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딸을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설명하던 이재산은 떠나간 아들이 생각난 듯 잠시 손으로 눈을 가리며 숨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금도 아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습니다. 흐윽!”
태경은 울분을 삼키며 흐느끼는 이재산에게 조용히 다가가 손수건을 건넸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이재산을 보며 그의 상처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가족들이 겪은 그 일이 얼마나 참담하고 비극적이며 가슴 찢어지는 일인지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모든 부모에게 자식이란 존재는 특별하다.
남녀가 만나 부부로 연을 맺고 서로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하고 모든 기준이 아이가 된다.
더 좋은 세상을 아이에게 주고 싶고, 아프지 않고 좋은 것만 보며 좋은 사람들만 만나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서는 못 할 것이 없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으며 아이를 위해서는 목숨조차 내어줄 수 있다.
아마 모든 부모가 자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이럴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 몸이 아팠던 것도 아니었고 건강하고 씩씩했던 아이가 한순간에 아무런 예고 없이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아이를 더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재산과 가족들은 아직도 믿기지 않을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그 마음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그 속은 상처와 슬픔과 고통으로 이미 너덜너덜 찢어져 있을 것이다.
일반 사람이라면 경험하기 전에는 잘 알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삶과 죽음이 무수히 반복하는 병원에서 일하는 태경은 그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재산의 가족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의료사고로 아들을 잃었고, 그로 인해 병원에 대한 불신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마 가족들은 병원이란 곳에 상당한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작은 상처를 치료하러 병원에 왔다가 생각보다 큰 고통을 겪은 환자도 다음에는 병원에 가길 두려워한다. 하물며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냈으니 병원을 불신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분명 이재산 어머니의 상식을 벗어난 모습들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흐윽!”
태경은 여전히 흐느끼고 있는 이재산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키도 크고 덩치고 좋은 그의 뒷모습이 작아 보였다.
“좀 괜찮으세요?”
“설명해 드린다는 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서…….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괜찮습니다. 설명하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자세히 말해 줘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좋은 이야기가 아닌데 끝까지 들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까 계속 시간이 없다고 한 말은 왜 그런 거죠?”
“아! 그게 어머니가 제가 병원 간 걸 모르세요. 알면 말 그대로 난리가 나거든요. 그냥 난리가 아니라 이런 표현이 죄송하지만, 거의 발작 수준으로 난리를 피우세요. 그래서 지금도 거래처 들렀다 퇴근한다고 하면서 몰래 나왔습니다.”
“그러셨군요.”
“제가 마음이 급하고 속상한 마음에 원장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떼를 쓴 거 같아 죄송합니다.”
모든 사연을 털어놓고 울고 난 이재산은 이제야 정신은 든 것 같았다. 조금 전, 접수처에서 막무가내로 소란스럽게 한 행동이 미안했다.
“보호자분이 절 찾아온 건 딸아이 때문인 거죠?”
“네, 맞습니다. 우리 진이가 어떤 상태인지 진료를 봐 주셨으면 합니다.”
“진료를 보려면 아무리 자세한 설명을 들어도 제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이를 직접 봐야 해요.”
“알고 있습니다.”
“아이를 병원에 데려오실 수 있으세요?”
태경은 질문을 던지면서도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가족들 모두 병원이란 곳에 극심한 트라우마가 있지만, 부부는 딸을 위해 용기 내고 결심했다고 해도 어머니라는 큰 산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어려울 거 같습니다.”
역시나 이재산의 대답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태경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잠시 생각을 하던 바로 그때였다.
“원장님!”
“……!”
갑자기 이재산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간절하게 태경을 불렀다.
“저 좀 도와주세요. 제가 이렇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집에 오셔서 딸을 한 번만 봐 주시면 안 될까요?”
“집으로요?”
“……네. 원장님 도와주세요.”
“일단 일어나세요.”
태경은 절실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이재산을 일으켜 세웠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재산이라고 합니다.”
절실한 이재산의 눈빛은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고민하는 듯한 태경을 보며 다시 한번 애원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그의 눈앞에 핸드폰이 보였다.
“…….”
태경이 자신의 핸드폰을 이재산에게 내민 것이다.
“원장님. 핸드폰을 왜 주시는 건지?”
“번호 찍어 주세요. 제가 이따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그, 그 말은…….”
“도와드릴게요.”
태경은 여전히 슬픔과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그의 가족들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지금도 고통 속에 있을 아이의 아픔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정말로 도와주신다고 말씀하신 건가요?”
이재산은 도와주겠다는 태경의 말이 믿기지 않은 듯 멍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아내에게 꼭 의사를 데려오겠다고 확실하게 말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언론에도 나오고 얼굴이 알려진 유명 의사였기에 만날 수 있을까, 만나도 자기 말을 들어는 줄까 싶었다.
거절당하면 무식해 보여도 내일도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도와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흔쾌히 도와주겠다는 태경을 보며 의아스러우면서도 무거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원장님 감사합니다.”
이재산은 땅에 머리가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직 태경이 딸을 직접 본 것이 아니지만, 도와준다고 수락한 것만으로 뭔가 희망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면 허리 아파요. 그만하고 어서 번호부터 찍어 주세요.”
“저기! 원장님?”
이재산이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잡으려던 찰나, 최 팀장이 목소리를 높이며 다가왔다.
“네, 팀장님.”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응급환자예요?”
최 팀장이 이재산에게 양해를 구하며 진료실 밖으로 나가자 태경은 급한 환자 때문인 줄 알았다.
“아니요.”
최 팀장은 진료실과 연결된 처치실 문으로 방금 막 들어온 상태였다.
이재산이 접수처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작은 소란을 부렸기에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경이 핸드폰을 내밀며 번호를 찍어 달라고 하자 말리려고 급히 다가온 것이다.
“핸드폰을 주면서 이따 연락하겠다는 건 지금 저 사람한테 개인번호를 주는 거랑 똑같은 거고, 그 말은 원장님 개인번호를 알려 주는 행위랑 같은 겁니다.”
“네, 알고 있어요.”
의료진이 자신의 개인 번호를 알려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언제 어떤 식으로 악용될지 모르는 일이었고,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이 올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환자를 돌봐야 하는 의사에게는 절대 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절박하고 도움이 절실한 환자에게 번호를 준 일이 태경에게는 처음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큰일이 아니었다.
“전 원장님께서 번호를 안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막말로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개인 번호를 줬다가 안 좋은 일이라고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안타까운 사정이 있어서 그렇지 이상한 사람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재산의 사연을 알지 못하는 최 팀장의 입장에서는 태경을 걱정하며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최 팀장을 밖으로 내보내고 태경은 이재산이 알려 준 그의 핸드폰 번호를 저장했다.
“제가 환자 진료 보고 연락드린 후 집으로 찾아갈게요.”
“네, 원장님. 꼭 연락해 주셔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재산은 몇 번이나 고마운 마음을 전한 뒤 병원을 나갔다.
“원장님? 팀장님한테 들었는데 방금 나간 남자 집으로 가서 환자를 보신다는 게 사실이에요?”
태경이 진료실 밖으로 나오자 임정숙 간호사와 최 팀장이 다가왔다.
“네, 맞아요.”
“아니, 왜요? 그 남자가 무슨 말을 했길래 굳이 집으로 가서 진료 보시겠다는 거예요?”
임정숙 간호사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는 원장님께서 괜찮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나왔지만, 저도 반대입니다. 그러다가 괜히 원장님께서 곤란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두 분 마음 충분히 알아요. 환자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이 이제는 집까지 찾아가려 하니까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그런데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어요.”
“네!? 이유라니…….”
“원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남자분의 아이가 신화대병원에서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태경은 임정숙 간호사와 최 팀장에게 이재산의 안타까운 사정을 설명했다.
“아이라면……. 혹시 남자아이 독감 사건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 맞아요.”
임정숙 간호사는 그때 신화대병원에 근무하던 동료 간호사로부터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 일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의료사고의 당사자가 아이였기에 의료인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일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임정숙 간호사와 최 팀장은 의료사고로 아이를 잃은 이새산의 사정을 듣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키우는 부모였기에 그 심정이 얼마나 참담한지 가늠할 수 있었다.
“제 행동이 다른 의사들보다 유별날 수도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걸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요. 만약 여기서 내가 거절하면 부부는 또 한 번 마음에 상처를 받을 거예요.”
“원장님 말씀 무슨 뜻인지 잘 알았습니다.”
임정숙 간호사와 최 팀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준비하고 외래 바로 시작하죠.”
“저기 원장님. 그런데 어머니 아직 안 가신 거 아니에요?”
“아! 맞다.”
이재산 일에 집중하고 있던 태경은 그제야 잊고 있던 어머니가 생각나 급하게 입구 밖으로 나갔다.
“내가 오늘 의진 씨 덕분에 즐거운 시간 보내고 가네. 정말 고마워요.”
“저도 즐거웠어요.”
밖으로 나오자 이 여사가 집에 가려는 듯 때마침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가시려고요?”
“어, 태경아. 이제 그만 가 봐야지.”
“전, 먼저 들어가 볼게요. 어머니 다음에 또 봬요. 조심히 잘 들어가세요.”
“그래요. 오늘 만나서 너무 반가웠고 우리 또 봐요. 고마워요.”
두 사람이 편하게 인사할 수 있도록 의진은 먼저 병원으로 들어갔다.
“모처럼 오셨는데 환자랑 이야기하느라 우리 이 여사랑 대화도 잘 못 했네.”
“얘는 별소리를 다 해요. 엄마는 오늘 너 말고 의진 씨랑 얘기할 수 있어서 더 좋아.”
내심 오늘도 의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이 여사는 오랜만에 본 아들보다 예비 며느리와의 만남이 훨씬 더 좋았다.
“안 그래도 이야기하는 동안 너 빨리 나오면 어쩌나 싶어서 속으로 늦게 나오라고 했다니까.”
“그 정도로 좋았어요?”
“그럼. 사람이 아주 야무지고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태경아?”
“네?”
“엄마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여자는 생각보다 사소한 거에 감동하는 거야. 잘해 줘. 알았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당연히 잘해 줘야죠.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엄마 간다.”
“택시 불러 드릴게요.”
“이미 의진 씨가 정문 앞으로 불러 줬어. 도착할 때 됐어. 얼른 들어가.”
“네, 조심히 가시고 도착하면 연락 주세요.”
“그래. 우리 아들 힘내라.”
이 여사의 흐뭇한 표정을 보며 태경은 병원으로 들어와 외래 진료를 시작했다.
“환자분 들여보내 주세요.”
“네, 원장님.”
그렇게 외래 진료와 병원 곳곳을 돌며 몇 시간 동안 열심히 진료를 본 뒤 저녁 식사 시간이 찾아왔다.
똑똑-
“원장님 식사하러 안 가세요?”
“먼저 하세요.”
“네.”
임정숙 간호사가 진료실을 나간 뒤 태경은 이재산이 알려 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