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다리에 힘이 풀리고 기운이 하나도 없고
김말자와 구동곤, 이예림이 있는 병실이 아수라장이 된 그 시간, 병원에서 출발한 구지연은 남자 친구와 밥을 먹는 중이었다.
“주문하신 계란찜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천히 먹어. 아까는 밥 생각 없다고 하더니 보니까 배 많이 고팠네.”
“결과 듣기 전에는 진짜 밥 생각 전혀 없었는데 결과 듣고 나니까 그때부터 막 허기가 지더라고. 현준아. 여기 순두부 맛있다.”
“수제비 말고 밥 먹길 잘했지?”
“어, 완전. 역시 한국인은 밥심인가 봐. 반찬도 너무 맛있어.”
“어머니 반찬보다?”
“아니! 요리는 우리 엄마가 최고지.”
“그거 인정이지. 우리 부모님도 어머니 음식 솜씨 좋다고 하셨어. 그나저나 일주일 동안 마음고생 하느라 애썼어.”
“아니야. 고생은 내 짜증 다 받아 준 네가 했지.”
“너가 무슨 짜증을 냈다고 그래. 혼자 끙끙 앓았으면서. 결과 좋아서 진짜 기분 좋다. 앞으로 먹는 거 조심해야 할 거나 그런 건 없대?”
“응. 그런 건 없고. 일단 6개월 뒤에 와서 다시 초음파 하면 돼.”
“다행이네. 여기 어머니도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니까 엄마도 내 걱정하느라 아침도 안 드셔서 배고플 텐데 이모랑 드시려나.”
“병원에서 급하게 가셨는데 전화 한번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잘 도착했나 전화해 보려고. 어!”
남자친구와 대화하며 밥을 먹고 있던 도중 구지연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 온 사람은 김말자의 친동생인 이모였다.
“전화 왔다.”
“어머니?”
“아니. 이모 전화.”
“얼른 받아 봐.”
구지연은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 화면을 터치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모?”
-지연아?
“나 안 그래도 밥 먹고 이모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 마침 딱 오네.”
-너, 괜찮아? 유방 조직 검사 했다는 소리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벌써 들었어? 엄마가 말했구나?”
-언니가 오늘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 와서 한숨을 푹푹 시길래 물어봤더니 너 조직 검사 받았다고 하잖아. 나도 그 소리 듣고 지금까지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 결과는 어떻게 됐어? 이상은 없대? 괜찮은 거지?
“아무 이상 없대.”
-다행이다. 고생했다. 이모가 오늘 하루 종일 일하면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
“이모 기도 덕분에 이상 없었나 봐. 감사합니다.”
-가족끼리 감사는 무슨. 그런데 네, 엄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니?
“어?!”
난데없이 엄마를 찾는 이모 말에 구지연은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엄마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그래. 내가 몇 통화나 했는데 아무리 해도 안 받잖아. 네 엄마 전화 이렇게 안 받는 사람이 아닌데 계속 안 받으니까 결과가 안 좋은 건가 싶고 계속 걱정하다가 너한테 한 거야.
“이모 잠깐만! 엄마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내가 왜 언니랑 같이 있어. 엄마 너랑 같이 병원 간 거 아니야?
“아니. 병원은 같이 온 게 맞는데 결과 듣고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면서 이모 만나러 간다고 했어.”
-언니가 날 만나러 간다고 했다고? 너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나, 오늘 중요한 일 있어서 내가 주말에 간다고 했는데…….
“이모, 내가 일단 전화 끊고 엄마한테 전화 좀 해 볼게.”
-그래, 알았어. 엄마한테 전화하라고 좀 전해 주고, 지연이 애썼다.
“네, 들어가세요.”
통화를 하면서 뭔가 이상함을 느낀 구지연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가 이모님 만나러 가신 게 아니래?”
“어. 엄마 안 갔대.”
“아까 주차장에서 분명히 이모님한테 일 있다고 하셨잖아.”
“그랬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어머니 혹시 다른 일 있는 거 아니야?”
“…….”
“지연아?”
“…….”
“구지연? 자기야?”
“현준아.”
남자친구 말도 들리지 않을 만큼 깊이 생각하고 있던 구지연이 진지한 얼굴로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가자.”
“가자고? 어딜? 너 아직 밥도 다 안 먹었잖아.”
“그렇기는 한데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닌 거 같아. 현준아. 나랑 지금 병원 가자.”
“병원? 왜? 너 안 좋아?”
“아니, 그게 아니라 엄마 때문에. 엄마 병원에 있는 거 같아. 뭔가 느낌이 그래.”
“그래. 알았어. 가자.”
* * *
우리병원-
“김건 씨 보호자분 되세요?”
“네, 제가 형인데요. 제 동생 어떻게 된 거예요.”
태경은 응급실에서 119에 실려 온 대학생 환자를 보고 있었다.
“동생분이 학교에서 넘어져서 119에 실려 왔어요.”
“네? 너 진짜야?”
“응. 어떤 미친놈이 바나나 껍질을 바닥에 버렸는데 핸드폰 보다가 밟고 계단에서 넘어졌어.”
“그러게 핸드폰을 왜 봐. 환장한다. 선생님. 동생 상태가 어떤가요?”
“오른쪽 정강이뼈의 금이 갔고 꼬리뼈에도 금이 간 상태입니다. 처음 응급실에 왔을 때 허리에 통증을 호소했는데 다행히 척추 쪽에는 이상이 없어요.”
“뼈 안 부러진 게 다행이네.”
“선생님, 저 깁스는 얼마나 해야 해요?”
“현재 상태로는 10주에서 12주 정도는 해야 할 거 같네요. 기다리시면 깁스해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챠륵-
“7번 깁스 좀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원장님?”
“원장님!”
대학생 환자를 보고 베드에서 나오자마자 임정숙 간호사와 최 팀장이 급하게 태경을 불렀다.
“병동으로 좀 가 보셔야 할 거 같아요.”
“지금 아주 그냥 난리가 났습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어요.”
“응급이에요? 누구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막장 드라마 한 편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네?!”
병동 환자가 위급한 줄 알고 급하게 뛰어가려던 태경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막장 뭐요?”
“팀장님도 정말!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요?”
“아니,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잖아요.”
“됐어요. 구동곤 아내분이 찾아와서 병실이 시끄러운데 그 아내분이 김말자 씨에요.”
“김말자라면 설마……. 아까 왔던 구지연 씨 어머니 그 김말자 씨요?”
“네, 맞아요.”
“일단 알겠어요.”
임정숙 간호사의 말을 들으며 상황이 파악된 태경은 두 사람을 따라 급히 병동으로 올라갔다.
“저, 저거 진짜 미친년일세.”
“그러게, 말이야. 세상에 별일이 다 있다지만, 어떻게 저런 일이 다 있냐.”
“기가 막혀.”
세 사람이 있는 병실 앞에는 하나둘 모인 환자들로 정신이 없었다.
김말자가 처음 쓰레기통을 병실로 들고 들어갔을 때, 워낙 세게 문을 열어 미닫이문이 닫혔다가 다시 열렸다.
그뿐 아니라 높아지는 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환자들이 점점 더 모여들고 있었다.
병동 간호사들이 말렸지만, 사람들은 병실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상에! 들었어? 저 여자 임신했대.”
“지랄을 아주. 쌍년 놈들이 세트로 지랄하는 구나. 저게 말이 돼.”
“다들 어서 들어가세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안 되는 거 아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생각해도 저건 아니잖아요.”
“맞아요. 둘 다 아주 그냥 벼락을 맞아야 하는데 에라이! 더러운 것들.”
“난 저런 것들 보면 아주 이가 갈린다니까. 바람피워서 저 나이에 임신이라니 세상에……. 이러니까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 한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자자! 환자분들 그만 들어가세요.”
“어머, 원장님까지 오셨네.”
“원장님 저 여자 임신했대요.”
“그만 병실로 돌아가세요.”
병동에 올라온 임정숙 간호사와 최 팀장이 환자들을 정리하는 사이 태경은 병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야! 너,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여보 아니야. 나 알잖아. 정말 아니야. 난 같이 잔 적도 없어.”
“못 들었어? 나! 임신했다고.”
이예림은 병실에 들어온 태경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또다시 본인이 임신했다는 걸 강력하게 어필했다.
“이예림 씨!”
그 순간, 태경이 이예림 앞을 가로막으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임신 아닙니다.”
“네, 네?”
“검사 결사상 임신이 아니라고요.”
병원에서 모든 건강검진을 한 이예림의 상태를 태경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피검사도 초음파 검사도 지극히 정상으로 특이점이 없었다.
무엇보다 임신한 사람은 수면 내시경을 하면 안 되는데, 알 만한 나이에 그것도 본인이 임신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내시경을 받을 리도 없었다.
결국 이예림은 눈에 보이는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던 것이다.
“임신이라고? 하!”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말자가 조용히 이예림에게 다가가 실소를 날리며 말을 이었다.
“저 남자 묶었어.”
“……!”
거짓말이 탄로 난 이예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런 이예림을 향해 김말자는 사이다를 날리기 시작했다.
“너 아까 나한테 관리 못 했냐고 물었지? 나도 관리했어. 다만 난 내 자식들이랑 가정을 관리하며 살았어. 날 관리할 시간에 내 새끼들 먹이고 입히고 일하면서 살았어. 너처럼 가정 있는 남자랑 바람피우지 않고 착실하게 열심히 살았어. 젊은 거? 예쁜 거? 그거 다 한순간이야. 영원할 거 같니? 너도 늙어 나처럼.”
“…….”
“사람이 짐승이랑 다른 이유가 뭔 줄 알아? 양심이 있다는 거, 그게 달라. 적어도 사람 새끼라면 짐승처럼 발정 난 듯 이 사람, 저 사람이랑 몸 섞고 다니지 않아. 내가 식당을 하는 사람이라 위생에 엄청 신경 쓰거든. 더러운 걸 보면 못 참아. 내가 보기에는 둘이 구린내 나는 쓰레기니까 둘이 붙어먹든 말든 알아서 해!”
“여, 여보? 말자야?”
“이거 놔! 죽이고 싶은 마음 굴뚝같으니까 나 따라오지 마.”
묵직한 팩폭을 날린 김말자가 그대로 병실을 나가려 하자 구동곤이 팔은 잡으려 했다. 하지만 아내의 매서운 눈빛에 더 이상 따라가지 못했다.
“이거 보세요. 구동곤 환자 이예림 환자. 제가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말라고 부탁드렸죠? 이게 지금 뭡니까?”
“죄, 죄송합니다.”
태경은 멍해 있는 이예림과 사과하는 구동곤을 쳐다보며 소란 피운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 뒤, 퇴원이 하루 남은 두 사람의 병실을 옮기라는 말을 남기고 임정숙 간호사에게 정리를 부탁하며 급히 병실을 나갔다.
태경이 급하게 병실은 나온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 저 두 사람보다 김말자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괜찮으세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던 김말자가 잠시 주춤하며 휘청거리자 뒤에서 뛰어온 태경이 그녀를 부축했다.
“죄송해요. 원장님.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안 괜찮네요.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고 기운이 하나도 없고 그냥 다……. 모르겠어요. 지금은 혼자 있고 싶네요.”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태경은 김말자를 부축하며 조용히 직원 당직실로 향했다.
“여기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그녀를 당직실로 데려온 이유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져 버릴 것만 같은 김말자를 위해서였다.
마음에 쌓인 울분을 마음껏 배출하고 마음이 진정할 수 있도록 조용히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물 한 잔 드시고 여기서 편하게 않아 있으세요.”
“감사……흐!”
따뜻한 물이 담긴 종이컵을 건네받던 김말자는 순간 꼭 잡고 있던 감정의 매듭이 순식간에 풀리며 눈물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