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12화 (411/472)

412화. 복부? 자궁? 난소? 어디야?

임정숙 간호사의 말 그대로였다.

방금 태경에게 주의를 받았던 구동곤과 이예림은 부부가 아니었다.

뒤늦게 진실한 사랑을 강조하던 두 사람은 어이없게도 부부 행세를 하며 병원에서 애정행각을 하다 환자들에게 목격돼 온 병실에 소문이 난 것이다.

보다 못한 몇몇 환자들이 민원을 넣었다. 병동 간호사가 이 사실을 임정숙에게 말하면서 두 사람이 부부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말했다.

병원에서 접수 시 의료보험 조회를 하는데 자세한 가족 관계까지 나오지는 않지만, 피보험자와 환자의 관계는 나온다.

접수처 직원이나 담당 간호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진료하는 의사들이 정보란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기 때문에 따로 알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태경과 임정숙 간호사는 이 사실을 몰랐고 조금 전에 알게 된 것이다.

“저기, 원장님. 그러면 구동곤, 이예림 환자 병실 배정을 다시 하는 게 좋을까요?”

“아까 물어봤을 때 아니라고 하면서 눈물까지 보이면서 억울해하더라고요.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와전된 걸 수도 있으니까 지켜보죠. 한 번 주의 줬으니까 또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안타깝지만, 문제를 일으킨 두 사람에게 주의를 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병원은 사람을 고치고 진료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들의 부적절한 관계까지 대놓고 지적하며 훈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입원을 오래 하는 환자들도 아니고 원장님이 직접 말씀하셨으니까 알아들었겠죠.”

늘 평온하던 병동이 특이한 두 환자 때문에 시끄러울 것만 같았다.

* * *

서울의 한 식당-

“몇 분이세요?”

“두 사람이요. 지금부터 30분 이상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나가시면 옆에 대기실 공간이 있는데 거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은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답게 상당히 넓은 평수임에도 사람들이 꽉 찼다.

돼지고기 전문점으로 신선한 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곁들여 나오는 밑반찬도 인기 비결이었다.

고깃집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밑반찬이 나왔는데 식당 안주의 직접 만든 반찬이 그야말로 끝내줬다.

“3번 테이블 김치찌개, 17번 된장찌개, 20번 계란찜 나가요.”

“네, 나갑니다.”

한동안 주방에서 떨어진 밑반찬과 음식을 만들던 안주인 김말자는 정신없는 홀을 도와주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여기, 오겹살 2인분 추가요.”

“벌집 삼겹살 3인분이요.”

“네. 바로 갖다 드릴게요.”

손님들의 요청사항을 빠르게 수용하며 민첩하게 움직이던 그녀는 열심히 일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에게 다가갔다.

“여기, 소주 두 병만 주세요.”

“네, 바로…….”

“김 군아, 여기 소주 두 병 드려.”

“네, 손님. 바로 갑니다.”

손님을 응대하던 아르바이트생의 말을 가로채며 대신 대답한 김말자는 별안간 아르바이트생의 손을 잡더니 안쪽으로 데려갔다.

“자! 너 얼른 그거 벗고 이거 받아.”

그러더니 미리 챙겨둔 아르바이트생의 옷가지와 가방을 들이밀며 앞치마를 벗으라고 재촉했다.

“사장님 저, 아직 시간 남았어요.”

“나도 알아. 오늘은 이만하고 그만 들어가. 너, 내일 오전에 자격증 시험 있잖아.”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것까지는 알 거 없고. 얼른 들어가서 내일 자격증 준비나 해.”

아직 업무 시간이 남았지만, 김말자는 내일 시험인 아르바이트생을 몇 시간 일찍 퇴근시키려 했다.

식당일 그것도 맛집으로 소문난 고깃집 일은 생각보다 할 일도 많고 일이 힘들다.

그런데도 이 식당 아르바이트생부터 직원들 전부 누구 하나 짜증 난 표정 없이 웃는 얼굴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바로 안 주인 김말자 때문이었다.

그녀는 훌륭한 음식솜씨만큼 인성 또한 훌륭했는데, 주변 상인들까지 인정할 정도로 사람이 좋았다.

소문난 식당이라 수익이 많았는데, 그 돈을 어려운 곳에 기부하고 동네 취약계층과 노숙자에게 주기적으로 음식을 대접하고 있었다.

게다가 직원들에게 시급보다 더 일당을 주고 오늘처럼 개인적인 일이 있으면 알아서 먼저 챙겼다.

김말자의 넉넉한 마음 때문에 식당 직원들은 한 번 일하면 꽤 오래 일했다.

그녀가 이렇게 사람들을 돕고 사는 이유는 어릴 적 지독하게 가난했고 죽을 만큼 힘들어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잘될수록 더 베풀고 나눌 줄도 알았다.

“저 괜찮아요. 사장님. 큰 사장님도 농장 가셔서 안 계시고 저녁에 손님 몰려서 저 빠지면 힘들잖아요.”

“사장 하루 이틀 해? 내가 알아서 해. 사람이 큰일을 앞두고는 잠을 잘 자야 두뇌활동이 잘 돌아가는 거야. 빨리 가!”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감사할 것도 많다. 조심히 들어가.”

김말자의 성황에 못 이긴 아르바이트생은 결국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향했다.

“엄마, 나 왔어.”

“어머니, 저도 왔습니다.”

잠시 뒤 안주인의 막내딸인 구지연이 남자친구와 함께 일을 돕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

“너희들 연락도 없이 온 거야. 힘들게 뭐 하러 왔어?”

“뭐 하러 오긴. 이 시간에 바쁘니까 일 도우러 왔지. 아빠는 내일 오신다고 했나?”

“농장 좋은 데 소개받아서 몇 군데 둘러본다고 며칠 더 걸릴 거 같대.”

“아빠도 고생하시네.”

“이번에 혼자 내려가서 좀 힘드실 거야.”

함께 식당을 운영하는 남편은 현재 식당 거래처 일로 출장 중이었다.

“그런데 현준이는 또 왜 데려왔어? 지연이 너야 휴가라고 해도 현준이는 출근해야 하잖아?”

“현준이도 안식년 휴가라니까. 내가 그때 엄마한테 말했잖아. 기억 안 나?”

“너도 내 나이 되면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그건 그렇고 남의 집 귀한 자식 자꾸 식당 데려오지 말라니까.”

“내가 데려온 거 아니고. 얘가 따라온 거야. 가라고 해도 안 가잖아.”

“맞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저, 곧 있으면 구 씨 집안 사위 되니까 남의 집 자식 아닙니다.”

“하여간. 말도 예쁘게 한다. 대신 둘 다 무리하지 마.”

“걱정 마셔.”

“네, 어머니.”

김말자와 다정한 대화를 주고받은 막내딸 커플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마감 시간까지 열심히 식당 일을 도왔다.

“홀 그릇은 이게 마지막이야. 엄마 주방에 들어와서 도와줄까?”

“아니야. 일 없어. 여긴 괜찮으니까 홀만 도와줘.”

“오케이.”

“형님은 어쩜 애들 셋을 저렇게 잘 키우셨어요.”

“키우긴 자기들이 알아서 컸지.”

야무지게 일하는 막내딸을 두고 주방 직원이 칭찬하자 김말자가 민망한 듯 답했다.

“보면 자식 복이 타고나신 거 같아요. 참! 지연이 결혼한다면서요?”

“응. 내년 가을에 하기로 했고 날짜는 아직 안 정했어.”

“둘이 오래 만나더니 잘됐다. 이제 막내까지 식 올리고 나면 형님은 아무 걱정 없겠네.”

“이 세상에 걱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리고 걱정이란 게 내 마음대로 안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

“하긴. 그건 그래요. 그래도 난 형님같이만 살면 걱정도 없고 행복할 거 같아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거나 받아.”

김말자는 주방 한쪽에 있는 서랍장에서 피로회복제를 꺼내 직원에 건넸다.

“이 비싼 걸 또 사셨어요? 그냥 박카스 한 병이나 살 것이지 뭐 하러 자꾸 이런 데 돈을 써요.”

“직원들이 건강해야 식당이 잘 돌아가지. 왜 안 먹을겨?”

“안 먹긴요. 없어서 못 먹죠.”

“다들 이거 하나씩 먹어.”

주방 직원들에게 피로회복제를 건넨 김말자는 밖으로 나가 홀 직원들에게도 회복제를 건넸다.

“오늘 바빴는데 다들 수고했어. 이거 하나씩 먹고 얼른 정리하고 들어들 가.”

“감사합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얼래, 안 보이네?”

직원들에게 피로회복제를 나눠 주던 그녀는 이쪽저쪽 고개를 돌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일하고 있더니 어디 갔대.”

“사장님, 지연 언니 찾으세요?”

“응. 화장실 갔나?”

“아니요. 대기실 정리한다고 남자친구분이랑 그쪽 갔어요.”

“그래? 알았어.”

홀에서 나온 김말자는 식당 옆에 있는 같은 건물 대기실로 걸어갔다.

“데이트나 할 것이지 괜히 와서 고생이나 하고……. 그래 내가 새끼 복은 있지. 기특한 것들.”

그렇게 혼잣말은 하며 손님들이 드나드는 문이 아닌 직원들이 다니는 안쪽 문으로 들어가려던 그녀의 경쾌한 발걸음에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렸다.

“……!”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막내딸 커플의 대화 소리가 김말자를 멈칫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현준아? 나 검사받은 거 괜찮겠지……?”

‘검사?’

검사라는 말에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길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툭-

김말자는 들고 있던 피로회복제 봉지를 땅에 떨어뜨린 줄도 모른 채 숨을 죽이며 막내딸 커플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검사? 당연하지. 잠깐만! 너 또 핸드폰으로 검색해 봤지? 핸드폰 줘 봐.”

남자친구가 핸드폰을 확인하려 하자 구지연이 다가오는 손을 치우며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아니, 여기 이것 좀 봐 봐. 이 사람도 초음파 받은 건데…….”

인터넷 검색으로 누군가의 초음파 사진을 터치한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내 초음파 사진이랑 비슷해 보이지 않아? 아니다. 다시 보니까 똑같은 거 같아. 어떻게 이분 암 판정받아서 수술하셨대. 현준아 나도……!”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구지연을 보며 보다 못한 남자친구가 휴대폰을 확 뺏어 버렸다.

“왜?”

“왜라니. 너 검사받고 와서 며칠 내내 계속 핸드폰이랑 노트북으로 온갖 검색 다 하면서 안 좋은 생각만 하다가 괜찮더니 또 이러잖아. 내가 결과 나올 때까지 이런 거 찾아보지 말라고 했지?”

“네가 보기에 답답한 거 나도 알아. 아는데…….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별별 생각이 다 들고 걱정되는 걸 어떻게. 괜찮겠지, 괜찮겠지 하다가도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들고 그래.”

구지연은 속상한 표정으로 답답한 속내를 보였다.

“바보야. 답답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네가 걱정하고 속상해하는 게 싫어서 그래. 사람이 원래 그런 거 찾아보며 자꾸만 더 그런 쪽으로 생각나는 거 너도 알잖아. 지연아…….”

남자친구는 풀이 죽은 여자 친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토닥였다.

“내가 장담하는데 너 아무 일도 없다니까. 어! 내 말 못 믿어? 내가 구지연 행운의 여신, 아니지. 행운의 남신이야.”

“준현아?”

“응. 뭐 해 줄까? 말만 해. 구지연이 말하면 내가 하늘에 별도 따 줄 남자라고.”

“또 까분다. 까불어. 만약에 말이야…….”

“이상한 소리 하면 진짜 혼난다.”

“만약에 나 암……읍!”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하던 구지연은 남자친구의 손바닥 때문에 입이 막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바보야. 말하는데 입을 막고 그래?”

“쓸데없는 소리 하니까 입을 막지. 너 진짜 그런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나 정말 화낸다. 알았어?”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왜? 화났어?”

남자친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구지연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화나긴. 너같이 착한 남친한테 어떻게 화를 내냐?”

“그런 왜 일어나?”

“화장실 가려고. 왜? 화장실까지 따라오게?”

“그럼 문 앞에 서서 지켜야지.”

“참나! 됐고, 나 화장실 좀 갔다 오면 같이 정리하자. 쉬고 있어.”

“거의 다 끝났는데 내가 하고 있을게. 갔다 와.”

“응. 나 좀 걸려.”

“정리를 마저 해 봅시다.”

드르륵-

구지연이 손님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나가자 잠시 후, 안쪽 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말자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여긴 정리 다 끝났어요.”

“현준아…….”

“네. 도와 드릴 거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그게 아니라 방금 무슨 말 한 거니?”

“네?”

“방금 너랑 지연이가 한 말이 무슨 말이냐고.”

“별말 안 했는데……. 아! 내일 전시회 가기로 했거든요.”

김말자의 물음의 남자친구는 있지도 않은 전시회 핑계를 대며 모른 척했다.

“지연이가 보고 싶은 전시회가 있어서 그거 보고 밥 먹으러 가자는 얘기했어요.”

“똑바로 말 안 해? 내가 아까부터 다 듣고 있었어. 지연이 검사받았다며! 무슨 검사를 받은 거야.”

“아! 그거요. 어머니 그거 별거 아니에요. 그냥 건강검진 그런 거 받은 거예요.”

“얼른 사실대로 말해.”

“지연이 초음파 검사받았어요.”

“무슨 초음파 어디? 배야? 복부니?”

“아니요.”

“그럼, 어디? 자궁? 난소? 산부인과야? 도대체 어디야?”

말이 점점 빨라지고 있는 김말자의 속은 점점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아니요.”

“현준아, 빨리 말해.”

“지연이가 유방 초음파를 받았어요.”

‘유방’이란 말에 김말자의 표정이 커튼이 쳐진 방처럼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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