 걸 제가 분명히 들었슴다. 예, 아까는 진이에게 엄마랑 아빠랑 같이 가보자고 하는 말도 서슴지 않았슴다.’
미세하게 열린 문틈 사이로 가정부가 남편과의 통화 내용과 함께 자신의 일과를 전부 시어머니께 보고하고 있었다.
이게 불과 며칠 전 일이었다.
“당신 방금 한 말 진짜야?”
아내의 설명을 전부 들은 이재산은 놀란 모습을 보였다.
“전부 다 사실이야.”
“연주야 혹시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뭐?”
이재산은 아내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요즘 진이 때문에 걱정도 많고 다들 좀 예민하잖아.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하고.”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지금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한다는 거야? 내 말이 거짓말 같아?”
“그런 게 아니라……. 여보? 연주야?”
철컥-
남편의 반응에 기분이 상한 김연주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이재산 역시 바로 뒤따라 나갔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가정부의 방이었다.
철컥-
“작은 사모님, 왜 이러세요.”
“아주머니. 저랑 남편 감시하면서 시어머님께 다 보고하고 있죠?”
“예? 보고라니요. 전 그런 거 모릅니다.”
“정말 몰라요?”
“예, 작은 사모님.”
탁- 탁-
가정부가 계속 모른다고 발뺌하자 김연주는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연주야, 너 정말 왜 그래?”
“이거 놔!”
그 모습을 본 이재산은 황급히 말렸지만, 아내는 완강한 태도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너 정말 왜 그래!”
급기야 남편이 목소리를 높이며 묻자 아내가 참담한 표정으로 이유를 말했다.
“왜 그러냐고? 아주머니가 어머님께 연락하지 않아야 진이를 병원에 데려갈 수 있으니까!”
“……!”
“어머님은 병원에 데려갈까 봐 진이 방에 CCTV까지 설치하고 아줌마를 고용해서 감시까지 하고 계셔. 그뿐이야? 사기꾼 같은 점쟁이가 병원에 가면 애가 죽는다고 한 말도 안 되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잖아. 게다가 자연 치유니 뭐니 말도 안 되는 방법에 빠져계시고……. 하!”
감정이 북받쳐 오른 김연주는 잠시 마음을 다스린 뒤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도! 병원에 진이 보내는 게 두렵고 무서워. 누구보다 내가 제일 무섭다고. 혹시 그때 일이 또 반복되는 건 아닐까. 진이마저 잘못되면 어떡해야 하나 무서운데……. 산이가 동생 병원에 데려가라고 하잖아. 아까는 몰랐는데 산이가 동생 살리려고 병원 이야기 한 거 같아. 그러니까 당신 나 말리지 마.”
울분 섞인 하소연을 쏟아낸 김연주는 가정부의 방을 뒤졌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하나씩 꺼내던 바로 그때였다.
“이것 봐! 설마 했는데…….”
마지막 서랍 안쪽에서 못 보던 핸드폰과 손바닥만 한 작은 수첩이 나왔다. 그 안에는 낮 동안 김연주가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남편과 통화할 때는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부부가 함께 있을 때는 어쩐 대화를 하는지 등이 적혀 있었다.
주로 병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것을 체크했다가 시어머니가 준비해 준 핸드폰으로 몰래 연락하고 있었다.
“이래도 내가 예민한 거야? 이래도 내가 이상해?”
“아주머니? 우리 감시하고 있었어요? 왜요?”
설마 했던 이재산은 크게 화를 냈다. 순박하고 열심히 사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잘 대해 줬는데 속았다는 배신감을 감출 수 없었다.
“고저……. 난 속이지 않았슴다.”
“이렇게 증거가 뻔히 있는데 발뺌하는 거예요?”
“아줌마도 애 엄마잖아요. 우리랑 똑같이 자식 키우는 부모면 우리 마음이 얼마나 절박한 줄 알 텐데……. 어떻게 이런 짓을 해요.”
“왜 이랬는지 정말 말 안 할 거예요? 돈이에요? 돈 더 받으려고 이런 짓 했어요?”
“돈 때문에 그런 거 아입니다. 지금 받는 월급으로도 돈은 충분함다.”
“그럼요? 뭐 때문에 이런 건지 말해요.”
“내래 이거 말하면 큰 사모님께 혼이 날 텐데…….”
“아줌마!!”
“마, 말하겟슴다. 그러니까 진이를…….”
부부의 계속된 추궁에 고민하던 가정부는 결국 입을 열었고 부부는 놀라운 대답을 듣게 됐다.
“아픈 아이를 지키고자 그랬슴다. 말씀하신 대로 저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니까요. 그래서 아이를 지켜 주고 싶었슴다.”
“뭐, 뭐라……고요?”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큰 사모님의 말을 따르게 됐슴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까 한 말이요. 누구를 지켜요?”
김연주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큰 사모님께서 이사님과 작은 사모님이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있다고 했슴다. 병원이라고 말하는 건 두 분이 이상한 단체를 말하는 암호니까 그런 소리를 하면 반드시 알리라고 신신당부하면서 핸드폰도 새로 장만해 줬슴다. 내래 저 어린아이가 안쓰럽고 안타까워서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코 다른 뜻이 있어서 나쁜 마음으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슴다.”
“…….”
“……!”
이재산과 김연주는 가정부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되질 않았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아주머니?”
멍한 표정으로 있던 김연주가 정신을 차리고 가정부 옆에 앉았다.
“예, 작은 사모님.”
“그러니까 아주머니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