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20화 (419/472)

420화. 선명한 수술 자국

똑똑-

“원장님?”

병동에서 내려온 임정숙 간호사가 태경의 진료실 문을 노크했다.

“네.”

철컥-

“안 그래도 지금 나가려고 했는데 오셨네요.”

“여기 말씀하신 거요.”

자리에서 일어난 태경은 임정숙 간호사가 내민 무릎 담요를 건네받았다.

“그런데 이건 왜 찾으신 거예요?”

“당직실이 조금 썰렁한 거 같아서요.”

“아, 김말자 님 드리려고요?”

“네. 위에는 정리됐나요?”

“네, 병실 옮기는 것도 말하고 정리가 됐긴 한데 구지연 씨가 구동곤 씨를 찾아왔어요.”

“그래요? 별일 없었어요?”

“그냥 병실에서 몇 마디 하고 나온 거 같아요. 큰 소란은 없었어요. 구지연 씨도 놀랐는지 얼굴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요.”

“딸인데 당연히 걱정되겠죠. 지금 외래 예약 환자는 다 본 거죠?”

“네. 원장님.”

“당직실 좀 다녀올게요. 이 선생이랑 최 선생 있으니까 환자 보면 되고 응급 오면 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임정숙 간호사와 대화를 마치고 당직실로 온 태경은 밖에서 눈물 소리가 멈출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똑똑-

그리고 노크 후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네.”

“접니다. 들어갈게요.”

“네, 원장님 들어오세요.”

철컥-

“흐읍.”

“오늘 날씨가 좀 쌀쌀하네요.”

“감사합니다. 원장님.”

태경은 휴지로 눈물을 훔치는 김말자에게 가져온 무릎 담요를 건넸다.

“원장님께 못 꼴을 보여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김말자 님이 죄송할 일은 아니죠. 하나도 죄송한 거 없어요. 속상하시죠?”

“네, 그런데 한바탕 울고 나니까 그래도 좀 낫네요. 아까는 정말 속이 콱 막힌 것처럼 답답했거든요. 원장님은 구동곤이 제 남편인 줄 모르셨죠?”

“네, 몰랐습니다.”

사실 태경은 구동곤이 김말자의 남편이라는 말을 듣고 속으로 놀랐었다.

보통 암 환자는 장기적으로 치료하기 때문에 환자를 많이 보는 만큼 보호자 역시 여러 번 보게 된다.

그런데 김말자가 암 치료를 받는 동안 구동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원장님은 못 보셨을 거예요. 왜냐하면 저 사람, 저 아파서 치료하러 다닐 때 수술한 날 저녁에 한 번 오고 그 뒤로 병원에 온 적도 함께 가 준 적도 없어요.”

마음이 진정된 김말자는 덤덤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식당 일 때문에 제가 굳이 오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여자를 만나고 있었더라고요.”

어이없게도 구동곤은 외도가 처음이 아니었다.

김말자가 수술 후 치료에 집중하고 있던 당시 등산 동호회 회원과 잦은 만남을 이어 가고 있었다.

나중에 김말자가 모든 사실을 알자 깊은 사이도 아니었으며 그냥 사람이 궁금해서 친구처럼 가볍게 만났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며 외도를 극구 부인했다.

“남편이 그때 다른 여자를 만난 건 제 동생밖에 몰라요. 제가 이번에는 한 번 눈 딱 감아 주고 살 거라고 하니까 동생이 처음에는 미쳤냐고 펄쩍 뛰면서 화를 냈어요. 이 세상에 바람을 안 피운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피운 사람은 없다면서 봐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당연해요. 동생이랑 입장이 바뀌었어도 저도 화를 냈을 거예요. 그때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혹시 투병하는 것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요?”

“네, 원장님이 말씀하신 게 맞아요. 그때 당시 전, 저 자신이 가장 중요했어요.”

그 당시, 김말자는 마지막 항암을 앞두고 있었다.

유방암에 걸리고 항암을 시작하면서 정한 목표가 있었는데 바로 ‘완치’ 소리를 듣는 거였다.

치료받는 동안만이라도 오롯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살고자 다짐했기 때문에 그 일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화가 나고 속상했죠. 그런데 그 속상한 마음이 남편이 아니라 저를 향해 있었어요.”

“김말자 님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말씀인가요?”

“네, 저 때문인 거 같았어요.”

어느 날, 평소처럼 옷을 갈아입던 김말자는 우연히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봉긋하게 솟아 있던 양쪽 가슴을 도려낸 선명한 수술 자국과 함께 밋밋한 가슴이 눈에 도드라진 것이다.

그 순간, 이 납작해진 가슴 때문에 남편이 외도를 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과 함께 눈물이 쏟아졌다.

항암을 하면서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었을 때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마음이 남편의 외도 때문에 무너졌다.

“난 가슴도 없고 이제 여자로 보이지도 않는 건가, 그래서 내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남편이 외도한 건가 하면서 아주 별생각이 다 들었어요.”

“그건 김말자 님 때문이 아니에요. 절대 그런 생각 하시면 안 돼요.”

“맞아요. 제 탓이 아닌데 그 당시에도 그런 생각들이 들었어요.”

태경은 김말자의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 알고 있었다.

유방암에 걸린 환자들은 다른 암 환자보다 우울증과 스트레스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는 환자들이 꽤 많다.

다른 암에 비해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 부위인 유방을 절제하면서 겪는 상실감과 스트레스는 당사자가 아니면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투병으로 힘들었을 텐데 다른 것도 아닌 남편의 외도까지 겹쳤으니 김말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저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며칠 동안 고민했는데 내가 왜 힘든 시기에 이런 감정 소비를 하고 있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남편 문제까지 신경 쓰면 정말 정신과 약까지 먹어야 할 것 같았거든요.”

여기서 남편의 외도를 계속 신경 쓰고 이혼하고 사느니 마느니 하면 스트레스로 암이 재발할 것만 같았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는데 남편 일로 병을 키우고 싶지 않았기에 김말자는 그냥 그 일을 묻어 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달라진 남편을 믿고 살고 있었는데 또 여자 문제로 속을 썩일 줄은 정말 몰랐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질 않겠지만, 김말자 님이 많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죠. 그게 맞아요. 암 투병하고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었는데 뭐든 아등바등 끌고 갈 필요가 없더라고요. 그저 하루하루 감사하고 행복하게 살면서 스트레스받지 않고 사는 거 그게 최고인 거 같아요.”

“그럼요. 일상의 소중함이야말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죠.”

“네, 맞아요. 살면서 노력이란 걸 되게 많이 하고 산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노력해도 안 되는 걸 미련하게 붙잡을 필요는 없는 거 같아요.”

“제가 김말자 님 투병하면서 느낀 점이 있는데 그게 뭔 줄 아세요?”

“저요? 그게 뭔데요?”

“많은 환자 중에서도 이 사람은 참 씩씩하구나, 저 병과 싸워서 꼭 이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요? 원장님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갑자기 울적한 기분이 좋아지네요. 그런데 원장님이 그때 워낙 옆에서 잘 이끌어 주셔서 저도 힘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김말자 님이 가끔은 조금 덜 씩씩해도 될 거 같아요. 씩씩한 게 좋기는 한데 너무 힘을 콱 주면서 계속 씩씩하면 힘들잖아요. 내 힘든 걸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게 좋아요. 그게 친구든 가족이든 누구든 상관없고 굳이 속속들이 다 말할 필요도 없어요. 가끔은 주변에 힘든 걸 티 내면서 기대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저, 방금 놀란 거 아세요? 우리 둘째 딸이 저한테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요? 제가 따님과 통했네요.”

“원장님 말씀대로 부러지긴 보다는 구부러질 줄도 알면서 살아야 하는데 자꾸 잊어버리네요.”

“그리고 그때 일어난 일도 오늘 일어난 일도 그 무엇도 김말자 님 탓이 아니에요. 이까짓 일 아무것도 아니에요.”

태경은 가장 따뜻한 말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믿는 대로 된다는 말이 있죠? 뭔가 그럴싸한 뜬구름 같지만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에요. 인간의 뇌는 복잡하지만 또 단순한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큰일도 우리가 ‘아무 일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받아들인대요.”

“그러고 보니까 선생님이 저 수술 끝나고 항암 들어가기 전에 하셨던 말이 생각나네요.”

“어떤 말이요…….”

“내 몸에 있는 암이 어떤 놈이든 반드시 싸워서 완치할 거라고 했더니 원장님께서 믿는 대로 된다고 꼭 그렇게 될 거라고 하셨어요.”

“지금도 같아요.”

“네?”

“그때처럼 지금도 아무 일 아니라고 그렇게 믿으면 돼요. 괜찮고 또 괜찮아요. 김말자 님 멋진 인생에 이런 일 그저, 지나가는 소낙비 같은 그런 일이에요.

비 온 뒤에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화창하다는 거. 너무 뻔한 이야기지만 때론 뻔한 걸 잊고 살 때가 잊거든요. 금방 맑은 날 볼 수 있을 겁니다.”

“……!”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김말자는 별안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태경의 생각지 못한 진심 어린 위로에 저도 모르게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괜찮으세요?”

“흑! 아이고! 원장님 때문에 한바탕 눈물이 날 뻔한 걸 간신히 참았네요. 나이가 들면 이상하게 눈물이 많아지거든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김말자는 민망한 웃음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실에서부터 내내 답답했던 속내를 털어놓으니 속상한 마음이 어느 정도 환기가 되는 것 같았다.

“원장님 저, 이만 가 볼게요. 오늘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했어요.”

“전혀 소란스럽지 않았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좀 괜찮으세요?”

“제가 이래 봬도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이라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

“그럼요. 전 알죠.”

“원장님은 그때도 절 고쳐 주시더니 지금도 절 고쳐 주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김말자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한 마음을 전한 뒤 병원을 나섰다.

태경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부디 이번 일을 잘 이겨 내길 속으로 응원했다.

“엄마!”

김말자가 주차장으로 나가자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구지연이 차 문을 열고 나와 한걸음에 뛰어왔다.

“그냥 가지. 뭐 하러 다시 왔어.”

“뭐 하러 오긴. 우리 엄마 걱정돼서 왔지. 엄마 괜…….”

순간 저도 모르 게 괜찮은지 물어보려던 구지연은 그 말을 재빨리 삼키며 다급한 입을 닫았다.

엄마가 겪은 이 상황이 도저히 괜찮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본인보다 더 걱정 가득한 딸의 마음을 알고 있는 김말자는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하게 답했다.

“그나저나 우리 현준이한테 미안해서 어떡하나. 안 좋은 모습 보여서 미안해.”

“네!? 미안하시다니요? 어머니 병원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실은 저 회사에서 급한 연락이 와서 밖에서 계속 통화하고 있었거든요.”

“어! 맞아. 우리 병원 다시 도착하자마자 회사 후배한테 전화 와서 현준이 정신없었어.”

남자 친구는 김말자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일부러 모른 척했다. 구지연은 엄마가 민망하지 않도록 남자 친구의 좋은 센스에 한마디 덧붙였다.

“그랬어? 오늘 여러모로 우리 현준이가 고생했다.”

“고생은 지연이랑 어머니가 하셨죠. 어머니 아직 식사 안 하셨죠?”

“그러네. 엄마 배고프겠다. 근처 식당 가서 밥부터 먹자.”

“그러지 말고 식당 가서 우리 고기 먹자. 엄마가 현준이 좋아하는 돼지찌개도 끓여 줄게.”

“정말요? 어머니 돼지찌개는 최고죠. 얼른 가세요.”

김말자는 딸의 손을 잡고 차를 탄 뒤 미련 없이 병원을 떠났다.

병동 창문 위에서 구동곤이 쓸쓸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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