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0.6cm 0.46cm
태경은 어지간하면 수술한 환자들의 얼굴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는데, 특히 김말자의 경우 더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암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대게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그중에서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긍정적인 마음으로 으샤으샤 하면서 암과 싸워 이기겠다는 굳건한 마음을 가진 파이팅 넘치는 유형이다.
두 번째는 첫 번째와 달리 힘들어하고 지치기도 하고 과연 내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고민했다가 힘을 냈다가 감정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하는 유형이다.
보통은 두 번째 유형의 환자들이 많다.
사실 암 치료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멘탈 관리하는 게 상당히 어렵다.
그렇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늘 씩씩하고 긍정적인 생각만 하는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그런 면에서 김말자 환자는 정말 대단한 환자였다.
수술하기 전 처음 봤을 때는 걱정도 많고 힘들어했지만, 수술 후 항암이 시작되자 이 병을 이겨 내겠다는 씩씩한 마음으로 끝까지 갔다.
물론 본인은 많이 힘들고 괴로웠겠지만, 그걸 한 번도 겉으로 내색하거나 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 환자의 병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치료에 긍정적인 효과를 내어 좋은 영향을 준다.
그런 긍정적이고 단단한 마음가짐이 김말자의 병을 완치하게 만든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런 멋진 환자라서 태경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구지연 환자분이 따님이시군요?”
“네, 원장님. 전날 갑자기 조직 검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잠까지 설치다가 걱정돼서 따라왔어요.”
“걱정이 많으셨겠네요.”
“말도 마세요.”
“일단 자리에 앉으세요.”
모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김말자 님, 잘 지내셨어요?”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원장님께는 여전히 환자라는 말을 하지 않으시네요.”
잔뜩 긴장했던 김말자가 신기한 듯 태경을 보며 말하자 다정한 말투와 함께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환자가 아니시니까요.”
태경은 암 환자를 대할 때 조금 다른 점이 있었는데 바로 호칭이었다.
완전하게 암 완치 판정을 받은 환자에게는 환자라는 단어 대신 ‘님’이라는 단어로 불렀다.
아무것도 아닌 그저 호칭의 차이일 수 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온갖 고생 하며 암과 싸워 이긴 환자들에게 더 이상 환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김oo 님 더 이상 병원에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난 5년 동안 환자라는 말이 지겹도록 싫었는데 선생님 덕분에 그 말을 졸업하네요. 환자 딱지 때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어느 환자는 마지막 외래 진료에서 태경의 인사를 받으며 눈물을 쏟은 적도 있었는데 그게 바로 김말자였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시죠?”
“네, 완치 판정받은 뒤로 감사하게도 아픈 곳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이게 다 원장님 덕분이에요.”
“별말씀을요. 자! 이제 따님 이야기 좀 해 볼까요? 구지연 환자분 일주일 동안 결과 기다리기 힘들었죠?”
“네. 시간이 참 안 가더라고요.”
“저기, 워, 원장님 우리…… 지연이 결과는?”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으며 잠시 긴장이 풀렸던 김말자는 태경의 말에 다시 긴장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보니까 따님보다 어머님이 더 긴장하셨네요.”
“말도 마세요. 병원 오는 동안 말씀도 한마디 안 하시고 계속 긴장하고 계셨어요.”
“지금도 표정 보니까 상당히 긴장하신 거 같네요.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김말자와 구지연의 눈동자가 팽창하며 태경의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암 아닙니다.”
“하아!”
“정말요? 어머나 세상에!”
암이 아니라는 말에 숨을 참고 집중하던 두 모녀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긴장감과 불안감에 싸여 있던 두려운 마음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김말자는 자신이 완치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보다 더 기뻐하며 입에서 감사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내년에 결혼을 앞둔 젊은 막내딸이 혹시라도 암이면 어쩌나 걱정이 가득했는데 암이 아니라고 하니 정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여기, 화면 한 번 보세요. 이게 일주일 전에 우리가 했던 초음파 화면이에요.”
태경은 책상 위에 있는 두 개의 모니터 중 한 개를 모녀가 앉은 방향으로 돌려줬다.
“이쪽이 왼쪽 유방 초음파 화면이고 보시면 검은색 동그라미 보이시죠?”
“네, 선생님.”
“여섯 시 방향으로 있고 크기는 0.6cm로 물혹이에요. 우리 보통 혹 모양이 예쁘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동그랗게 예쁜 모양으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테두리도 울퉁불퉁하지 않고 경계선이 확실하죠?”
“네. 모양이 정말 확실하네요.”
“그렇죠?”
“선생님 그런데 여기 좀 물혹 끝에 삐져나와 보이는 건 괜찮은 건가요?”
“네, 괜찮습니다.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자! 그리고 이번에는 오른쪽 유방 초음파 화면이에요. 조직검사를 한 쪽이 오른쪽이죠.”
이미 좋은 결과를 들었음에도 구지연과 김말자는 태경의 설명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11시 방향에 0.46cm 크기의 혹이 보이는데 보면 왼쪽 거랑 비교했을 때 모양이 좀 다르죠?”
“네, 크기는 작기만 뭔가 왼쪽 것처럼 모양이 분명하지 않은 느낌이 좀 있는 거 같아요.”
“맞아요. 보기에도 그렇죠? 그래서 제가 조직검사를 했고 결과는 섬유낭성 변화고 경화성 기질이라고 조직검사 결과지에 나왔는데 해석하면 양성진단이며 암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1년 동안 6개월에 한 번씩 경과 관찰하고 괜찮으면 그 뒤에는 1년에 한 번씩 보면 돼요.”
보통 유방 초음파를 볼 때 초음파를 보는 의사들은 그냥 혹인지 암인지 구별이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물론 그만큼 경험이 쌓이고 초음파도 많이 보고 결과도 많이 본 의사들을 두고 한 말이다.
경험이 풍부하고 실력이 좋은 태경 역시 초음파를 보면 이게 암인지 아닌지 구별이 가능하다.
일주일 전, 구지연의 초음파를 보고 선명하지 않은 모양 때문에 조직검사까지 했지만, 태경은 사실 암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하게 다섯 번째 바이탈 냄새가 암을 뜻하는 냄새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다섯 번째 바이탈이 없는 환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태경은 참고만 할 뿐 의존하진 않는다.
암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조직 검사를 하는 이유는 의사는 정확한 근거를 기반으로 결과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환자가 걱정하는 그 마음은 잘 알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암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을 섣부르게 해서는 안 된다.
물론 태경도 조직 검사하기 전, 결과를 말할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딱 한 가지다.
화면을 이렇게 보고 저렇게 봐도 암이 확실한 경우가 있다.
암이 화면을 뚫고 나올 정도로 확실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럴 경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모양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정확한 검사 결과를 봐야 확실하겠지만 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로 조직검사를 하는 게 좋습니다.’
지금까지 태경이 저렇게 말한 경우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이 결과가 모두 좋지 않았다.
“추적 관찰은 말 그대로 정기적으로 보면서 변화가 있는지 보는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셨죠?”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우리 막내딸이 내년에 결혼도 해야 하는데 제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요.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런데 이런 혹은 왜 생긴 거예요? 나름 운동도 꾸준히 다니고 술, 담배도 하지 않고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는데 생기니까 뭔가 좀 억울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명확한 이유는 없어요. 그러니까 괜히 본인 탓을 하지 마시고 스트레스받지도 마세요.”
“원장님, 그런데 저 그때 유방암 확진 받고 우리 딸들 유전자 검사를 했을 때 유방암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없다고 했는데 이거랑은 관련 없는 건가요?”
“네, 구지연 환자분은 검사 결과 암이 아니었잖아요. 따님 괜찮으니까 어머님은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혹시라도 나 때문에 딸이 이렇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더더욱 하시면 안 됩니다.”
혹시나 김말자가 이번 일을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걱정할까 봐 태경은 다시 한번 괜찮다고 확실하게 말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검사받는 분이 고생하셨죠.”
“그러면 6개월 뒤에 보는 걸로 하죠.”
“네,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원장님 수고하세요.”
“네, 김말자 님. 늘 건강하세요.”
두 모녀는 태경의 인사를 받으며 병원에 들어왔을 때와 다르게 기분 좋은 얼굴로 진료실을 나왔다.
“여기 영수증 받으시고 다음번 검진이 6개월 뒤인데 일단 편하신 날짜 예약하시거나 그때 연락 주셔도 돼요.”
“일단 8일로 해 주시고 제가 일정이 있으면 미리 연락드릴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여기 보험 서류는 봉투에 넣어 드렸어요.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엄마, 이제 마음 좀 풀렸어?”
“그럼. 무슨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기분이야.”
얼굴이 밝아진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가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리 딸 일주일 동안 마음고생 했을 텐데 애썼다.”
“애쓰긴. 나보다 엄마가 더 했지.”
“조직 검사한 데는 괜찮은 거지? 멍들거나 아프진 않고?”
“그럼. 어제도 말했다시피 아프지도 않고 피도 거의 안 났어. 엄마, 근데 여기 선생님 진짜 설명 꼼꼼하게 잘해 주신다.”
“저분이 원래 환자한테 그렇게 다정해. 엄마 투병할 때도 얼마나 잘해 주셨는지 몰라.”
“좋은 분이시다. 나 때문에 엄마 병원까지 같이 오느라 고생했어.”
“자식 일에 고생할 게 뭐 있어. 내 새끼 일인데 열 일 제쳐 두고 와야지.”
“역시 울 엄마가 최고야.”
“지연아?”
두 사람이 주차장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남자친구가 한걸음에 뛰어왔다.
“뭐야? 어머니랑 너 표정 보니까 결과 좋구나? 맞지?”
“응. 암 아니래. 걱정할 거 없대.”
“그것 봐! 내가 아니라고 했지? 진짜 다행이다.”
마음 졸이고 있던 남자친구 역시 이제야 웃음을 보이며 얼굴이 밝아졌다.
“엄마 배고프지? 좋은 결과 들어서 그런가 갑자기 배가 엄청 고파.”
“밥 안 먹었으니까 배고프지. 현준이도 배고프겠다.”
“엄마는 아침도 안 먹었잖아.”
“제가 오늘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가세요.”
“그래. 같이 맛있는 거 먹자. 나, 화장실 좀 금방 갔다 올게.”
김말자가 화장실을 간 사이, 한껏 기분이 좋은 구지연은 남자친구와 함께 메뉴를 고민했다.
“뭐 먹지?”
“보니까 칼국수, 수제비, 쌈밥, 국밥이 있는데 리뷰 보니까 맛있다고 하네. 어머니 수제비 좋아하시지 않아?”
“올! 기억력 뭔데? 그럼 다 같이 수제비 먹으러 갈까? 괜찮아?”
“난 좋지. 어머니 나오신다.”
두 사람이 점심 메뉴를 끝낸 사이 화장실을 갔던 김말자가 주차장으로 나왔다.
“엄마, 우리 수제비 먹으러 가려고 하는데 어때?”
“수제비?”
“응. 별로야?”
“별로긴. 배고플 텐데 가서 현준이랑 맛있는 거 먹어.”
“엄마는?”
“…….”
“엄마!?”
바로 앞에서 불러도 대답 없는 엄마를 구지연이 다시 불렀다.
“어? 왜?”
“수제비 괜찮으냐고?”
“엄마는 못 갈 거 같아.”
어딘가 김말자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