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태경의 큰 계획
“신기하네…….”
“예? 뭐가 신기해요?”
혼잣말하고 있던 태경은 직원의 말을 듣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해 버렸다.
“아니에요. 뭐라고 했죠?”
“오늘 어떠셨는지 물어봤어요.”
“아, 오늘 수술이 잘돼서 기분이 좋죠. 다들 정말 고생했어요.”
“역시 우리 원장님은 전혀 긴장하지 않으셨네요.”
“원장님이 수술할 때 긴장하시는 거 봤어요?”
“그건 그래요. 그런데 다들 배고프지 않아요? 오늘 점심 메뉴 뭔지 아시는 분?”
“내가 이 쌤한테 물어봤는데, 소불고기에 얼큰 순두부찌개라고 합니다.”
“와! 듣기만 해도 군침 도네요.”
“메뉴 들으니까 빨리 먹고 싶어요.”
“그러니까요. 맛있겠다.”
직원들이 점심메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태경은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꼬르륵거리는 배꼽시계도 무시한 채 생각하고 있는 건 다섯 번째 바이탈에 관한 거였다.
정확히는 진이의 다섯 번째 바이탈이었다.
처음 김연주가 시어머니를 피해 병원에 혼자 왔을 때도 그렇고 이재산이 진료를 부탁하러 왔을 때도 그렇고 두 사람에게는 모두 다섯 번째 바이탈이 느껴졌다.
그것도 아픈 당사자에게서 느껴지는 일정량의 냄새가 아닌 미약한 강도의 냄새였다.
계속해서 이걸 생각하는 이유는 이런 패턴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지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이유가 뭐지?’
아이의 수술이 잘 끝난 지금 태경은 답을 찾으려고 했지만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역시 답이 없는 건가?’
애초에 어느 날 갑자기 생긴 다섯 번째 바이탈의 해답을 찾는다는 거 자체가 무리가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진지하게 진이의 다섯 번째 바이탈을 분석하던 태경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빨간 신호등에 멈춘 차창 밖으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던 바로 그때였다.
“……!”
길가에 있던 간판인 ‘세영 분식’이란 글자를 보며 머릿속에 뭔가 번쩍하고 떠올랐다.
‘세영이!’
간판 앞 글자에 있는 ‘세영’이란 글자는 태경이 치료했던 환자의 이름이었다.
세영이는 계모에게서 학대받고 있었고 그 때문에 치료 시기를 놓쳐 염증들에 의해 충수가 다 녹아 급하게 수술했었다.
다행히 수술은 잘되어 아이는 몸과 마음의 상처도 잘 회복했고, 아이와 그 아빠와는 지금까지도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가 됐다.
태경에게는 여러모로 기억에 남은 환자였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세영이의 다섯 번째 바이탈 역시 좀 특이했기 때문이다.
처음 병원에 왔을 때 아이에게는 지독한 냄새와 함께 사탕같이 달콤한 냄새도 함께 났었다.
방금 간판 속 아이 이름을 보자 그때 다섯 번째 바이탈이 순식간에 생각났다.
솔직히 태경은 아직까지도 세영이에게 다섯 번째 바이탈과 함께 어째서 사탕 냄새가 났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맞아!’
하지만 지금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공통점이 있어.’
그랬다. 방금 생각한 대로 진이와 세영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둘 다 아이라는 점이었다.
이게 뭐가 그렇게 큰일인가 싶겠지만, 싫든 좋든 환자를 만날 때 다섯 번째 바이탈을 먼저 느끼는 태경의 입장에서는 꽤 신기하고 큰일이 분명했다.
능력이 생긴 후, 아이 환자 중에서 크게 아팠던 아이들은 진이와 세영이였다. 그리고 두 아이에게서는 뭔가 특이점이 있었다.
지금까지 모든 걸 종합해 보면 아이들은 어른처럼 정석대로 다섯 번째 바이탈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 그 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결론이다.
모든 환자가 다 안타깝지만, 아이들이 환자로 오면 안타까운 마음이 훨씬 더 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이라서 다른 거였어.’
태경은 핸드폰을 꺼내 진이에게서 느꼈던 다섯 번째 바이탈의 특징을 아주 자세히 기록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경우 환자가 아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고 좀 더 빠른 대처가 가능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원장님,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네?”
옆자리에 앉은 직원이 태경을 보며 말했다.
“아니, 아까부터 갑자기 웃고 계시길래요. 오늘 수술 잘돼서 그런 거세요?”
“네, 맞습니다. 오늘 수술이 잘돼서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직원의 질문의 태경은 기분 좋은 표정을 보이며 적당히 둘러댔다.
“이제 다 왔네요.”
“아, 배고프다.”
잠시 후 의료진이 탄 차량이 우리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최 팀장이 다른 직원과 함께 차에서 내리는 의료진을 보며 반갑게 맞았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뒷정리는 우리한테 맡기시고 얼른 가서 식사들 하세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부탁 좀 드릴게요.”
최 팀장은 다른 직원과 함께 싣고 간 의료기기와 기구들을 정리했고 나머지 직원들은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박 선생님?”
태경이 앞서 걸어가고 있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박지신을 불렀다.
박지신은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지만, 환자를 상담할 때를 빼고는 말이 그렇게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필요 없는 말은 굳이 하지 않는, 할 말만 딱 하는 스타일로 본인 일에 열정이 있고 이쪽 방면으로는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네, 원장님. 하실 말씀 있으세요?”
“오늘 근무 날도 아닌데 시간 내주셔서 고마워요. 정신이 없어서 이제야 말하네요.”
“근무 외 수당 주시는데 고맙긴요.”
두 사람은 병원 안으로 들어가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까 상담하면서 어렵지는 않았어요?”
“네, 전혀요. 상담이 꽤 힘들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막상 상담 시작하면 오히려 내면 이야기도 잘하는 경우가 많아요. 오늘 만난 환자분도 그런 케이스였고 앞으로도 큰 어려움 없이 잘될 거 같은데요.”
“잘됐네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 원장님 같은 분은 없을 거예요.”
고 여사의 상담이 잘됐다는 말에 진심으로 좋아하는 태경을 보며 박지신이 신기한 듯 말했다.
“그런가요?”
“그럼요. 저 솔직히 병원 오기 전까지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뵈니까 진짜 대단하시네요.”
“소문이요?”
“원장님 모르셨어요? 우리 쪽에서 원장님 소문 꽤 자자해요.”
“우리 쪽이라면?”
“당연히 의사들이죠.”
“그래요? 무슨 소문이요?”
“원장님 평소에 인터넷 잘 안 보시죠?”
“논문이나 자료…….”
“논문 자료 볼 때 말고요.”
“네, 필요한 거 말고는 딱히 인터넷을 자주 들어가지는 않죠.”
“의사들 커뮤니티에 원장님 미담 제조기로 통하는 거 모르셨어요?”
“미담 제조기요? 병원에만 박혀 있는 사람이 미담 나올 게 뭐가 있다고…….”
“병원에서 환자만 보니까 미담이 많이 나오죠. 사람들이 인터넷에 원장님 리뷰를 많이 올렸더라고요.”
우리병원에서 진료 본 환자 중에 개인 블로그에 태경에게 진료 본 후기를 많이 올렸다.
물론 이름을 직접 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리뷰를 읽어 보면 대부분 태경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리뷰 내용은 친절하고 꼼꼼하며 진정성 있게 진료 본다는 내용부터 병원 직원들까지 전부 좋은 사람들이라는 비슷한 내용이었다.
“제가 우리병원에서 일하기로 결정하고 이것저것 검색하다 보니까 정말 원장님 미담이 많더라고요. 어느 사람은 아픔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고쳐 주는 의사라고 감동받았다는 표현도 했어요.”
“그 정도로 칭찬받을 일도 아니고 당연한 일인데 민망하네요.”
“민망한 사람은 원장님이 아니라 그렇지 못 한 사람들이죠.”
“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병원도 식당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식사하러 식당 가신 적 있으시죠?”
“그럼요.”
“밥 먹으러 식당 갔는데 식당 주인이 음식도 성의 없이 안내하고 메뉴 물어봤는데 뭔가 툭툭거리면서 설명도 잘 안 해 주고 서비스가 별로면 어떡하시겠어요?”
“다음에는 안 갈 거 같은데요.”
“에이, 원장님도 참!”
지나가던 이찬희가 박지신의 이야기를 듣고 답했다.
“그건 당연한 거고요. 돈 내고 먹는데 이유 없이 서비스가 불만족이면 말해야죠.”
“이찬희 선생님 말이 맞아요. 어떻게 말을 하는지 말투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은 한마디 하죠. 공짜가 아니라 내 돈을 지불하는 거라 그만큼 당당하게 요구하는 거예요.”
“그렇죠. 박 쌤 말이 맞습니다.”
이찬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지신 말에 공감했다.
“사실 요즘 서비스에 종사하는 분들이 불친절한 사람도 드물어서 이런 경우가 많이 없긴 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병원도 일종의 서비스업이고 환자들이 돈 내고 진료받으러 오는 건데, 그들에게 불편한 진료를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의사들이 딱딱해도 식당에서처럼 할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요. 딱 까놓고 우리도 환자들이 진료비 내서 밥 벌어 먹고사는 사람들인데 적어도 그 사람들이 진료받으러 와서 도리어 상처받는 일은 없어야죠.”
“박 선생님 말이 맞네요.”
“저도 두 아이 키우는 엄마라 그런지 오늘 원장님이 환자 집에까지 가서 수술하는 거 보고 솔직히 감동했어요.”
“너무 비행기 태우시는데요.”
“없는 말 하는 건 아니니까요. 제가 먼저 다가가는 스타일도 아니고 상냥한 스타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이 없거나 쌀쌀한 사람은 아니에요. 여기서 오래 일한 건 아니지만 원장님 보고 느낀 게 많아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 계속 일할게요.”
“예? 그게 정말인가요?”
“네. 말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라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기 때문에 전, 빈말 안 해요.”
박지신은 우리 병원에 정신건강의학과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한 사람이 아니었다.
태경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개설을 생각하면서 좋은 의사를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다 예전부터 좋은 논문을 쓰고 눈여겨봤던 박지신이 휴직을 끝내고 일할 병원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연락처를 구해 먼저 연락했다.
몇 군데 오퍼를 받고 천천히 생각하겠다는 박지신에게 태경은 일단 한두 달 정도 편하게 일하면서 병원 분위기를 보고 결정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고민한 끝에 제안에 동의한 상태였다.
“아직 기간이 좀 남았는데 괜찮겠어요?”
“네, 더 볼 것도 없어요.”
“좋은 결정 해 줘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제가 더 감사하죠. 원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불편한 점이나 개선 사항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주세요. 그러면 자세한 이야기는 박 선생님 근무 날 하죠.”
“네, 원장님.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할 말은 끝낸 박지신은 깔끔한 인사와 함께 병원을 나갔다.
“와! 박 쌤, 쿨내가 진동하는 게 되게 멋진 사람 같아요.”
“그러게. 멋진 사람이네.”
“박 쌤이랑은 원래 알던 사이세요?”
“아니, 나 선생님이 아는 사이라서 연락처 물어봤어.”
“비뇨기과 나성기 쌤이요?”
“응.”
“역시 나 쌤이 은근히 인싸라니까요.”
태경은 얼마 전부터 큰 계획을 한 가지 세웠다.
바로 우리 병원을 한 단계씩 제대로 천천히 키워나가기로 한 것이다.
구체적인 계획을 끝내고 바로 김철기에게 알렸고, 그는 누구보다 기뻐하면서 힘이 되어 줄 테니 하고 싶은 꿈을 마음껏 펼치라고 응원했다.
병원을 키워나간다는 말이 단순히 규모만 불리는 게 아니었다. 좋은 인재를 찾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도 중요했다.
유명한 의사보다는 환자들에게 필요한 의사를 찾고 싶었고 박지신이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병원에서 좋은 의사가 한 명 더 생겼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린 병원의 밑그림이 하나씩 채워지는 게 태경은 뿌듯했다.
“원장님, 점심 안 드세요?”
“먹어야지.”
태경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기분 좋게 식당으로 향했다.
“잘 먹었습니다.”
잠시 뒤, 맛있게 식사를 마친 태경은 진료실에 들러 진이의 수술에 대한 차트를 작성하고 응급실 상황을 체크한 뒤 회진을 위해 병동으로 올라갔다.
“병동에는 별일 없었죠?”
“별일은 아닌데 요즘 병동이 좀 핫하긴 한 거 같아요?”
“병동 난방이 좀 강해서 그런가…….”
“아이구! 우리 원장님도 참!”
농담을 이해 못한 태경이 진지하게 말하자 임정숙 간호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방이 핫한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뜨겁다. 환자들 사이에 작은 이슈가 있다 뭐, 이런 뜻이에요.”
“그게 그런 뜻인가요? 그런데 환자들 사이에 이슈 거리가 있을 게 있나? 환자들끼리 싸운 건 아니죠?”
“싸우긴요. 그런 거 아니고 원장님도 회진 돌다 보면 아실 거예요.”
태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회진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