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화. 30분 만에 끝나 버렸다
그날 저녁-
“들었지? 그 불여시 본처랑 딸한테 한 방 제대로 먹더니 바로 꽁지 빠지게 도망갔잖아.”
“퇴원했다며?”
“당연히 퇴원해야지. 어디 아파서 수술하고 입원한 것도 아닌데 쪽팔려서 얼굴 어떻게 들고 다니겠어.”
“아까 딸이란 여자가 귀싸대기 날리는데 아주 그냥 내 속이 다 시원하더라.”
병동에는 여전히 이예림과 구동곤의 이야기가 화젯거리였다.
김말자가 병원을 나간 뒤, 한 시간도 안 돼서 이예림은 퇴원했다.
원래는 내시경 뒤, 수액을 맞고 다음 날 오전에 구동관과 함께 퇴원할 예정이었지만 더 이상 병원에 머물 수가 없었다.
물론 몸에 이상이 있다면 이런 소란이 있었어도 퇴원을 극구 말렸겠지만, 내시경을 포함한 건강검진에서 이상한 점 없이 건강했기에 굳이 퇴원을 반대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진정한 사랑을 외치며 진실함을 강조하던 이예림은 구동곤과 싸운 뒤, 모든 병원비를 계산하고 도망치듯 병원을 떠났다.
“많이 기다리셨죠?”
“아니요.”
문제의 주범인 이예림이 퇴원 후, 태경은 아파트 단지에서 차와 접촉 사고가 난 환자의 수술을 끝내고 대기실로 들어왔다.
“우리 애는 좀 괜찮은가요?”
“네,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내랑 계속 마음 졸였는데 다행이네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부러진 팔에 핀을 고정했고 뼈가 붙은 뒤에는 고정 치료를 할 겁니다. 그전까지는 무리하게 움직이면 안 되니까 보호자께서 신경 써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임정숙 간호사가 대기실에서 나오면서 태경을 뒤따라왔다.
“보호자분들이 많이 놀랐나 봐요.”
“듣기로는 일 때문에 이웃집에 맡겼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놀라서 지방에서 부랴부랴 올라오셨대요. 아이가 몇 년 전에도 병치레해서 더 놀라신 거 같아요.”
“그러면 많이 놀랄 수 있죠.”
“원장님. 그러고 지금 보호자분이 혹시 1인 병실로 옮길 수 있냐고 하셔서 지금은 병실 안 남고 내일 오전에 옮겨 드린다고 했습니다.”
“요즘에는 1인실을 선호하는 환자들이 많네요.”
“네, 아무래도 입원하는 동안 편하게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럴 거예요.”
“원장님?”
두 사람이 대기실을 나와 진료실로 향하던 중 누군가가 등 뒤에서 태경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부르는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네, 저도 분명 들었어요.”
“원장님?”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사람 앞에 근처 의자에 앉아있던 구동곤이 모습을 보였다.
“접니다.”
그는 환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입원했을 때 들고 왔던 작은 가방을 들려 있었다.
“아니, 환자분.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저, 퇴원하겠습니다.”
내일 퇴원하기로 되어있는 구동곤은 두 사람을 향해 퇴원할 것을 알렸다.
“꼭 퇴원시켜 주십쇼.”
“일단 저랑 같이 가시죠.”
태경은 그를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왔다.
“여기 앉으세요. 지금, 이 시간에 퇴원하시게요?”
“네, 퇴원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책상 위에 있는 시계로 향했다. 현재 시곗바늘이 오후 10시 38분을 지나고 있었다.
구동곤의 상태를 떠나서 퇴원하기에는 늦은 시간이 분명했다.
“너무 늦은 거 같은데 내일 퇴원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
“환자분?”
“아내가…….”
입을 꾹 닫고 있던 구동곤이 말을 하다 말고 다시 입을 닫았다. 그러더니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멈췄던 말을 다시 이어 나갔다.
“아내가 전화를 안 받습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 상황을 두 눈으로 목격했는데 전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제가 지금까지 수십 통을 했는데 아무리 해도 전화를 받지 않아요.”
계속되는 당연한 말에 태경은 뭐라고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몸이 아픈 것에 대한 상담이라면 자신 있게 답을 해 줄 수 있었지만, 부부 사이에 일어난 개인적인 일에 대해선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었다.
“아까 간호사 선생님께 물어보니까 아내가 원장님과 내려갔다고 했는데 혹시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구동곤의 표정은 간절했지만, 태경은 말하지 않았다.
환자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두 사람의 사적인 일이기 때문에 제삼자가 끼어드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장님께서 그 사람 암을 고쳐 주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와이프가 투병할 때 많이 힘들었을 텐데 일이 바쁘다고 핑계 대면서 따뜻한 말 한마디 응원 한마디 못 해 줬는데, 그게 두고두고 미안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때 제가 아내에게 큰 상처를 줬거든요.”
“김말자 님이 항암을 시작하고 외래를 보는 어느 날 저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우리 애들이랑 남편만 두고 죽을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투병할 거라고요. 애들 시집 장가 보내고 늙어서 남편이랑 손잡고 여행 다니는 게 꿈인데, 그 꿈 때문에도 이겨 낼 거라고 하시면서 정말 열심히 치료받으셨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제가…… 정말 나쁜 놈입니다.”
구동곤은 지신에게 험한 소리를 하며 신세를 한탄했다.
“그래서 말인데 원장님. 제가 지금 아내를 꼭 봐야 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내일 오전에 퇴원하는 건 어떨까요?”
“아니요. 저, 지금 집에 가야 합니다. 퇴원시켜 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태경의 계속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동곤은 퇴원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예림과 마찬가지로 구동곤 역시 몸에 질병이 있거나 수술한 것도 아니었고, 치료받은 허리도 애초에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퇴원하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에 오전에 하기를 권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퇴원 동의서에 사인을 한 그는 모든 수속을 마치 야밤에 병원을 나섰다.
“소란스럽게 해 드려서 죄송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는 인사 한마디 짧게 남긴 뒤 급하게 병원을 나갔다.
“임 선생님?”
구동곤이 퇴원 후 병동을 다녀온 태경은 응급실로 들어와 임정숙 간호사를 불렀다.
“1인실 정리되는 대로 207호 아이 병실 옮겨 주세요.”
“네, 보호자에게 전달할게요.”
“선생님? 선생님?”
태경이 임정숙 간호사에게 몇 가지 사항을 알려 주고 스테이션으로 향하자 환자를 보고 온 이찬희가 옆자리에 앉았다.
“301호 고열후 환자 드레싱 했지?”
“그럼요. 다 했죠. 선생님, 구동…….”
“이수연 환자 CT는?”
“올라오려면 20분 정도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 저 질문 있는데요?”
“누구. 구동곤 환자?”
“어떻게 아셨어요?”
“이 선생 얼굴에 궁금해 죽겠다고 쓰여 있어.”
“그래서 말인데요.”
“나도 그래서 말인데 질문하지 말고 나 병리과 좀 다녀올게.”
“예? 선생님? 가지 마세요.”
구동곤이 갑자기 퇴원한 이유가 궁금했던 이찬희는 결국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 * *
다음 날-
아내에게 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며 퇴원시켜 달라고 했던 구동곤은 어처구니없게도 24시간 찜질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전날,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집 앞까지 왔던 그는 한 시간 동안 대문 앞을 서성이다 끝내 벨을 누르지 못했다.
도무지 아내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단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 겸 근처 찜질방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한숨도 못 자고 머리가 터질 듯이 생각한 그는 해가 뜨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려 어제처럼 대문 앞을 서성이던 구동곤은 드디어 결심이 선 듯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다시 한번 더 누르려던 그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띠익-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 구동곤은 아주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보? 지훈 엄마?”
“왔어요?”
고요한 거실에서 안방을 향해 부르자 김말자가 반대편 화장실에서 나오며 답했다.
“아! 깜짝아!”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누가 보면 귀신이라도 본 줄 알겠네.”
“…….”
“그만 서 있고 와서 좀 앉아요.”
“어? 어. 그래.”
김말자는 멀뚱하게 서 있는 구동곤에게 식탁 의자를 빼 주면서 손짓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어. 괜찮아. 애초에 아픈 곳도 없었어. 그냥 불편해서 치료받으러 간 거야.”
“다행이네요.”
“저기, 여보?”
드르륵-
“당신 모닝커피 좋아하지? 물 끓여 놨는데 잠깐 있어 봐요. 마실 거죠?”
“그, 그럼.”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모닝커피를 타주는 아내를 보며 구동곤은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왠지 모르게 김말자의 속상했던 마음이 빨리 풀어질 것만 같은 희망이 생겼다.
“설탕 조금만 넣었어요. 나이 들면 단 거 줄여야 해요. 당분을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대요.”
“그래, 알았어.”
드르륵-
“여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어.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 깊은 사이는 아니었어. 안 그래도 정리하려고 했었어. 정말이야.”
김말자가 식탁에 커피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자마자 구동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당신한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데 한 번만, 제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줘. 내가 진짜 남은 인생 잘하면서 살게.”
“음! 오늘따라 커피가 맛있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사람처럼 심각한 구동곤과 달리 김말자의 표정은 한 치의 미동도 없이 평온 그 자체였다.
“왜 그러고 있어요?”
“…….”
“일어나 앉아요.”
“어?”
“일어나 앉으라고요. 허리도 안 좋은 사람이 바닥에서 그렇게 있으면 더 안 좋아요.”
“내가 진짜 잘못했어.”
“알았으니까 일단 앉아요.”
“어, 그래. 앉을게.”
“지훈 아빠?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요. 우리 결혼하고 부부로 꽤 오래 살았네. 그렇지?”
“그, 그렇지.”
“우리 사랑스러운 지훈이, 지영이, 지연이도 날고 긴 세월 동안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나름 잘 살았네. 가끔 철없긴 해도 밝은 당신이 좋았고 함께여서 힘을 낼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말자야. 내가 진짜 잘못했어.”
“내 말 끊지 말고 들어요. 그리고 나도 알아. 당신이 지금 나한테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런데 지훈 아빠? 내가 이제 아무 감정이 없어.”
“…….”
“지금 당신한테 속상하지도 화나지도 않아. 그 말은 이제 내 안에 구동곤이란 사람에 자리가 없다는 소리야.”
미움도 애정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이미 마음을 깨끗이 정리한 김말자는 말 그대도 아무렇지 않았다.
더 이상은 남편으로 가족으로 그와 함께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 암투병했을 때 당신, 그때 다른 여자 만난 거 들키고 아무 말 없이 넘어가서 당신은 내가 용서한 줄 알았겠지만, 아니야. 내가 너무 힘들어서 살려고 모른 척한 거야.”
“……!”
처음 듣는 아내 속내에 구동곤은 움찔했다.
“사람이 크게 아프면 좀 바뀐다고 하잖아. 나도 그런 거 같아. 당신은 벌써 두 번이나 부부 사이에 믿음을 깨 버리고 신뢰를 깨 버렸어. 그런 사람과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남은 인생은 속 편하게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싶어.”
드르륵-
평온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말투로 이야기하던 김말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챙겨 둔 구동곤의 짐을 거실로 옮겨 왔다.
“식당 일은 계속하고 싶으면 해도 돼. 그런데 직원들이랑 똑같이 월급 받고 일해야 할 거야. 식당 하면서 같이 고생한 건 사실이니까 당신 몫은 정리해서 줄게. 변호사에게 물어보니까 일한 부분은 인정해서 나누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구동곤이 예뻐서 주는 돈이 아니었다.
그도 식당 일을 열심히 한 건 사실이었고, 김말자는 무엇보다 둘 사이에 남기는 거 없이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협의 이혼이 제일 편한데 당신이 억울해서 소송하고 싶으면 해도 돼. 그럼 나도 변호사 알아보고 준비할게.”
“말자야…… 내가 붙잡아도 안 되는 거지?”
“지훈 아빠, 나 붙잡지 말고 놔줘요. 우리 각자 인생 살자. 당신도 나도 이제 남남으로 살아요. 나, 진짜 편하게 살고 싶어.”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구동곤은 김말자의 얼굴을 본 순간 확신했다.
아내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다는 것을. 저 사람 안에 자신의 자리가 더는 없다는 게 피부로 와닿았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정말 미안해.”
주름 하나 없이 젊고 싱그러웠던 시절에 만나 머리에 하얀 눈꽃이 내리고 손등 위로 주름이 생기도록 긴 세월을 함께한 두 사람 부부생활이 단 30분 만에 끝나버렸다.
“구동곤 씨, 잘 가요.”
구동곤은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초라한 모습으로 집을 나갔다.
편하게 살아갈 노년을 기대했던 그의 곁에는 아내도 자식들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쓸쓸함과 외로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