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의료법 위반
좀 더 자세히 보니 기저귀를 차고 있었는데 안쪽에서 물든 붉은 기가 밖으로 살짝 보였다.
‘혈뇨에 복부종괴면…….’
태경은 머릿속이 복잡해진 반면 동시에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태경은 한 일주일쯤 시어머니란 사람의 환심을 사서 잘 설득해 보고 안 되면 경찰 등 공권력이라도 동원할 생각이었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환자는 어린아이였기에 그 정도로 강한 방법까지 염두에 뒀다.
하지만 시간이 없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런 절차를 진행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이상은 걸린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학대임을 신고하는 것과 집행이 되어 아이를 부모의 동의 없이 수술시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집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눴을 때 이재산도 아직은 이런 방법을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태경 역시 사실 아이의 할머니를 그렇게 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를 물리적으로 때려야만 학대가 아니다.
지금 저 아이의 고통이 방치되고 있는 것 또한 정확히 따져 묻는다면 학대의 일종이 맞았다.
하지만 손자의 사고로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렇게 되었을지 짐작됐기에 어쩔 수 없었다.
“저, 원장님. 진이 상태가 어떤가요?”
방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긴 후 이재산이 물었다.
“아이 상태가 많이 좋지 않습니다.”
“얼마나 안 좋은가요?”
“저 상태로 계…….”
태경이 뭔가 말을 꺼내려 하던 바로 그때였다.
“어머나! 세상에!”
계단에서 1층에 있던 가정부의 놀란 목소리가 계단을 통해 들려왔다.
“아니, 연길댁.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크, 큰 사모님. 오늘 늦게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슴까?”
“그랬지.”
가정부는 2층에 있는 이재산과 김연주에게 알려 주려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크게 말했고, ‘큰 사모님’이란 말에 부부는 깜짝 놀라며 서로를 쳐다봤다.
“여보, 어머님 오셨어. 어떡해?”
김연주가 남편을 향해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재산은 순간 자신이 착각한 건 아닌지 핸드폰으로 어머니의 일정표를 확인했고, 틀리지 않았다.
분명 오늘은 어머니의 저녁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진이가 아픈 뒤로 어지간해서는 외부 활동을 자제했지만, 오늘은 중요한 자리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재산은 이런 기회가 다시없을 것만 같아 어머니가 없을 때 태경을 데려오려고 그렇게 병원에서 애걸복걸했던 거였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어머니가 너무 빨리 돌아왔다. 이재산과 아내는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가정부와 어머니의 대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녁도 드시고 늦게 오시는 거로 알았는데 왜 이리 빨리 오셨슴니까?”
“진이가 눈에 밟혀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들어가질 않아.”
“그러면 식사를 얼른 준비할까요?”
“대충 때웠어. 그보다 진이는 좀 괜찮……. 그런데 연길댁?”
“네, 큰 사모님.”
“못 보던 신발인데 집에 손님 오셨나?”
“그게…….”
“어머님 오셨어요?”
가정부가 머뭇머뭇하는 사이 이층에 있던 김연주가 내려왔다.
“일찍 오셨네요. 저녁은 드셨어요?”
“저녁은 괜찮다. 연주야, 집에 손님 오셨니?”
“아, 네. 손님이 오셨어요.”
“이 시간에 손님? 누구?”
“제 손님이 오셨어요.”
고 여사의 거듭된 질문에 2층에 있던 이재산이 태경과 함께 내려오며 말했다.
“아범 손님이시라고?”
“안녕하세요. 김태경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고 여사는 적당한 미소를 보이며 인사하는 태경을 위아래로 훑은 뒤 인사했다.
“아범 친구는 아닌 거 같고 누구신지…….”
“재산 씨하고는 우연히 알게 된 사람입니다.”
“아, 그러세요. 손님을 계속 서 계시게 하면 안 되지. 서 있지 마시고 여기 좀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친절한 말투와 교양이 넘치는 행동과 다르게 고 여사의 눈빛은 경계심이 느껴졌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그리며 거실 소파로 태경을 안내하며 말을 이었다.
“연길댁 마실 것 좀 부탁해.”
“아주머니, 제가 할게요. 진이 좀.”
“네, 작은 사모님.”
가정부가 2층에 있는 아이 방으로 올라가고, 주방에서 음료를 내온 김연주가 이재산 옆에 앉았다.
“원……! 이것 좀 드세요.”
순간, 원장님이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김연주가 재빠르게 말을 바꾸며 주스가 담긴 컵을 태경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아까 우연히 알게 된 분이라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아범이 신중한 성격이라 우연히 만난 사람과 친분을 쌓는 사람이 아닌데…….”
“아니에요. 어머니. 오다가다 알게 된 분이신데 정말 좋은 분이세요.”
“그래? 우연이라는 말은 너무 포괄적인데……. 아범, 이분과는 어떻게 알게 된 거니?”
“그게…….”
“저는 작은 법인의 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초조한 분위기 속에 생각지 못한 질문을 들은 이재산이 잠시 멍해 있던 찰나, 옆에 있던 태경이 자연스럽게 질문의 답을 이어 나갔다.
“여기 계시는 아드님과는 저희 법인에 오셔서 알게 되었고요.”
“맞아. 내가 잠시 여기 계시는 분의 법인에서 도움을 받았거든.”
“맞습니다.”
태경이 한 말은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다. 병원도 엄연한 법인이고 태경은 그곳의 수장이니까 맞는 말이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네. 화장실은 오른쪽으로 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태경이 화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침착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심각함으로 바뀌었다.
뭔가 볼일이 급해서 화장실로 들어온 게 아니었다. 아이 때문이었다.
진이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고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뭘 할 수가 없었기에 태경은 이재산과 소통하기 위해 급히 화장실을 찾은 것이다.
-보호자분, 아이 상태가 안 좋습니다. 아이의 치료를 위해 어머님께 사실대로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원장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태경이 갑자기 화장실을 가서 그런 건지 아니면 눈짓을 보내서 그런 건지 문자를 보내자마자 이재산의 답장이 바로 왔다.
-어머니는 어떤 식으로 말해도 어차피 반대하실 텐데, 계속 숨길 수도 없고 빨리 말하고 설득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바로 나갈게요.
빠르게 문자를 주고받은 태경이 자리로 돌아오자 고 여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아까 보니까 이분이 2층에서 내려오시던데 2층에는 왜 가신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마음을 굳힌 이재산이 결심한 듯 심오한 표정으로 고 여사를 쳐다봤다.
“2층에서 진이를 보러 갔었어요.”
“진이를 이분이 왜 보니? 이분이 뭔데?”
“의사 선생님이세요.”
“뭐!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의사! 이 사람이 의사라고? 그럼 집에서 진료 보려고 의사를 불렀다는 거야?”
“네, 맞아요.”
“어머님. 지금 진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함께 앉아 있던 김연주 역시 거들었다.
“우리 진이가 아픈 걸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너희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니?”
“어머니. 그게…….”
“흑!”
예상했던 것보다 심하지 않은 고 여사의 반응을 보며 이재산이 더 강하게 설득하려 하던 그때였다.
“흐윽!”
고 여사가 눈물을 쏟으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떻게 집에 의사를…… 흑!”
“……!”
분명 목소리를 높이고 고성이 오갈 것이라고 확신한 거와 달리 너무나 서럽게 우는 고 여사를 보며 아들 내외는 물론 태경 역시 당황했다.
“어르신,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있던 태경은 이런 분위기라면 오히려 설득하기 쉽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꺼냈다.
“아니요. 됐습니다.”
그런데 고 여사의 다음 행동에 세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쪽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태경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한 고 여사가 그래도 집을 나가 버린 것이다.
“어머니!”
당황한 이재산이 큰 소리로 불러봤지만, 이미 나간 뒤였다.
“여보, 어머님 밖으로 나가셨어. 많이 놀라셨나 봐. 어떻게 해?”
“일단 원장님이랑 이야기 마무리 짓고 내가 나가 볼게.”
이재산은 오히려 어머니가 집 밖으로 나간 게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생각했다.
바쁜 태경이 집까지 와 줬는데 소란스러운 것보다 조용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솔직히 이 자리에 어머니가 계속 있었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진이의 대한 이야기를 하며 15분 정도 시간이 흐르고 있던 그때 밖으로 나갔던 고 여사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
“여기예요.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그런데 혼자 집을 나갔던 고 여사는 혼자 돌아오지 않았고, 놀랍게도 경찰관과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지구대에서 나왔습니다.”
고 여사가 급하게 집을 나간 이유는 인근 지구대로 가서 경찰을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신고받고 출동했는데 여기 계신 분이 어머님 맞으세요?”
“아, 예. 제 어머니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방금 말씀드린 대로 어머님께서 신고하셔서 동행했습니다.”
“신고요? 무슨 신고요?”
“어머님께서 그러시는데 모르는 남자가 집에 들어와서 손녀딸을 위험에 빠뜨리려 한다고 신고하셨어요.”
“네!?”
“……!”
경찰이 집에 온 것도 놀라운데 직접 들은 신고 사유를 들은 세 사람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진이를 위험에 빠뜨리다니요. 어머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이재산은 어머니가 집을 나가기 전, 예상과 달리 우는 모습을 보고 내심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미안함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 모습을 보니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뭐하다니? 보면 모르니. 너랑 연주가 내 귀한 손녀한테 저 사람을 데려왔잖아!”
고 여사는 날 선 눈빛으로 태경에게 손가락질하며 날카롭게 답했다.
“저분은 진이를 위험해 빠뜨릴 분이 아니라 도와줄 분이라고요. 어머니 진이한테 시간이 없어요.”
“그걸 아는 사람이 저런 사람을 데려와? 너희 산이 일 잊었어? 산이가! 우리 장손이 왜 죽었는데? 연주 네가 한번 말해 봐. 어?”
아들 내외가 자기에게 상의도 없이 벌인 일에 화가 난 고 여사는 급기야 김연주에게 화살을 돌리며 며느리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기침하는 애들 쓸데없이 병원에 데려가서 죽게 만들었으면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고! 이게 맞는다고 생각해? 이러다가 정말 진이가 잘못되면 너 감당할 수 있겠니?”
“어머님, 산이 일로 상처받고 속상하신 거 알아요.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진이가 많이 아파요. 더 이상 이대로 둘 수만은 없었어요. 산이가 제 꿈에 나와서 진이 꼭 낫게 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어요. 어머니 저희 이제 그만하고 진이만 생각해요.”
“난 지금도 우리 진이만 생각하고 있어. 너희가 진짜 딸을 생각한다면 당장 저 사람 내보내. 어서!”
김연주가 절절한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설득하고 나섰지만, 쉽지 않았다.
“경찰 선생님. 빨리 저 사람 내 집에서 내쫓아 주세요. 아니, 잡아가세요.”
“할머님, 일단 진정 좀 하시고요.”
“진정하고 말 것도 없어요. 이봐! 당신,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어서!”
“아니요. 못 나갑니다.”
고 여사의 날 선 언행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태경이 침착하게 답했다.
“뭐라고? 못 나가?”
“네, 못 나갑니다.”
“당신, 계속 그렇게 버티고 있으면 내가 방문 진료로 인한 의료법 위반으로 고소할 거야.”
단호한 태경의 답에 눈매가 일그러진 고 여사는 급기야 고소를 운운하며 아들 내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