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06화 (405/472)

406화. 꽤 괜찮은 수술방

다음 날-

태경은 휴대용 초음파와 다른 기기들을 들고 아침 일찍 이재산의 집을 갔다 왔다.

이유는 진이의 병명을 정확히 확인하고 몇 가지 검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초음파 를 비롯한 몇 가지 검사를 마친 태경은 병원으로 돌아왔고 역시나 예상대로 윌름즈 종양(Wilms Tumor)이 맞았다.

몇 시간 뒤, 직원들은 진이의 수술 때문에 평소 근무 시간보다 일찍 출근했다.

진이의 상태가 심각하긴 했지만 태경은 병원 책임자로서 입원 환자나 내원 환자들이 진료를 못 보는 상황이 생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직원들의 출근 시간을 앞당겼고 그 시간에 수술 계획을 세웠다.

“원장님, 준비 끝났습니다.”

최 팀장이 응급실에서 나오는 태경에게 다가가 말했다.

“차에 다 실었나요?”

“그럼요.”

“팀장님 덕분에 잘 준비할 수 있었어요.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몇 번이나 꼼꼼하게 챙겼으니까 수술하시는 데 큰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이재산에게 집에서 수술한다고 했을 때 태경이 무턱대고 대책 없이 그 말을 내뱉은 게 아니었다.

우리병원에는 생각보다 외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의료 장비가 잘 갖춰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김철기 덕분이었다.

지금은 이사장이 된 초대 원장 김철기는 의료봉사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대학병원을 나와 우리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의료봉사를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병원 운영 때문에 해외 봉사를 나가기는 쉽지 않았지만, 일 년에 한두 번은 국내 오지로 의료봉사를 다녔다.

그 때문에 봉사 때 사용할 수 있는 의료 기기들이 있었고, 태경은 일전에 큰 금액을 기부받았을 때 오래된 기기들을 교체했다.

물론 병원 내 수술방에서 하는 것처럼 완벽한 수술 환경을 조성하기는 어렵지만 수술을 할 수 있는 장비와 인력은 충분했다.

“원장님, 수술 잘하시고 잘 다녀오세요.”

임정숙 간호사가 뒷문에서 태경과 의료진을 배웅했다.

“네, 잘 갔다 올게요. 환자들 잘 부탁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 선생, 내가 말한 거 잊지 않았지?”

“물론이죠. 잘 체크해야 하는 환자 리스트는 이미 머릿속에 입력 완료했습니다. 병원 일은 잠시 잊고 수술 잘하고 오세요.”

“오늘은 나도 응급실에서 일손 좀 도울 테니까 우리 원장님 마음 푹 놓고 잘 다녀와요.”

옆에 있던 이동훈이 이찬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듬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요. 잘하고 올게요.”

“다녀오겠습니다.”

“다들 수술 잘하고 오세요.”

태경은 의진과 최모나를 포함한 몇 명의 의료진을 대동하고 의료기기를 실은 차령과 함께 주차장을 나갔다.

병원에서 출발한 차들은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 차량정체가 없어서 잠시 뒤 이재산의 집에 잘 도착했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단독주택에 사는 그는 병원에서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고 대문 밖에서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고생은요. 이쪽은 오늘 수술을 함께할 의료진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려운 발걸음해 주셔서 다들 감사합니다. 올라가시죠.”

“제가 부탁한 건 준비됐나요?”

“그럼요. 말씀하신 대로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재산은 전날 태경에게 부탁받은 것이 있었는데 바로 수술방이었다.

집 안에 있는 가장 큰 방을 수술실로 쓸 수 있도록 부탁했고, 이재산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사람들을 불러 가장 큰 안방에 있는 가구들은 지하창고로 옮겼다.

가구를 전부 치우라는 말은 없었지만, 이재산은 의료진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전부 치웠다.

그리고 의료진이 수술 중 미끄럽지는 않을까 염려됐던 그는 방바닥 장판까지 싹 걷어낸 뒤 방 전체 소독까지 완벽하게 마쳤다.

혹시나 의료 기기 사용으로 전기가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가정용 발전기도 몇 개 준비했다.

“여기, 이쪽 방입니다. 이 방이 가장 큰 방인데 괜찮을까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가구를 전부 치우셨네요.”

“네, 그게 좋을 거 같아서요.”

“그러지 않으셔도 됐는데, 덕분에 편하게 이동할 수 있겠네요.”

“아닙니다. 원장님. 제 딸 수술인데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죠.”

정말 그랬다. 딸 수술을 위해 태경을 비롯한 의료진이 이렇게 애를 써 주는데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혹시나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뭐든지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네. 자! 이쪽 방이 수술방이니까 세팅 시작하죠.”

“네, 원장님.”

“알겠습니다.”

직원들은 밖을 오가며 분주하게 수술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오 선생?”

오늘 수술 스텝으로 동행한 오창규가 한창 준비하다 말고 가만히 서 있자 의진이 그를 불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오창규 선생님?”

“아, 네. 선생님 저 부르셨어요?”

“아니, 갑자기 왜 그렇게 서 있나 해서.”

“아! 이게 눈으로 보면서도 진짜인가 싶어서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가정집 방에 양압실이 설치된 게 신기해서요.”

양압실은 쉽게 말해 밖의 균이 수술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거였다.

“오 쌤 말대로 진짜 수술방이 만들어지고 있네요.”

“정 선생님. 대단하세요.”

“에이! 뭘 또 대단할 것까지야.”

“아닙니다. 선생님이 의료봉사 경험이 풍부하시니까 이렇게 방에 양압도 설치하고, 대단한 거 맞습니다.”

오창규에 이어 묵묵히 일하던 최모나도 엄지를 곧추세우며 칭찬했다.

“양압이 생각보다 별거 아니에요. 테이프로 구멍 전부 막고 저기 환풍기 비슷하게 생긴 기기 설치하고 바닥에 비닐 깔고 그 위에 다시 소독하고 방 드나들 때 한 번 더 소독하고 그리고 수술 테이블 두고 조명 소독하고 다시 매달고 하면 금방 해요.”

이재산이 내준 방 안이 넓어서 멸균 테이블과 그 외 기기들을 나열하고 자리 잡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정 선생님은 이런 걸 어떻게 다 아세요? 최 선생님 말대로 의료봉사 때 익힌 거예요?”

오창규는 신기한 듯 계속 질문했다.

“그렇죠. 아무래도 의료 봉사 때 많이 알게 됐죠. 처음에 의료봉사 갔을 때 과연 이런 수술이 가능할까 싶은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사람이 궁하면 통한다고 결국 못 할 게 없더라고요.”

“전 군인 집안이라 그런지 아버지께 어릴 때부터 그 얘기를 듣고 자랐는데 정말 맞습니다. 사람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된다고 하잖아요.”

“최 쌤 말이 맞아. 생각이 행동을 이끌고 결과를 낸다고 하잖아. 난 그래서 사실 어제 원장님이 집에서 수술한다고 했을 때 그렇게 크게 놀라지도 않았어.”

흙바닥에서 수술하고 멸균이 완벽하지 않은 장소에서도 수술하며 환자를 살렸던 의진에게 이 정도는 꽤 괜찮은 수술방이었다.

“그런데 이 조명은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리 것 아니지 않아요? 우리 것보다 좀 큰 거 같은데…….”

“그거 우리 거 아니에요.”

함께 온 간호사가 방 안에 설치된 무영등을 보며 말하자 또 다른 간호사가 답했다.

“그럼요?”

“여기, 보호자분이 준비한 거라는데?”

“정말요?”

“네. 아까 원장님이랑 하는 얘기 살짝 들었는데 보호자분이 아는 사람 통해서 구했대요.”

“그래요? 이건 좀 놀랍네.”

“하긴. 내 자식 생사가 걸린 문제인데 나 같아도 뭐든 했을 거야. 그래도 보호자분이 센스가 있으시다.”

“그러니까요. 조명까지 준비할 줄은 몰랐네요.”

딸의 수술방을 준비하면서 이재산은 수술방 조명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수술방 조명은 무영등으로 그림자가 생기지 않고 수술 부위가 잘 보이게 하며 일반 조명과는 다르다.

어머니와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그는 사업가답게 주변에 아는 사람이 꽤 많았다.

다행히 지인을 통해 의료기기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에게 연락이 닿았고, 돈을 지불하고 중고 조명을 임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직원들이 한 시간 정도 열심히 준비한 끝에 어지간한 수술방처럼 잘 갖춰진 수술방이 완성되었다.

“정 쌤, 원장님은 아이 데리러 가셨어요?”

“그러신 거 같은데. 아마 할머님이랑 말씀하시고 아이 데리고 오실 거 같아요.”

“전 솔직히 원장님께서 상담까지 준비하실 줄은 몰랐잖아요.”

“그러게, 수술 준비하느라 바쁘셨을 텐데 언제 그 생각까지 하셨는지 정말 대단한 분이셔.”

직원들이 방금 말한 상담은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말한 거였다.

우리병원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진료를 보고 있다.

태경은 어제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중에서도 할머니인 고 여사가 상담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냥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또다시 가족 중 누군가가 병원에 갈 일이 생겼을 때 고 여사의 병원 혐오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고 마음의 상처도 치료할 생각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부탁했는데, 사정을 듣고 흔쾌히 동행해 줬다.

“어머니, 제가 어제 설명해 드렸죠? 원장님이랑 함께 오신 선생님이세요.”

전날 아들과 아주 오랜만에 깊고 진솔한 대화를 나눈 고 여사는 큰 거부 없이 상담에 임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전 마음이 힘드신 분하고 대화하는 게 직업인 사람이에요.”

“알고 있어요. 정신과 선생님이시죠?”

“네, 맞습니다. 김태경 원장님 부탁으로 오늘 함께 왔어요. 저랑 잠시 대화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고 여사는 실신 직전까지 갔던 손녀의 모습을 보고 본인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술이 진행하는 동안 도저히 맨정신으로 있을 자신이 없었기에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고 여사가 2층으로 올라가 손녀를 격려한 뒤, 한쪽 방에서 상담을 시작하고 태경은 이재산과 함께 아이 방으로 향했다.

“아까 아침에는 괜찮아 보이던데 진이는 좀 어때요?”

“아침보다 더 좋은 거 같아요. 그리고 와이프랑 제가 어제부터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수술받을 거라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무서워하지는 않던가요?”

“아니요. 그동안 아프고 힘들어서 그런지 얼른 낫고 싶다고 했어요. 선생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수술에 관해 설명했더니 씩씩하게 수술받겠다고 했습니다.”

“다행이네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마음이 짠하더라고요.”

“보호자님이 기운 내셔야죠.”

“감사합니다. 원장님.”

“진이야, 저기 아빠랑 의사 선생님 오시네.”

“진이 안녕. 우리 아침에 보고 또 보네.”

“안녕하세요.”

엄마 품에 안겨 인사하는 진이는 확실히 아침보다 더 안정된 상태였다.

“아빠한테 듣기로는 아침에 선생님 간 다음에 잤다고 하던데 잘 잤어?”

“네, 잘 자고 아까 일어났어요.”

“그래? 잘했다. 선생님이 오늘 왜 또 온 줄 알아?”

“알아요. 진이 수술 때문에요.”

“맞아. 선생님이 오늘 진이 아픈 거 수술하려고 왔어.”

“선생님 정말 수술하면 여기에 있는 거 없어질 수 있어요?”

진이는 불편한 복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선생님이 진이 배 불편한 거 없게 수술 잘할게. 씩씩하게 수술 잘 받을 수 있지?”

“네, 씩씩하게!”

“자, 일단 다 같이 내려가죠.”

진이는 부모님과 태경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진이야, 저 방 알지?”

“네, 우리 집 안방이요.”

“맞아. 선생님이 진이가 집에서 수술받을 수 있도록 다른 선생님들이랑 저 방 안을 수술실로 바꿔 놨어.”

“엄마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엄마에게 듣기는 했지만, 주로 2층 방에 있던 진이는 하루 사이에 방안에 수술실이 생겼다는 게 놀라웠다.

“진이야?”

딸과 눈높이를 맞춘 김연주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그녀는 수술하러 들어가는 어린 딸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