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01화 (400/472)

401화. 안쪽에서 보이는 붉은 기

임정숙 간호사가 진료실을 나간 뒤 태경은 이재산이 알려 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첫 번째 신호음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이재산이 전화를 받았다.

-원장님이세요?

“네, 김태경입니다.”

-하!

병원에서 나간 뒤, 종일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휴대폰 너머로 태경의 목소리가 들리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지금 퇴근하셨나요?”

-네. 전, 아까 병원에서 나와서 바로 집으로 왔습니다.

“혹시 어머님께서도 집에 계세요?”

-어머니는 오늘 저녁 약속이 있으셔서 좀 늦으실 겁니다.

“잘됐네요.”

-예?

“그럼 제가 지금 집으로 갈 테니까 주소를 좀 알려 주세요.”

-아닙니다. 원장님, 오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제가 당장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이재산은 고마운 마음에 직접 데리러 가려 했지만, 태경은 거절했다.

“보호자분께서 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리니까 제가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원장님, 바로 주소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이재산과 전화를 끊은 태경은 급한 환자가 없는지 체크한 뒤 직원들에게 전달 사항을 알려 주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선배? 잠시만요.”

의진이 차에 막 타려는 태경을 향해 뛰어왔다.

“이거 가져가요.”

“이게 뭐야?”

“여사님이 김밥 만들어 주셨어요.”

의진은 저녁도 못 먹은 태경에게 식당 오 여사가 만든 김밥과 된장국이 담긴 도시락을 건넸다.

아무리 도움이 필요한 환자 일이라고 해도 진료 시간에 병원을 비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이재산의 집이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태경은 저녁 먹을 시간을 쪼개서 아이를 보러 가기로 한 것이다.

“옆 좌석에 펼쳐 놓고 신호 걸릴 때마다 하나씩 먹어요.”

“이따 먹어도 되고 한 끼 안 먹는다고 무슨 일 생기는 것도 아닌데…….”

“직원들이 밥 조금만 늦게 먹어도 벌벌 떨면서 무슨……. 그리고 병원에서 일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 선배거든요?”

“미안해서 그러지. 잘 먹을게. 고마워.”

“선배,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요.”

“갔다 올게.”

“운전 조심해요.”

태경은 의진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다.

* * *

이재산의 집-

“작은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많이 상했슴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아픈 사람을 간호하려면 보호자가 건강해야 합니다.”

부부의 사정을 알게 된 후 가정부는 시어머니를 완벽하게 속이며 두 사람의 지원군이 되어 전보다 더 살뜰하게 가족들을 챙겼다.

“식사 때마다 잘 못 드신 건데 그러면 안 됩니다. 진이를 생각해서라도 고조 날래 마음 강하게 먹고 밥도 팍팍 드시라요. 그리고 먹고 싶은 게 있으시면 뭐가 됐든 다 저한테 알려 주시면 제가 해 드리겠슴다.”

“네, 아주머니 앞으로는 밥 열심히 잘 먹을게요. 감사해요.”

“아님다.”

김연주는 가정부가 개어 놓은 아이의 옷을 들고 딸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딸은 몸이 아픈 뒤로 자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옷장 서랍에 옷을 넣고 침대로 걸어갔다.

또래보다 작은 체구의 딸은 오늘도 애착 인형들과 함께 잠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늘 함께하는 인형이었는데 하나는 하늘나라로 간 오빠가 사 준 거였고, 하나는 부부가 사 준 거였다.

딸은 많은 장난감 중에서도 두 인형을 가장 아꼈다.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던 김연주는 인형 때문에 고개가 불편해 보이는 딸의 자세를 고쳐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습기의 분사력을 조절하기 위해 책상으로 다가가자 어지럽게 놓여 있는 색연필이 보였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딸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림을 그렸다.

하나둘씩 색깔별로 색연필을 정리하던 그때 스케치북이 눈에 띄었다.

“……!”

그걸 본 순간, 김연주의 눈물샘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그림은 아빠, 엄마, 할머니가 집 안에 있었고 구름 위에는 머리에 노란색 둥근 띠와 날개를 달고 있는 오빠의 모습이 보였으며 역시나 딸의 머리 위에도 노란색 띠와 어깨에 날개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림 한쪽에는 딸이 쓴 글이 보였는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나는 아빠랑 엄마를 많이 사랑한다. 할머니도 좋아한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오빠도 많이 사랑한다.

그런데 나 때문에 아빠 엄마가 힘들어한다.

우리 엄마는 웃는 얼굴이 예쁜데 엄마는 내가 아파서 웃지 않는다. 나 때문에 엄마가 우는 게 싫다. 나 때문에 아빠가 힘든 게 싫다.

나 때문에 할머니가 아빠, 엄마랑 다투는 게 싫다.

나도 오빠처럼 천사가 되면 그땐 아빠 엄마가 힘들지 않을까?

내가 하늘나라에서 우리 가족들을 지켜 주면 좋을 텐데…….

엄마, 아빠 아파서 미안해.

“아!”

딸의 속마음이 담긴 글을 읽은 김연주는 억장이 무너지며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흐윽!”

어린 딸이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아픈 와중에도 가족들은 걱정한 딸에게 너무 미안했다.

할 수만 있다면 본인이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이었다.

“엄……마?”

잠결에 뒤척이던 진이는 김연주의 흐느끼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 우리 진이 잠 깼어?”

“엄마 울어?”

딸의 목소리에 놀란 김연주가 부랴부랴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쳤지만, 진이는 엄마가 울고 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니야, 엄마 안 울어. 엄마가 옷 넣어 두려고 들어왔는데 괜히 진이 잠만 깨웠네.”

“거짓말. 엄마 울고 있잖아. 여기…….”

엄마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작은 손으로 닦은 진이가 이어 말했다.

“눈물이 나는데? 엄마 또 나 때문에 우는 거지?”

“아니야.”

“내가 미안해.”

“왜? 진이가 미안해. 엄마, 진이 때문에 운 거 아니야. 우리 딸 아픈데 엄마가 해 준 게 없어서 그래서 미안해서 그래.”

“나는 괜찮아. 엄마, 아빠, 할머니가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픈 게 나은 거 같아.”

“그런 말 하지 마. 우리 딸 아픈 거 꼭 나을 거야. 엄마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리고 진이 엄마랑 약속 하나만 할까?”

“뭔데?”

“아까 책상 위에 그림이랑 진이가 쓴 글 봤어. 앞으로는 하늘나라 간다는 생각 절대 하지 마. 알았지? 엄마, 아빠, 할머니는 진이 없으면 못 살아. 진이가 그런 생각하면 엄마 속상해.”

“응. 알았어. 이제 그런 생각 안 할게. 약속.”

진이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더 이상 안 좋은 생각은 하지 않기로 엄마와 약속했다.

“엄마 있잖아. 나 아픈 거 다 나으면 동물원 갈 수 있어?”

“진이 동물원 가고 싶어?”

“응. 가서 펭귄도 보고 판다도 보고 호랑이도 보고 싶어.”

“당연히 갈 수 있지. 몸 괜찮아지면 가족들 다 같이 가자.”

“정말?”

“그럼. 또 가고 싶은 데 있어?”

“물고기도 보고 싶고 친구들이랑 놀고 싶고 놀이동산도 가고 싶어.”

“가고 싶은 곳 엄마가 다 데려가 줄게.”

“와! 엄마 최고! 빨리 안 아프면 좋겠다.”

“그렇게 될 거야. 우리 진이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빨리 나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엄마 손은 약손.”

“맞아. 엄마 손은 약손이야. 엄마가 배 만져 주면 안 아픈 거 같아.”

똑똑-

“작은 사모님 접니다.”

김연주가 딸을 꼭 끌어안으며 딸이 아프지 않기를 빌고 있던 그때 가정부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주머니.”

“손님이 오셨는데 잠시 내려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알겠어요.”

“진아, 엄마 잠깐 내려갔다 올게. 아주머니랑 같이 있을 수 있지?”

“응.”

“진이 책 읽어 줄까?”

“네, 좋아요.”

손님이라는 말에 김연주는 가정부에게 딸을 맡기며 1층으로 내려갔다.

“여보, 원장님 오셨어.”

1층으로 내려온 김연주는 이재산 옆에 서 있는 태경을 보고 멈칫했다.

“……!”

몇 시간 전, 퇴근한 남편으로부터 의사가 온다는 말을 들었지만, 남편이 속은 건 아닌가 싶었다.

언론에도 나오고 얼굴이 알려진 바쁜 의사가 설마 진짜로 집에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의사 김태경에 관한 수많은 미담을 보며 반드시 이 의사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실제로 눈앞에 있다니 믿겨지지 않았다.

“정말 오시다니……. 여보, 정말 이분께서 오셨어.”

“그래. 내가 오실 거라고 했잖아. 원장님, 이쪽은 제 와이프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연주라고 해요. 바쁘실 텐데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남편분에게 사정을 들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진이를 좀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네, 그럼요. 이쪽 오세요.”

태경은 두 사람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아이가 원래는 안 그랬는데 아프고 나서 낯을 좀 가리고 좀 예민해졌어요.”

“어른들도 아프면 예민해지는데 아이들은 더 그럴 수 있죠. 제가 놀라지 않게 잘 보겠습니다.”

김연주가 방으로 들어간 뒤 가정부가 1층으로 내려가고 방문이 열리자, 진이는 엄마 옆에 꼭 붙어 서서 태경을 빤히 쳐다봤다.

“엄마. 저 아저씨 누구야?”

하얀 피부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아이가 물었다.

어린아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그 특유의 생기 넘치는 에너지가 진이에게는 없었다.

“저분은 아빠 아는 분인데 진이에게 인사한다고 오셨어.”

“진이 안녕.”

태경은 일부러 의사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이재산에게 딸아이도 병원과 의사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 있다고 들었다.

지금까지 가족들이 병원을 불신하는 모습을 봐 온 아이였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게 맞았다.

“아아!”

태경이 아이에게 다가가려 하자 낯선 사람을 보고 놀란 진이가 엄마 뒤로 숨으려 했다.

“저 아저씨가 우리 진이 아픈 곳을 좀 보고 도움을 주려고 하는데 괜찮을까?”

“아니, 싫어.”

보다 못한 김연주가 딸을 달래며 말했지만, 아이는 아직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놀랐구나. 미안해라. 그럼 아저씨가 여기서 진이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건 괜찮아?”

방문을 경계선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태경이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허락을 구하자 그제야 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경의 눈빛에 걱정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시진과 더불어 촉진도 해 봐야 더 많은 정보를 알 수가 있는데 낯을 가리는 아이 때문에 접촉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 안을 들어올 때부터 느껴지는 다섯 번째 바이탈이 상당히 거슬렸다.

아이에게서 풍기는 분뇨 냄새는 지독하다 못해 역하기까지 했고 중간중간 포르말린 냄새도 섞여 있었다.

3단계 중에서도 하위 등급이며 아마도 아이의 상태가 4단계로 넘어가려는 듯 보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오롯이 포르말린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아이가 안 좋기는 하지만 아직은 절망적이지 않다는 의미였다.

태경은 매의 눈으로 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관찰했다.

분명한 건, 절망적이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누가 봐도 힘겨워 보였다.

아직 식사는 하는 편인지 살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배가 볼록 튀어나왔고 통증을 느끼는지 이따금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좀 더 자세히 보니 기저귀를 차고 있었는데 안쪽에서 물든 붉은 기가 밖으로 살짝 보였다.

‘혈뇨에 복부종괴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