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17화 (416/472)

417화. 나! 임신했어!

“……!”

곧이어 구동곤과 이예림 머리 위로 온갖 쓰레기들이 쏟아졌다.

“꺄아악!”

“이게 뭐야!”

쓰레기통 안에 있던 남은 커피와 음료수가 두 사람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으며 콧물과 이물질 등이 묻은 더러운 휴지 조각들도 함께 쏟아져 내렸다.

두 사람은 아직 김말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자기야, 이것 좀 어떻게 해 봐! 내 얼굴에 이상한 거 쏟아졌잖아.”

쏟아진 쓰레기를 뒤집어쓴 이예림은 소리를 질렀고, 구동곤 역시 소리를 높이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게 다 뭐야? 당신 누구……!”

두 사람이 서로의 머리와 얼굴에 붙은 쓰레기를 털어내며 큰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든 그때였다.

“쓰레기만도 못한 것들.”

잔뜩 날 선 목소리의 김말자는 두 사람을 벌레 보듯 쳐다보며 말했다.

“…….”

“……!”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한 두 사람은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얼어 버렸다.

세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고 병실 안의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졌다.

“당신 여기가, 농장이야?”

“여, 여, 여……보?”

김말자가 정적을 깨며 싸늘하게 말하자 구동곤이 마치 버퍼링이 걸린 기계처럼 버벅거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말해 봐. 여기가 농장이냐고? 어떻게 또 이런 짓을 해!”

“여보. 그, 그게 말이야. 내가 다 설명할게.”

구동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아연실색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젊은 여자랑 병원에서 붙어먹고 있는 걸 내가 봤는데 설명하긴 뭘 설명해! 여기가 농장이냐고!!!”

“내가 농장을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래서 당신한테 말하려고…….”

“안녕하세요!”

구동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생각나는 대로 내뱉던 그때 이예림이 눈치 없이 끼어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전 이예림이라고 해요. 이미 다 보셨다니 길게 설명하지 않을게요. 저 오빠랑 만나고 있어요.”

“하!”

“가볍게 만나는 사이도 아니고 진지하게 만나고 있어요.”

“하하하!”

미안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도가 지나치게 해맑은 이예림을 보며 김말자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버렸다.

“저 사람이랑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고?”

“네, 사랑하는 사이에요.”

“사랑? 이봐! 너 몇 살이야?”

“저요? 저도 먹을 만큼 먹었어요. 마흔다섯이요.”

“그러게. 그 나이면 아는 만큼 아는 나이고 사리 분별이 가능한 나이긴 하네. 그런데 마흔다섯이나 처먹은 사람이 가정 있는 남자랑 뭐? 사랑?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넌 그냥 상간녀야.”

“뭐, 뭐라고요? 상간녀? 내가 왜 상간녀예요?”

“가정 있는 남자랑 바람을 피우는데 그게 상간녀가 아니면 뭔데?”

“아닌데요.”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에게 공통된 모습이 있다.

그들은 배려심이라는 마음이 없으며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조차 오직 자기 합리화를 통해 상황을 모면하려 하며, 대화가 안 통하는 성향을 보인다고 했다.

게다가 연인 사이에서 바람이 아닌 결혼을 한 상태에서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은 더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겠다는 서약 아래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겠다는 부부 사이에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암묵적인 약속을 깨뜨리고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린 행위는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엄연히 따지면 전 돌싱이라 상간녀는 아니에요.”

바람피우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 준 이예림은 급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 오빠 진심으로 좋아, 아니 사랑해요. 나이 많이 차이 나는 것도 상관없고 사람들 시선도 두렵지 않아요. 오직 사랑만 보고 저 사람 선택한 거예요. 간통죄도 폐지된 거 보면 가정 있는 사람 선택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너 식당 보고 접근했니? 내가 이혼이라도 해 주면 너가 그 식당 안주인이라도 될 거 같아?”

“모, 못 할 것도 없죠. 저 요리되게 잘하거든요.”

“그 꼬락서니를 하고 퍽도 잘하겠다.”

김말자가 휘황찬란하다 못해 번쩍이는 큐빅까지 박혀 있는 손톱을 보며 썩은 미소로 말했다.

“식당 안주인 욕심 내는 거 보니까 돈 보고 접근했나 본데, 그 식당에 이 남자 지분 1도 없어. 내 식당이야.”

사실이었다.

지금 운영하는 식당은 시부모님께서 김말자에게 물려준 식당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시어머니가 말했지만, 시아버지의 확고함으로 김말자가 식당 주인이 됐다.

아들인 구동곤이 아닌 며느리에게 물려준 이유는 타고난 성실함과 일머리가 뛰어났고 손끝이 야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동곤에게 물려주면 식당이 망할 것 같았다.

‘어미야, 명심해라. 아무리 동곤이 자식이 지랄하며 떼를 쓰더라도 절대 식당 공동명의로 바꾸면 안 된다.’

나이가 들어 식당 일에 손을 떼고 시골로 내려간 시아버지는 어느 날 김말자를 시골집으로 부르며 속마음을 보였다.

‘내 아들이지만 저놈한테 식당 넘기면 지가 크게 확장한다고 설치다가 팔아먹을지도 몰라. 그리고 혹시나 말이다. 살면서 동곤이가 네 속을 썩이고 썩이다 너무 힘이 들면 있잖니, 그땐 이혼하고 너 혼자 살아라.’

‘아버님.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동곤이가 어릴 때부터 하나에 꽂히면 정신을 못 차렸어. 진득하게 뭘 하지도 않고 그저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만 좋아하는 성격이잖니. 그것 때문에 네가 힘든 일이 생길까 봐 그래. 그러면 미련 없이 네 갈 길 가.’

‘힘든 일 헤쳐 나가는 게 부부 사이인데 힘들다고 내 사람 버리면 안 되죠.’

‘너한테 면목이 없어서 그래. 넌 시집와서 고생만 했잖아.’

시아버지는 자식들보다 김말자를 더 아꼈는데 이유는 단순히 일머리가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렸고 돌아가기 1년 전부터는 그야말로 벽에 똥칠할 정도로 그 증세가 심했다.

돈을 받고 일하는 간병인들조차 못하겠다고 한 힘든 일을 김말자가 전부 다 했다.

‘우리 어머니 오늘은 변도 시원하게 보셨네. 잘하셨어요.’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까 어제보다 더 산책 좀 길게 해요.’

‘어제보다 머리카락을 더 뽑으셨네? 아직 기운도 좋으셔.’

‘오늘 자장가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남진 오빠 노래입니다.’

식당 일을 하고 피곤한 몸으로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다 받고 머리채를 뜯겨 가며 몸을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기까지 하며 극진히 모셨다.

자식들보다 더 헌신적으로 아내를 병간호한 며느리였기 때문에 시아버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웠다.

그래서 시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전부 며느리 앞으로 남겼다.

“전 돈 보고 그런 거 아니에요. 돈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 사랑이 더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김말자의 말을 들은 이예림은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이내 당당하게 사랑을 강조하며 다시 말했다.

“내가 이 사람이랑 이혼하면 이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너도 개털이란 뜻이야. 이혼을 원해? 그럼 해 줄게.”

“여, 여보 나는…….”

“시끄러. 내가 병원에 왜 왔는지 궁금하지? 지연이 유방 조직 검사 결과 들으러 왔다가 우연히 당신 보고 병실을 전부 다 뒤졌어. 지연이는 혹시라도 암이면 어쩌나 싶어서 일주일을 전전긍긍하고 얼굴이 다 홀쭉해져 있었는데 당신은 아빠라는 인간이!”

김말자는 버럭 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었다.

“아빠라는 인간이 바람을 피우고 있어? 어! 나한테도 그러더니 어떻게 자식한테 또 이러래?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니?”

주먹을 말아 쥔 손이 구동곤을 사정없이 내려치며 한 서린 목소리가 병실 안에 울렸다.

“사람이야? 사람이냐고!”

“어머, 어머! 오빠 괜찮아?”

정말인지 눈치를 밥 말아 먹은 이예림은 이 와중에 구동곤을 감싸며 김말자 앞을 가로막았다.

“아줌마 왜 사람을 때리고 그래요? 말로 해요. 말로. 사람은 원래 예쁜 것에 눈이 가는 법이에요. 남편이 한눈파는 게 싫었으면 아줌마가 관리했어야지? 관리 못 해서 오빠가 나한테 눈 돌린 걸 왜 오빠 탓을 해요.”

“이혼하고 싶어?”

“네, 이혼해 주세……꺅!”

구동곤에게 묻는 말에 이예림이 대신 대답하려 하자 고개를 떨구고 있던 구동곤이 이예림을 밀치며 아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여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눈이 회까닥 돌았었나 봐.”

이예림과 놀아나긴 했지만, 애초부터 이혼 생각이 없던 구동곤은 사태 심각성을 느끼며 김말자에게 빌었다.

“여보, 나 정말 이혼할 생각 추호도 없어. 거기 왜 우리 거래처 있잖아. 도축장에서 몇 번 오다가다 말 섞으면서 친해지긴 했는데……. 내가 잘못했어. 내가 이렇게 빌게. 어! 미안해.”

“미안? 잘못을 저질러 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 받아 줘야 하는 거야?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끝이니? 애초에 미안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난 당신한테 미련 없어.”

“그러지 마. 여보. 내가! 내가 죽일 놈이야.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한 번만!”

마음이 급해진 구동곤은 아내의 다리를 붙잡으며 손이 발이 되게 빌었다.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야?”

구동곤이 자기를 밀자 충격을 받고 멍하니 있던 이예림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

“나 좋다며?”

이예림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본처에게 만나는 상황을 들켰다지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다.

입안의 사탕처럼 자기를 위해 주고 좋아해 주던 사람이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한마디로 낙동강 오리 알이 된 기분이었다.

“나 없으면 안 된다며?”

“야! 내가 언제 그랬어?”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그래서 건강검진도 받으라고 했잖아.”

“너, 자꾸 없는 말 할래? 여보, 지훈 엄마? 이거 다 거짓말이야. 나 안 그랬어.”

“오빠 정말 왜 이래?”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이예림은 급기야 김말자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뻔뻔하게 말했다.

“내가! 저 여자보다 못한 게 뭔데?”

길게 연장한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노려보는 이예림은 자존심이 잔뜩 상했다. 바로 김말자에게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딱 봐도 내가 훨씬 낫잖아.”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도 눈앞에 서 있는 여자는 자기보다 못한 존재였다.

나이도 훨씬 많았고 빠글거리는 파마머리에 주름진 손 그리고 허리 경계선이 보이지 않는 뱃살까지.

어느 면으로 봐도 더 이상 여자라는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는 늙은 여자였고 본인이 훨씬 더 좋았다.

그런데 저 여자에게 절절매는 구동곤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안 좋았다.

“이런 늙은 여자보다는 내가 좋잖아. 내가 더 예쁘잖아!”

“야! 너 헛소리 그만하고 입 좀 다물어.”

“내가 왜. 입을 다물어. 내가 왜!!! 아줌마 나 오빠랑 절대 못 헤어져요. 절대로.”

“이예림 너, 이상한 소리 그만하라고. 난 너랑 계속 만날 생각 없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기가 막히고 황당한 김말자를 두고 구동곤과 이예림이 더 날뛰고 있었다.

“저, 늙어 빠진 여자보다 내가 뭐가 부족한데?”

“그만 조용히 해라. 여보, 이 여자 말 듣지 마.”

“아줌마 나 오빠 포기 못 해요.”

“넌, 바람피워 놓고 뭐가 이렇게 당당하니? 적어도 죄송하다고 사과는 해야 하는 거 아니니? 양심이란 게 아예 없어?”

“내가 왜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이게 진짜 너! 입 다물라고 했지? 여보 이 여자 말 듣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 내가 다 설명할게.”

“오빠!! 정말 이럴 거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너 입 다물라고 했다.”

“나! 임신했어!”

구동곤이 꿈쩍도 하지 않고 무릎 꿇은 채 계속 빌기만 하자 눈이 돌아간 이예림이 돌이킬 수 없는 폭탄 발언을 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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