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04화 (403/472)

404화. 괴물 같은 존재

무서울 정도의 차분한 어조로 흘러나온 죽는다는 말에 고 여사를 포함한 이재산과 김연주까지 놀란 표정으로 태경을 주목했다.

“제가 이 자리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리는데, 이대로 두면 할머니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는 손녀딸이 반드시 죽는다고 말하는 겁니다.”

“……!”

죽는다는 말에 고 여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거 봐요! 의사 양반. 죽는다니? 당신 말이 너무 지나치…….”

“아니요! 전혀 지나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태경이 고 여사의 말을 끊고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하자, 사람들은 표정과 눈빛을 보고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됐다.

“우리 진이가 죽긴 왜 죽어! 당신이 뭔데 그런 소리를 해!”

고 여사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다시 목청을 높였고, 그녀의 행동은 당연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세상 어느 누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죽는다는 표현이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그만큼 진이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직접적으로 표현한 거였다.

“할머니는 진이를 살리고 싶지 않으신가요? 사랑하는 손녀딸이 예전처럼 아프지 않고 건강하길 바라지 않아요? 아이는 지금 매 순간, 순간 힘겨워하고 있어요.”

“어머니. 우리 원장님 말씀 들어야 해요.”

“어머님! 부탁드려요.”

“진이를 위해서는 내 목숨도 줄 수 있어! 그런데 병원도 결국 자기들 이익이 목적이고 환자들을 환자로 생각하기보다는 돈벌이 수단으로 알고 멀쩡한 사람 죽이기나 하는 곳이라고.”

고 여사는 속이 상한 듯 아직도 태경을 경계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런 곳에 우리 진이를 어떻게 보내. 내가 보기에는 당신도 다 똑같아.”

“아니요. 전 다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경이 반격하듯 답했다.

“전,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의술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못 하는 것은 다른 의사도 못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늘 겸손함으로 일관하던 태경의 입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실력을 확신하는 말이 나왔다.

없는 말을 함부로 떠드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잘난 척과 허세는 더더욱 아니었다.

수술방을 들어가기 직전 태경은 자기 실력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고 환자 몸에 있는 병을 고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단 한 번도 잘난 척을 하지 않고 늘 겸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고 여사에게 손녀딸을 반드시 고칠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을 보여 줘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할 때 흔히 때가 있다는 말을 쓴다.

공부할 때, 일할 때, 쉴 때 등 그 시기에 맞는 적절한 때가 있는 것이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환자에게도 치료할 수 있는 때라는 게 있다.

그 때를 놓치면 아무리 환자를 살리고 싶어도, 그 어떤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천재적인 실력이 있는 의사가 와도 인간의 힘으로는 살릴 수 없게 된다.

태경은 이런 안타까운 일을 겪은 환자들을 봤기 때문에 더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2층에서 병마로 힘들어하는 진이의 상황이 바로 이랬다.

무엇보다 지금 이때를 넘기면 아이의 치료는 더 이상 힘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락없이 가족들은 또다시 아이를 잃어야 할 것이다.

태경은 가족들이 그 고통을 다시 느끼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심 없이 뛰어놀아야 할 아이가 병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아이가 계속 저 상태로 있으면 병으로 인해 죽습니다. 어차피 죽을 아이라면 한번 시도를 해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태경은 일부러 말을 끊었다.

고 여사가 반드시 알아야 하고 몇 번이나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기가 진이를 치료할 수 있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요.”

“우리 진이가 죽다니……. 죽긴 누가 죽어! 진이마저 없으면 난 못 산다. 난 못 살아…….”

다행히 고 여사의 날 선 반응이 조금 줄어드는 게 보였다. 격한 설득이 헛되지 않은 순간이었다.

‘잘됐다. 할머니가 반응하고 있어.’

환자와 보호자를 숱하게 상대했던 태경은 한 번만 더 알아듣게 설득하면 할머니의 마음을 어느 정도 돌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전문 분야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처럼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약간의 기술이 있다.

보통 사람이 이렇게 비이성적이고 논리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할 때는 본인도 어느 정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다만 상처가 너무 깊어서 그것을 외면하는 것뿐이다.

이럴 때는 당사자가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특정 요건만 충족시켜 주면 이성적인 행동들을 유도할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금 고 여사는 의사나 태경이 싫은 것보다 병원이라는 그 장소에 대한 트라우마가 더 강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방금 고 여사의 반응으로 태경은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두렵고 무섭지만, 고 여사도 아이를 치료해야 함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그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제가 진이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설득의 쐐기를 박기 위해서 태경이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네며 고 여사에게 다가가던 바로 그때였다.

“엄마아…….”

2층 방에 있던 진이가 내려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모두에게 말했다.

“진이야? 왜 내려왔어?”

“제가 잠시 화장실 간 사이에 진이가 내려왔나 봅니다.”

2층에 있던 가정부가 급하게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엄마?”

가정부가 다시 데리고 올라가려고 하자 어린 진이는 엄마를 올려다봤다.

“아주머니 괜찮아요. 우리 진이 엄마한테 할 말 있어?”

“아빠?”

“응.”

고개를 끄덕이던 진이는 이재산과 고 여사가 있는 쪽으로 가서 두 사람을 차례로 쳐다보며 불렀다.

“할머니.”

“어, 우리 강아지 왜?”

“싸우지 마세요.”

2층에서 격해진 어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진이는 싸움을 말리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다.

“나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진이가 아파서 미안해요. 나도 아프고 싶지 않은데……. 내 마음대로 안 돼요.”

아이들은 한집에서 같이 사는 어른들이 싸우면 정서적으로 불안함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낀다.

사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고 해도 함께 살면서 부부싸움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부싸움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있는데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절대 아이 앞에서는 싸움을 피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부부싸움은 아이들이 없을 때 하라고 조언한다.

단순히 부부싸움뿐만 아니라 집 안에서 부부 외에 할머니나, 할아버지 등 다른 어른이 함께 산다면 그 또한 아이 앞에서는 싸움을 하지 않아야 한다.

어른들이 싸우는 동안 그 감정을 아이들이 고스란히 받으며 정서적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진이도 그랬다.

요즘 아빠와 엄마가 대화할 때면 전과 다르게 심각해졌고, 할머니와 대화하기만 하면 1층에서부터 큰 소리가 들려와 몇 번이나 움찔하게 만들었다.

진이는 어른들이 싸우는 게 싫었다. 정말 싫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노래하는 장난감을 틀어도 그 소리가 다 들려서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처럼 목소리가 높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진이는 이러다가 엄마가 또 몰래 울게 될까 봐, 할머니와 아빠가 또 며칠씩 말을 하지 않을까 봐 걱정됐다.

그래서 아픈데도 불구하고 싸움을 말리기 위해 1층으로 내려온 것이다.

아픈 것도 싫었지만, 어른들의 싸움은 더 싫었다.

“다들 싸우지 마세요. 할머니, 아빠랑 엄마 미워하지 마세요.”

“아빠랑 엄마를 미워하다니……. 할머니는 아빠 엄마 미워하지 않아.”

“그런데 왜 싸워요? 싸움은 미워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잖아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싸우지 않는다고 책에서 그랬어요. 내가 아파서 싸우는 거죠?”

“아니야. 아가. 그런 게 아니야.”

“나도 빨리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진이 곧 안 아프게 될 거야.”

“……계속 아프면요?”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하다 말한 진이의 말에 고 여사와 부부는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진이가 왜 계속 아파?”

“그래, 우리 딸 이제 곧 안 아프게 될 거야.”

“당연하지. 엄마, 아빠 말대로 우리 강아지 이제 건강해질 거야.”

“아빠랑 엄마랑 할머니가 지금까지 계속 아프지 않게 했는데도 계속 아프잖아요.”

방금 진이의 말을 듣고 있던 고 여사는 조금 전보다 더 크게 놀라며 멍한 표정을 보였다.

사실 어린 진이도 알고 있었다.

아픈 자기 몸을 낫게 하기 위해 아빠가, 엄마가, 할머니가 그토록 노력하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몸은 여전히 아팠다.

“할머니. 나 그만 아프고 싶어요.”

“진아, 할머니가 미안하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는 손녀를 보며 고 여사는 지금까지 본인이 아들, 며느리와 얼마나 부질없는 싸움을 했는지 깨달았다.

결국 아들, 며느리의 말이 맞았다. 그렇게 수많은 방법을 써도 진이는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마음속 두려움 때문에 진이의 입장을 제대로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진아, 할머니가 약속할게. 우리 진이 꼭 낫게 할 거야.”

태경의 강한 설득으로 고집의 균열이 생겼던 고 여사는 결국 손녀의 말 한마디의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정말…….”

손녀를 쳐다보고 있던 안타까운 시선이 태경을 향하고, 이윽고 고 여사가 결심한 듯 말했다.

“정말 우리 손녀 살릴 수 있는 건가요?”

“살릴 수 있습니다.”

“난 아직도 병원이라면 치가 떨리게 싫은 사람입니다. 원장님께서 그렇게 자신하셨으니까 반드시 고쳐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어머님 감사해요.”

“지금은 진이만 생각하자꾸나.”

마음을 바꿔 준 시어머니에게 고마움을 표한 김연주는 딸아이의 손을 잡았다.

“진이야, 우리 진이 아픈 거 고칠 수 있어. 아까 인사했던 여기, 아저씨 기억하지?”

“응. 기억해.”

진이는 대답하면서 태경을 힐끗 쳐다봤다.

“저 아저씨가 우리 진이 아픈 거 고쳐 주실 거야.”

“아저씨가?”

“응.”

“진아, 아저씨는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을 하고 있어.”

태경이 진이를 보며 부드럽게 답했다.

“그럼 아저씨는 의사 선생님이에요?”

“맞아, 아저씨 직업은 의사야. 선생님이 진이 아픈 거 치료 잘해서 낫게 해 줄게.”

“선생님 말씀 들었지? 내일 엄마랑 여기 선생님이 계시는 병원에 가서 우리 진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검사하고 아픈 곳을 치료해 주실 거야.”

“병……원 가야 해?”

“응. 진이랑 아빠, 엄마, 할머니 다 같이 갈 거야.”

“…….”

대답을 잘하던 딸이 아무 말이 없었다.

“진아?”

김연주기 다시 한번 딸의 이름을 부르자 진이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병원에 가기 싫어요.”

“진아. 괜찮아. 여기 선생님 좋은 분이야.”

갑자기 병원에 간다는 말에 놀란 딸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한 가족들은 곧이어 들려온 아이의 말과 행동에 경악하고 말했다.

“멀쩡한 우리 산이를 죽게 만들었어. 병원에만 가지 않았어도 산이는 죽지 않았을 거야. 병원에 가서 죽은 거야. 진아 앞으로 병원은 절대 가면 안 돼. 병원은 무서운 곳이야. 오빠는 병원에 가서 죽은 거야.”

놀랍게도 진이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은 할머니가 은연중에 아이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반복해서 들은 진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외우게 됐다.

안 그래도 병원에서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목격하고 병원에 대한 두려움이 있던 아이에게 할머니의 말은 그 두려움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병원이란 존재는 아이에게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아 버린 것이다.

“병원! 가기……히익! 싫어요. 무서워요. 진이 병원 안 갈래요. 병원 가면 할머니가 오빠처럼 죽는다고 했어요. 병원 안 갈래……. 흑윽! 엄마!”

두려움을 넘어 공포를 느낌 아이 몸에서는 순간 소변이 흘렀고, 기저귀 옆으로 살짝 흘러나온 혈뇨가 아이의 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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