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큰손
‘자네가 김태경인가?’
‘네, 맞습니다.’
‘듣자 하니 우리 의진이랑 결혼을 하고 싶다고?’
‘허락해 주신다면 결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줄 수 없겠네요. 우린 그쪽이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엄마?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선배랑 만나는 거 좋아하셨잖아.’
‘의진아. 엄마 말 들어라.’
‘아빠까지 왜 그래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 친구는 네 짝으로 영 마땅치가 않아. 이보게. 김 선생. 이만 우리 집에서 나가 주지.’
-왈! 왈!
“……!”
-왈! 왈왈!
주말 아침 옆집 개소리에 놀란 태경이 잠자리에서 눈을 번쩍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뭐지?”
양쪽으로 까치집이 생긴 머리를 좌우로 움직이며 집 안을 둘러보던 그는 이제야 놀란 마음을 진정했다.
“와! 꿈이었네. 놀라라.”
주말에도 집보다 병원에서 보내는 날이 적지 않았던 태경이 병원이 아닌 집에서 아침을 맞이하게 된 건 오늘 의진의 집에 인사드리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전날 일부러 좋은 컨디션으로 일찍 잠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긴장한 탓인지 결혼을 반대하는 꿈까지 꾸고 말았다.
아까는 정말이지 꿈이 아니라 의진 부모님의 결혼 반대가 진짜인 줄 알고 상당히 식겁했다.
“정신 차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갔다 온 태경은 시원한 냉수 한 잔을 마신 뒤, 의진과 통화했다.
-선배, 일어났어요?
“방금 일어났어. 잘 잤어?”
-네, 모처럼 아주 푹 잘 자고 좋은 꿈까지 꿨어요. 선배는?
“좋은 꿈?”
-꿈에서 로또 1등에 당첨된 거 있죠? 그것도 17억짜리였다니까요.
“그래? 오늘 로또 사야 하는 거 아니야? 번호 보였어? 1등 된 사람 중에 꿈에 번호가 나온 사람도 있던데.”
-아쉽게도 번호가 생각이 안 나는 거 있죠? 선배는 뭐, 좋은 꿈 꿨어요?
“꿈? 아니. 나는 그냥 푹 잘 잤어.”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을 했다가는 의진이 걱정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의진아, 그럼 내가 준비하고 이따 데리러 갈게.”
-네, 올 때 운전 조심해서 와요.
“알았어요.”
전화를 끊은 태경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뒤, 운동화 끈을 야무지게 묶고 동네를 뛰기 위해 옥탑을 나섰다.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뛰어 본 게 언제인지 뺨을 스치는 아침 공기가 가슴까지 상쾌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갈 즈음 한 시간 가까이 달린 러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휴! 시원하다.”
“어머! 깜짝아.”
태경이 기지개를 켜며 옥탑으로 올라오자 누군가 깜짝 놀라며 반응했다.
“이게 누구야! 우리 의사 선생님 아니야?”
“안녕하셨어요? 괜찮으세요?”
옥탑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놀란 여자는 주인집 여자였다.
“의사 선생이 하도 집에 안 들어와서 난 웬 남자가 들어오나 하고 놀랐잖아. 그런데 어떻게 오늘은 집에 다 있네.”
“쉬는 날이라서 운동 다녀오는 길이에요.”
“운동 좋지. 난 햇볕이 좋아서 고추 말리러 올라왔는데 의사 선생님을 다 보네. 잘 지내지?”
호탕한 주인 여자는 오랜만에 보는 태경을 보며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네, 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잘 지내시죠?”
“잘 지내지. 나는 너무 잘 지내서 탈이야.”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시고요?”
“없어. 그런데 우리 김 선생은 더 잘생겨진 거 같아. 병원에서 종일 환자 보느라 바쁜 사람이 인물이 더 좋아진 거 같아?”
“별말씀을요.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고우니까 아들도 인물이 좋네. 일전에 우리 시누이가 진료 보러 갔는데 진료 너무 잘 봐 줬다고 그러더라. 고마워.”
“아닙니다.”
“맞다! 내 정신 좀 봐. 잠깐만 여기 있어 봐.”
돗자리에 고추를 정갈하게 놓던 주인 여자는 별안간 뭐가 생각난 듯 급하게 옥탑을 내려가더니 반찬통 몇 개를 들고 다시 올라왔다.
“쇼핑백에 넣어 주려니까 없어서 그냥 들고 왔어. 이거 받아요.”
“이게 다 뭐예요?”
“하나는 진미채 볶음이고 하나는 깻잎장아찌랑 이건 묵은지 무침이야. 우리 친정엄마 묵은지인데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직접 짠 참기름에 무쳤는데 밥도둑이 따로 없어. 입맛 없을 때 이것만 해서 밥 먹어도 맛있어.”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어머니가 오실 때마다 나한테 반찬을 많이 주셨거든.”
태경의 어머니는 아들의 집에 올 때마다 반찬을 만들어 왔는데 항상 잊지 않고 주인집에도 반찬을 나눠 주곤 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던 주인 여자는 오랜만에 태경을 보자 반찬을 챙겨 주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가 음식 솜씨가 정말 좋으시더라. 난 그렇게 손맛이 좋지는 않은데 그래도 먹을 만할 거야.”
“제가 다 좋아하는 반찬이라 맛있게 맛있을 거 같은데요.”
“그건 그렇고, 김 선생? 저기 말이야…….”
신나게 대화를 이어 가던 주인 여자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고민하며 머뭇거렸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있기는 한데……. 잠깐 짧게 시간 돼?”
“네, 괜찮아요.”
“그럼, 잠깐 여기 좀 앉아 볼래?”
주인 여자는 태경에게 손짓하며 평상 위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계모임을 하고 있거든.”
“계모임이요……?”
“어머! 그런 거 아니야. 내가 김 선생한테 계를 들으라고 하는 줄 알았구나?”
“아니요.”
솔직히 말하면 순간 태경은 정말로 계모임 때문에 주인 여자가 할 말이 있다고 한 줄 알았다.
“우리 계모임 중에 큰손 언니가 한 분 있거든?”
“큰손이요?”
“응. 큰손이라고 해서 뭐 불법적인 일을 하거나 그런 사람이 아니라 남편이랑 크게 사업을 하는데 돈을 잘 번다고 해서 큰손이라고 부르거든. 이 언니가 아주 돈이 많아.”
“아, 네.”
“그런데 이 언니네 자식이 셋인데 막내딸만 아직 시집을 안 갔어. 그러면서 나한테 괜찮은 사람이 있는지 묻더라고. 그런데 김 선생이 번뜩하고 떠오르는 거야. 여기 한번 봐 봐.”
이야기에 물꼬를 트자 신난 주인 여자는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클릭하며 태경에게 보여 줬다.
“어때 인물 좋지? 이 집 자식들이 인물이 좋거든. 대학교도 스카이 출신으로 좋은 데 나오고 미국 유학 갔다 와서 그 뭐시기냐……. 동시통역 그 일 한대. 큰 손 언니가 똑똑한 사위를 원하는데 우리 김 선생은 머리도 좋고 인물도 좋잖아. 결혼만 하면 병원까지 세워 줄 수 있을 정도로 이 집 재력이 좋아. 내가 보기에는 둘이 딱 맞는데 어때?”
“말씀은 감사한데 저, 결혼할 사람 있습니다.”
잔뜩 기대한 눈빛이 민망할 정도로 태경은 뜸도 들이지 않고 확실하게 답했다.
“어? 김 선생 여자 친구 있었어?”
“네. 여자 친구 있습니다.”
“그랬구나. 내가 그걸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내가 괜히 실수했네. 미안해라.”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맨날 병원에만 있는 사람이 연애는 언제 했대? 결혼 날짜는 잡은 거야?”
“아니요. 아직 안 잡았어요.”
“그래 잘 만나고 나중에 청첩장 나오면 꼭 줘. 알았지?”
“그럼요.”
“나, 이만 가 볼게.”
“반찬 감사히 잘 먹을게요. 들어가세요.”
태경을 지인의 짝으로 생각했던 주인 여자는 민망한 표정으로 얼른 내려갔다.
집으로 들어온 태경은 집 청소를 깨끗이 하고 준비를 마친 뒤, 의진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선배!”
의진이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태경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뛰지 마. 구두 신고 뛰다 넘어지면 다쳐.”
“내가 매일 병원에서 크룩스만 신어서 그렇지 왕년에 힐 좀 신어 봐서 안 넘어져요. 와! 그나저나 오늘따라 선배 너무 다른 거 아니에요?”
의진의 말대로 오늘 태경은 확실히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늘 피부처럼 입고 있던 가운과 수술복 대신 멋진 슈트를 입고 있었고,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헤어스타일은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처럼 정갈한 포마드로 마치 전문 기업인의 포스를 물씬 풍겼다.
그런 태경을 보며 의진은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신경 좀 썼는데 어때? 나 오늘 처음으로 샵이란 곳에서 머리도 했어. 괜찮아?”
“음!”
“별로야?”
“뭐랄까……. 큭!”
“웃지만 말고 어떤지 말해 보라니까. 이상해?”
“아니! 완전 멋있어. 선배랑 진짜 잘 어울려요. 최고!”
“장난하지 말고.”
“장난하는 거 아닌데……. 내 남자 친구 잘생겼다. 농담이 아니라 선배 진짜 멋있어요. 나는 어때요? 괜찮아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예뻐.”
태경은 엄지를 추켜세우며 말했다.
사실 의진은 언제나 예뻤다.
구겨진 가운을 입고 있을 때도 수술복을 입고 있을 때도 태경의 눈에는 빛나는 햇살처럼 항상 예뻤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로 의진을 바라보는 태경의 눈빛 안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아! 뭔가 이대로 그냥 가기가 아까운데?”
“아깝다니 뭐가?”
“선배 가만히 있어 봐요.”
“왜?”
“이런 모습 처음 보니까 사진 찍어 두려고.”
“사진은 무슨 사진이야. 됐어.”
태경은 생각보다 사진 찍는 일을 쑥스러워했다.
“하지 마. 누가 보면 어떡해.”
“아무도 없는데 누가 봐요. 선배 여기 좀 봐요. 김태경 씨, 좀 보시죠.”
“그러지 말고 이리 와 봐.”
의진이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으려 하자 태경을 손짓하며 불렀다.
“싫어. 사진 못 찍게 하려고?”
“아닌데?”
뒷걸음질하며 장난치는 의진에게 다가간 태경이 핸드폰을 뺏어 들더니 한쪽 팔로 자연스럽게 의진의 어깨를 감싸며 말을 이었다.
“같이 찍어야지.”
찰칵-
“아! 나 방금 눈 감았는데 다시 찍어요.”
“왜? 예쁘기만 한데.”
“예쁘긴 못난이처럼 나왔구만. 다시 찍어요.”
“내 눈에는 귀엽고 예쁜데? 그리고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어요. 자! 얼른 타세요.”
태경은 아쉬워하는 의진을 달래며 차 문을 열어 줬다.
“세상에, 이게 다 뭐예요?”
차에 타자마자 차 안을 가득 메운 꽃향기에 의진은 뒷좌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선물 샀구나? 내가 준비하지 말라니까.”
뒷좌석에는 만개한 안개꽃 다발과 따뜻한 떡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그래도 처음 인사드리는 자리인데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
“엄마랑 아빠가 아무것도 사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근데 선배?”
“응.”
“우리 엄마가 안개꽃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떡도 부모님이 좋아하시는데 떡 케이크까지. 선배 센스 너무 좋은데요?”
“정말? 고민 많이 했는데 잘 선택했네.”
어깨를 으쓱하면 답한 태경은 속으로 임정숙 간호사에게 고마워했다.
여자 친구 부모님께 처음으로 인사드리러 가는 자리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뻔한 과일 바구니를 들고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임정숙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엄마, 아빠가 진짜 좋아하실 거 같아요.”
“그래? 다행이다. 그리고 거기, 보면 안개 말고 꽃 하나 더 있을 거야.”
“어! 정말이네.”
의진은 안개 꽃다발 뒤쪽에 숨어 있던 리시안셔스 한 송이를 꺼냈다.
“이것도 엄마 거예요?”
“아니. 그건 네 거야. 제일 좋아하는 꽃이잖아.”
“맞아요. 선배 내가 이 꽃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저번에 한 번 이야기한 적 있어. 꽃도 예쁘지만, 꽃말 때문에 제일 좋아한다고 했잖아.”
“내가 그랬어요? 난 기억도 안 나는데 그걸 다 기억하고 있어.”
리시안셔스의 꽃말은 변치 않은 사랑으로 의진은 꽃향기를 맡으며 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자 친구가 한 말인데 당연히 기억해야지.”
“선배 오늘, 더 스윗한 거 알아요?”
“알지. 내가 원래 한 스윗 하잖아.”
“아, 향기 너무 좋다. 꽃 받으니까 기분 되게 좋아진 거 알아요? 고마워요.”
“천만에요. 벨트 했지? 그럼 출발한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 한껏 달달한 분위기를 자랑한 두 사람은 기분 좋게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