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05화 (404/472)

405화. 아이의 병명은 뭔가요?

두려움을 넘어 공포를 느낀 아이 몸에서는 순간 소변이 흘렀고, 기저귀 옆으로 살짝 흘러나온 혈뇨가 아이의 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두려움이 극에 달한 아이는 당장이라도 실신할 듯 가쁜 호흡을 보였고 태경과 김연주는 그 즉시 아이를 살피고 달랬다.

“진아, 괜찮아. 선생님이 병원 데려가지 않을게.”

“하! 엄마……! 싫어! 병원……가기 싫어요.”

“우리 진이 말하지 말고, 천천히 숨 쉬어 볼까?”

“하아…….”

“그렇지. 잘하네.”

“진아, 선생님 따라서 숨 쉬어 봐. 봐봐! 엄마도 이렇게 숨 쉬고 있다. 후!”

다행히 아이는 실신하지 않고 상태가 괜찮아졌다.

“병원 가기 싫어요.”

“그래, 안 가. 엄마가 약속할게. 병원 안 갈게. 우리 2층으로 갈까?”

“응.”

김연주는 얼른 진이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갔다.

“얘? 재산아, 아무래도 진이 저 상태로 병원에서 치료받는 건 힘들지 않을까? 애가 저런데 어떻게 병원을 가겠어.”

“또 그 소리! 제발 그만!”

아이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이재산은 어머니의 말에 그동안 참았던 분통을 터트려 버렸다.

물론 방금 전, 고 여사가 한 말은 병원에 대한 불신보다는 진심으로 손녀를 걱정해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딸의 안타까운 모습을 본 그는 어머니의 걱정이 진심으로 와닿지 않았다.

“그동안 애한테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

“어머니 때문에 결국 진이가 이렇게 된 거라고요?”

처음 보는 손녀 모습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고 여사는 곧이어 쏟아진 아들의 날 선 말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재, 재산아……?”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해서 애한테 주입을 시켜요? 병원 가자는 말에 오줌까지 지릴 정도로 애를 저 지경으로 만드셨는데 이제 속이 시원하세요?”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그러니까 네 말은 진이가 아픈 것도 전부 다 내 탓이라는 거야? 맞아?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거니?”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지금 네 말이 그렇잖아. 나는! 나는 뭐 속이 편한 줄 알아? 어! 그래? 내 탓이다.”

“하!”

“산이가 죽은 것도 진이가 저렇게 된 것도 전부 다 내 탓이야. 이제 됐니?”

각자 딸과 손녀의 모습을 보고 감정이 격해진 이재산과 고 여사는 급기야 감정싸움까지 번졌지만, 태경은 아이를 생각하느라 두 사람의 다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금 전, 병원에 간다는 말에 극도로 공포를 느낀 아이의 모습은 가족들뿐만 아니라 태경에게도 충격이었다.

‘아이의 심리상태가 좋지 않아.’

산 넘어 산이라더니 하나 해결하고 났더니 더 큰 일이 생겼다.

아이가 어느 정도 병원을 무서워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하게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지는 몰랐다.

태경은 머리가 복잡했다.

단순히 병원을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아이를 강제로 데려갈 수도 없고 난감했다.

병원에서 수술하기 전, 검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아이가 저런 상태에서는 검사하기도 분명 어려울 것이다.

가끔 수술을 앞두고 긴장하는 환자들이 있다. 그럴 경우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릴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다시 검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병원이라는 장소에서 공포를 느낀 진이는 병원 안에서는 긴장감이 풀어지기란 지금으로서는 힘들어 보였다.

아이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

당장 수술이 시급한 상황이었기에 태경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제가 지금 얼마나 속이 상한 줄 아세요?”

“나도 너 못지않게 속이 상하고 힘들어. 너만 힘든 거 아니라고.”

“이제 그만 진정하시죠.”

서로에게 쌓인 감정을 토해 내듯 격하게 대화하고 있는 이재산과 고 여사를 태경이 말렸다.

“두 분이 속상한 건 알겠지만, 지금은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어렵게 저희 집까지 발걸음 해 주셨는데 이런 모습까지 보여서 죄송합니다. 원장님.”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진이가 병원 가는 걸 극도로 무서워하네요.”

“그 일 이후 병원을 무서워하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원장님, 제가 오늘 와이프랑 같이 아이를 설득해서 내일 병원에 데려가겠습니다.”

“저도, 같이 설득할게요.”

격한 감정을 가라앉힌 아들과 어머니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아이를 달래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두 분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으나 안타깝게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어떡하죠? 일단 강제로 데려갈까요?”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우리 딸은 치료를 못 받나요?”

“아니요.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받아야죠.”

“어떻게요?”

“집에서요.”

지금까지 계속 고민하던 태경은 결정을 내린 듯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

“지, 집에서요?”

집에서 치료한다는 건, 다시 말해 집 안에서 수술한다는 뜻이었다.

“그게 가능한 건가요?”

“가능하게 해야죠.”

“그래요. 그거 좋겠네요. 집에서 치료하면 진이도 저렇게 무서워하지는 않을 거예요.”

집에서 치료하겠다는 말에 놀란 이재산과 달리 고 여사의 표정은 반기는 듯 보였다.

병원에서 치료하는 걸 허락했지만, 내심 마음이 불안했기에 태경의 결정이 오히려 더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럼 내일 수술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원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라면 수술이 잘 끝난 다음에 그때 받겠습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결정을 내린 태경은 이재산에게 수술에 관한 이야기와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집을 나왔다.

* * *

우리병원-

“뭐야, 무슨 일이에요?”

병원에 도착 후 진료에 집중하던 태경은 예정되어 있던 저녁 수술을 잘 끝낸 뒤, 잠시 여유가 생기자 몇몇 직원들을 의국실로 불러모았다.

“수 쌤 무슨 일이예요?”

“글쎄…….”

의국실에 모인 직원들은 무슨 일로 부른 건지 다들 궁금해하는 중이었다.

“나도 원장님께 따로 들은 게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방문 진료 갔다 오신 건이 아닐까.”

“내 생각도 그래요. 오늘 병동 환자나 외래 환자도 그렇고 심한 응급환자도 없었잖아요. 외부 진료 말고는 따로 하실 말씀은 없을 거 같아요.

임정숙 간호사의 이어 의진이 말했다.

“그나저나 그 외부 진료는 어떻게 됐는지 들으신 분 있나요?”

“난, 들은 거 없는데.”

“저도요.”

직원들은 다들 얼굴을 마주하며 서로에게 물었지만, 방문 진료 결과에 대해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진 쌤도 몰라요?”

“네, 아까 물어볼까 했는데 표정이 좀 안 좋아서 따로 물어보지 않았어요.”

“하긴. 원장님 오늘 수술방에서 수술 잘 끝나고도 안 웃으셨어요.”

늘 수술이 끝나면 웃는 얼굴로 스텝들을 격려하던 태경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수술이 끝나자마자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급하게 수술방을 나갔다.

오늘처럼 태경의 표정이 심각한 걸 거의 본 적 없던 직원들은 뭔가 평소처럼 말을 붙이기도 쉽지 않았다.

“원장님께서 이렇게 직원들 따로 부르신 경우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괜히 긴장되네.”

“뭔가 진료 본 환자가 안 좋은가…….”

철컥-

직원들의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사이 진료실에 있던 태경이 의국실로 들어왔다.

“갑자기 모이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여러분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급히 모이라고 했어요.”

“원장님, 혹시 오늘 방문 진료 갔던 일인가요?”

“맞아요. 제가 오늘 방문 진료를 하러 갔던 이유는 병원에 올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아이 아빠가 찾아와 아이의 진료를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올 수 없는 이유라는 게 좀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 아이에게는 오빠가 있었는데 몇 년 전, 신화대병원에서 있던 의료사고로 사망했어요.”

태경은 직원들에게 이재산 가족이 겪은 끔찍한 일을 알려 줬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가족들이 병원을 불신하고 심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과 현재 진이의 상태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아이가 너무 딱하네요.”

설명을 들은 직원들은 아이를 걱정했다.

“방금 아이한테 복부 종괴에 혈뇨가 보였다고 했는데 아이의 병명은 뭔가요?”

“아이의 병명은 윌름스 튜며(wilm’s tumor, 신장암)입니다.”

내일 가서 확인이 필요하긴 했지만, 태경이 생각하기로 십중팔구 윌름스 튜며가 맞았다.

윌름스 종양 또는 콩팥모세포종으로 불리며 소아부터 어린아이에게 흔히 발생하는 신장암의 종류다.

별다른 증상 없이 아이의 복부가 이상함을 느끼고 진단받는 경우가 꽤 있다.

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 중에서 열과 빈혈, 혈뇨 등의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원장님? 윌름스 종양이면 당장 수술해야 하잖아요.”

“맞아요. 하지만 아이가 병원으로부터 느끼는 심리적인 공포심과 두려움이 워낙 크기 때문에 병원에 데려와서 제대로 치료받기 쉽지 않아요.”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볼 수도 없고 어떡하죠?”

“아이가 딱하긴 하지만 치료를 위해서는 일단 강제라도 병원으로 데리고 오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최 팀장님도. 참! 원장님 말씀 못 들었어요? 애가 실신까지 하려고 했다잖아요.”

“그렇다고 배 속에 종양이 있는 애를 이대로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놔두면 안 되죠.”

아이의 병명을 들은 직원들끼리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뭔데요?”

“아이의 집에서 수술을 진행할까 합니다.”

“집!”

“집에서요?”

“지금 집이라고 하셨어요?”

“맞아요.”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춘 태경이라고 해도 수술은 오롯이 혼자 할 수는 없었다.

수술방에서 수술을 집도하는 동안 직원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번 경우에는 특히 더 그랬다.

모든 게 처음부터 완벽히 세팅된 수술방이 아닌 곳에서 수술해야 하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 수술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제 말이 많이 황당하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저것 따지기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아이가 수술받을 수 있게 하는 게 우선이에요. 여러분들이 날 믿고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네, 원장님. 할게요.”

태경이 초조한 표정으로 직원들에게 말을 전한 뒤, 찾아온 정적을 끊은 건 의진이었다.

“전 수술 참여하겠습니다.”

“저도 할게요.”

“저도요.”

“그럼 전, 준비를 돕겠습니다.”

잠시나마 직원들이 반대하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생각이 무색할 만큼 단 한 명의 직원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다들 놀랐을 텐데 의견에 따라줘서 고마워요.”

“저를 포함한 원장님이랑 함께 일해 본 직원들이라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에요.”

“이하동문입니다.”

환자를 살리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태경의 성격을 이미 잘 알고 있던 직원들이었다.

응급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 응급실에서 바로 가슴을 열어 갈비뼈를 부러뜨린 일도, 다리 절단 환자의 응급처치도 수술방이 아닌 곳에서 이뤄진 의료행위였다.

우리 병원 직원이 아니라면 난리가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환자를 살리기 위해 여러 번 놀라운 경험을 했던 직원들은 태경이 하는 일에는 적응이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있기 힘들어서 그렇지, 외국에서는 꽤 있어요.”

몇 년 전 일이긴 했지만, 외국에서 의료봉사단체 일원으로 봉사했던 의진은 생각보다 익숙한 일이었다.

오지에서 병원에 올 수 없는 긴급한 환자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집에서 수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료봉사도 그렇고 상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전쟁 지역에서 군인들 수술할 때 그냥 야전 텐트 안에서 하기도 하잖아요.”

“맞아요.”

태경은 저마다 의견을 내놓으며 믿고 따라준 직원들이 정말 고마웠다.

“원장님, 수술은 내일 하실 건가요?”

“네, 내일 수술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준비할 게 많을 겁니다.”

태경은 직원들과 함께 수술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꼼꼼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