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14화 (413/472)

414화. 피가 마르는 기분

다음 날-

“이 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근데 이게 무슨 향이에요?”

“그러게. 오늘따라 이 쌤한테 되게 좋은 향 나는데요.”

“신선한 원두를 볶은 고소한 냄새입니다.”

출근한 이찬희는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흔들며 말했다.

“어쩐지. 커피 향이 진동하더라. 근데 웬 원두예요?”

“집 근처에 자주 가는 카페가 있는데 좋은 원두가 들어왔다고 해서 같이 먹으려고 좀 사 왔어요.”

“요즘 원두 좋은 건 가격도 좀 나가는데.”

“쪼금 금액대가 있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뭐, 제가 또 복권에 당첨된 사람 아니겠습니까.”

“맞다. 이 쌤 직원들한테 한턱 쏘고 나머지는 뭐 했어요?”

“부모님께 고기 보내 드리고 전자레인지 바꾸고 나머지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뭔가 알차게 잘 사용한 거 같다.”

“그러니까요.”

“최 쌤 왔나요?”

“네. 의국실에 계실걸요.”

“가 볼게요.”

“커피 잘 마실게요.”

“저도요.”

접수처 직원과 대화를 마친 이찬희는 식당에 들러 원두를 두고 의국실로 향했다.

철컥-

“개모나 하이.”

“왔어? 들렀다 오는 거지?”

“그럼.”

“진이는 좀 어때?”

최모나는 이찬희를 보자마자 집에서 수술했던 아이의 상태부터 물었다.

오늘은 이찬희가 출근 전 이재산의 집에 들러서 아이 상태를 보고 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바이탈도 좋고 혈압도 좋고 수술 부위도 좋고 무엇보다 아이가 밝아서 좋더라.”

“낯가리진 않았어? 약은 잘 먹는대?”

“약은 잘 먹는다고 했어. 안 그래도 난 수술한 날 없어서 진이가 보고 낯가리면 어쩌나 했는데 말도 잘하고 붙임성도 좋던데?”

“그래? 수술한 날은 좀 조심스러워 보였는데 확실한 아픈 게 없어지니까 밝아졌나 보다. 다행이네.”

“조직검사 결과는 아직인가?”

“아마 며칠 내로 나올 거 같아. 맞다! 우리 퇴근하고 환자들 싸웠다면서?”

“심하게 싸운 건, 아니고 그 이예림 환자랑 다른 병실 환자랑 좀 다툼이 있었어.”

“다툼? 왜?”

“그냥 말싸움이 좀 나서 병동 선생님들이 말렸어.”

“말릴 정도면 크게 싸운 거 아니야?”

“다친 사람은 없으니까.”

“싸워서 다칠 정도면 안 되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전날, 태경이 이예림과 구동곤의 병실을 찾아가 주의를 준 걸 지나가던 다른 병실 환자가 우연히 목격했고, 다른 층 병동 환자들까지 전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른 채 병실에만 있어 답답했던 이예림이 복도를 걸어 다니다 우연히 본인 이야기하는 중년 여성의 말을 듣고 시비가 붙었다.

‘저 여자가 원장님께 주의 들었다는 그이지?’

‘맞아. 여기 원장님이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목소리를 높일 정도로 말 다 한 거 아니야.’

‘그리고 여기가 병원이지 패션쇼장이야?’

‘누가 아니래. 괜히 다른 환자들한테 피해나 주고……. 그러니까 병원에서 이상한 짓거리나 하고 돌아다니겠어? 알만한 나이에 처신을 똑바로 해야지.’

‘이봐요! 아줌마!’

‘뭐, 아줌마?’

‘네, 지금 한 말 나한테 한 말이죠?’

‘어이구! 귀도 밝네. 그래. 그쪽한테 했다. 왜? 불만 있어?’

‘나 알아요? 내가 이상한 짓거리한 거 아줌마가 봤냐고?’

‘된장인지 고추장인지 먹어 봐야 아나? 하고 다니는 꼴을 보니까 딱 알겠네.’

‘뭐, 뭐라고요? 내 꼴이 어떤데요?’

‘그걸 내 나한테 묻는데? 본인이 더 잘 알 거 아니야.’

‘하! 기가 막혀.’

‘난 코가 막혔다.’

‘뭐, 그래도 나이 먹고 뱃살 늘어진 아줌마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데요?’

‘뭐야! 뱃살?’

‘그래요. 늘어진 뱃살? 운동 좀 하고 건강관리 하세요.’

‘내가 뱃살 나왔는데 네가 뭐, 보태 줬어? 그러는 넌 서방질하게 생겨 먹었어.’

‘뭐라고요! 이 아줌마가 진짜 해보자는 거야?’

‘그래! 해보자. 해보자는 사람 하나도 안 무섭더라.’

‘두 분 당장 그만두세요.’

‘여기서 지금 뭣들 하시는 겁니까? 여긴 병원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재미 있는 구경 중 하나가 싸움 구경이라고 했다.

병동에서 갑자기 일어난 싸움에 병실 환자들이 하나둘 몰렸지만, 임정숙 간호사와 최 팀장의 빠른 대처로 다행히 두 여자는 몸싸움 없이 각자 병실로 돌아갔다.

“수 쌤이 그러는데 안 말렸으면 두 사람 다 머리채 잡을 기세였대.”

“정말이야? 서방질에 늘어진 뱃살, 단어 선택 무섭다.”

최모나에게 환자들 싸움 이야기를 들은 이찬희는 놀라움과 함께 살짝 아쉬워했다.

“원래 아주머니들 화나면 무서워. 엄마 화날 때 생각하면 바로 이해될걸.”

“오! 우리 어머니 화날 때 생각하니까 바로 이해됐어. 환자들 싸움이라니 참! 별일이 다 있다.”

“누가 아니래.”

“나 선생님께 진이 보고하러 갔다 올게.”

“이 쌤?”

“응?”

“잠깐만 이거.”

최모나는 의국실을 나가려는 이찬희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어! 이거?”

“여행 자석 모은다며? 친구가 여행 갔다 왔다고 몇 개 선물 줬는데 하나 이 쌤 하라고.”

“이거 되게 멋있다. 내가 정말 고마워서 그런데 우리 뽀뽀나……윽!”

“됐거든! 까불지 말고 얼른 가라.”

이찬희가 장난을 치려 하자 최모나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알았어. 이따 봐.”

의국실을 나온 이찬희는 태경을 찾아 내시경실로 향했다.

“쌤? 원장님 아직 안 끝나셨어요?”

“네, 한 분 남았어요.”

“감사합니다.”

“저기 선생님.”

간호사에게 물어보고 다시 의국실로 가려던 이찬희에게 구동곤 환자가 다가왔다.

“아, 네. 안녕하세요.”

“죄송한데 그 사람 내시경 끝났을까요?”

“이예림 환자요?”

“네. 제가 물리치료 시간 때문에 들어가는 걸 못 보고 방금 내려왔거든요. 걱정돼서.”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제가 확인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구동곤과 대화한 이찬희는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바로 다시 나왔다.

“이예림 환자분 내시경 끝나서 방금 회복실 들어갔으니까 안으로 들어가 보셔도 될 거 같아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찬희에게 인사를 하며 구동곤은 회복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에 누워 있는지 물어볼 걸 그랬네.’

베드 사이로 쳐진 커튼 때문에 이예림이 어디 누워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치질 있는데요?”

그런데 곧이어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바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저, 치질 있는데 제 항문 괜찮나요?”

“오빠 언제 정리할 거야아!”

“뭐가 부족하냐고!”

“내가 언제까지 세컨…….”

챠륵-

수면 마취 후 헛소리를 하며 잠에 취해 있는 이예림을 찾은 구동곤이 커튼을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예림아? 자기야?”

“어! 우리 자기 왔어요? 울 오빠 왔구나?”

헛소리하던 이예림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 구동곤을 알아보며 주사를 부리듯 횡설수설했다.

“자기야, 여기 병원이야. 내시경 잘 끝났대.”

“아, 맞다! 나 내시경 받았지? 오빠 우리 술이나 한잔할까?”

“술은 무슨 술이야.”

“저기요. 실례지만 조금만 조용히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네, 죄송합니다.”

시끄러운 헛소리에 다른 베드에 있던 보호자가 정중하게 조용할 것을 요청하자 구동곤은 미안해하며 이예림의 헛소리를 막고자 노력했다.

“여기 병원이라니까.”

“알았어. 막잔 먹고 갈게. 오빠 정리할 거지?”

“좀 조용히 해.”

* * *

그 시각, 우리병원 주차장에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차량에는 김말자와 구지연 커플이 타고 있었다.

차는 조용히 시동이 꺼졌지만, 그 안에서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보다 못한 구지연의 남자친구인 박현준이 무거운 정적을 깨뜨리며 애써 활기차게 말했다.

“그러네. 생각보다 빨리 왔다. 우리 30분이나 일찍 왔어.”

전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김말자는 딸의 말에도 대꾸하지 않고 차장 밖만 보고 있었다.

“엄마, 병원 다 왔어.”

“알아. 알고 있어.”

“우리 좀 일찍 왔는데 여기 근처에 커피숍에 가 있을까?”

“거기 빵도 맛있었는데 건강빵도 있고 어머니 드시기도 좋을 거 같은데.”

“그치? 엄마 우리 빵이랑 커피 마시고 올까?”

“무슨 커피야. 엄마는 여기 있을 테니까 현준이랑 가서 마시고 와.”

“엄마가 안 가는데 어떻게 우리 둘만 가. 그럼 그냥 들어가서 접수할까?”

“그래. 그게 낫겠다.”

“나 혼자 갔다 올 테니까…….”

탁-

“내려.”

구지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창 밖을 보고 있던 김말자가 빠르게 차 문을 열고 나가 딸을 보며 말했다.

“엄마도 가려고?”

“너 혼자 보낼 거였으면 엄마 여기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어.”

“그래, 지연아. 난 여기 있을 테니까 어머니랑 갔다 와. 그게 어머니도 마음 편하실 거야.”

“알았어.”

차에서 내린 모녀는 병원으로 들어가 접수를 마쳤다.

“구지연님 접수되셨고요. 기다리시면 이름 불러 드릴게요.”

“제가 좀 빨리 왔죠?”

“네, 예약한 시간보다 좀 빨리 오셨어요. 오늘 외래 손님이 좀 몰리는 날이긴 한데 거의 빠졌으니까 예약 시간보다 좀 빨리 진료 보실 수 있게 해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모녀는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김말자는 말없이 딸의 손을 꼭 잡고 쓰다듬었다. 지금 딸의 마음이 얼마나 속이 타들어 갈지 잘 알고 있었다.

조직검사를 받고 결과를 받기까지의 일주일이 정말 피가 마르는 것만 같았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였지만 김말자 역시 밤새 피가 마르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몇 년 전, 본인의 조직검사를 기다렸을 그때보다 지금이 더 떨렸다.

자식 일이다 보니 엄마로서 당연한 심정이었다.

검사 결과를 앞둔 지금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만에 하나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쩌나 싶은 생각부터 별별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

딸의 손을 꼭 잡고 바짝 타들어 가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있던 김말자가 갑자기 움찔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

“엄마, 왜 그래?”

“어! 아니야.”

자리에서 일어났던 김말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너무 긴장했나 보다.”

“나보다 엄마가 더 긴장한 거 같네.”

“자식 일인데 당연하지.”

“물 좀 갖다 줄까?”

“아니야. 괜찮아.”

“구지연 님?”

그렇게 두 모녀가 긴장감 속에 15분 정도 기다리자 임정숙 간호사 구지연의 이름을 불렀다.

“안녕하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앞에 검사가 일찍 끝나서 예약 시간보다 진료를 일찍 보게 됐어요.”

“그럼 지금 진료 볼 수 있어요?”

“네, 바로 들어가시면 돼요.”

“엄마랑 같이 들어가도 되죠?”

“그럼요. 같이 들어가세요.”

똑- 똑-

“원장님, 구지연 님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원장님.”

“어서 오세요.”

“선생님 오랜만에 봬요.”

“어!”

구지연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김말자를 본 태경은 그녀를 한 번에 알아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말자 님 아니세요?”

“이제는 원장님이 되셨네요.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태경은 어지간하면 수술한 환자들의 얼굴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는데, 특히 김말자의 경우 더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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