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23화 (422/472)

423화. 비상

“선배 차는 저기 벽 쪽으로 붙여서 주차하면 돼요.”

“알았어.”

“차고에 하면 선배 나갈 때 불편할 거 같다고 엄마가 저기에 주차하라고 하셨어요.”

의진의 집에 도착한 태경은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탁-

“이 집이야?”

“네, 여기가 부모님 집이에요.”

차에서 내려 대문까지 꽤 걸어간 태경은 주변을 둘러보다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주변 집들이 전부 드라마에 나오는 회장님 집처럼 하나같이 높다란 담장과 함께 커다란 규모를 자랑했다.

새삼 의진의 부모님이 정&장 로펌 대표라는 게 피부로 와닿기 시작했다.

태경은 법조인이 아닌 의료인이기 때문에 법조계 쪽은 자세히는 몰랐지만, 그런데도 정&장 로펌은 알고 있었다.

물론 만나 본 적이 있거나 얼굴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일반인들조차 다 알 정도로 그 유명함이 남달랐다.

정&장은 우리나라에 로펌이란 개념을 최소로 도입한 곳이기도 했으며 법무팀이 있는 재벌들조차 개인이나 기업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이었다.

그만큼 대단한 곳이기에 드라마나 영화 소재로도 자주 다뤄졌다.

특히 더 유명해진 건,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당연하지만 지키기 힘든 저 말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맥이나, 돈이나, 권력 등 그 어떤 것도 법 위에 두려 하지 않았고, 돈이 없고 억울한 사람들의 법문제로 무료로 도와주는 일에 앞장섰다.

소위 말해 깔 게 없는 그야말로 털어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로펌이었다.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잘 어울리는 정&장의 위상은 대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로라하는 로스쿨을 나온 학생들에게 몇 년째 가장 가고 싶은 로펌으로 뽑히기도 했다.

‘와! 높다.’

대문 앞에서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힌 태경은 높다란 담장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정&장이란 대단한 타이틀과 커다란 저택 규모에 뭔가 압도당할 것만 같았다.

“후!”

오는 동안 의진과 즐겁게 대화하며 전혀 긴장하지 않았는데 순간 밀물처럼 긴장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 괜찮지?”

“너무 괜찮죠. 왜요? 긴장돼요?”

“어. 아까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거든? 근데 대문 앞에 서니까 갑자기 확 긴장되네.”

“정말이네?”

고개를 옆으로 돌려 태경의 표정을 확인한 의진은 저 말이 진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술실의 그 카리스마는 다 어디 갔어요?”

“수술실에 두고 온 거 같아.”

“천하의 김태경 원장님이 긴장을 다 하시고 그래요. 긴장하지 마요.”

“…….”

어찌나 긴장되던지 태경은 바로 옆에 있는 의진이 하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저기요? 김태경 씨? 제 말 들려요?”

“네, 이제 들리네요.”

“다행이네요.”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 줄 알아?”

“어떤 기분인데요?”

“적장을 쓸고 다니는 장군을 만나러 온 기분이랄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우리 아빠 좋은 분이세요.”

“당연하지. 그런 뜻이 아니라 뭔가 분위기에 압도됐다고 할까?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 선배 이렇게 긴장한 거 처음 보는 거 같아.”

“나도 내가 이 정도로 긴장할 줄은 몰랐어.”

어찌 보면 태경의 이런 모습은 당연했다. 예비 장인, 장모님께 처음 인사드리는 자리인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숨 한 번 크게 쉬어 볼래요? 후우!”

“후!”

“한 번 더. 좀 괜찮아요?”

“조금?”

“그럼 들어갑니다.”

딩동-

-의진이니?

의진이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 우리 도착했어.”

-그래, 문 열었어. 조심히 들어……어머, 얘? 의진아?

인터폰 너머로 차분하게 말하던 의진의 어머니 장 여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다급해졌다.

“네?”

-일 났다.

“왜 엄마? 무슨 일이야?”

-네 목소리 듣고 코코가 신나서 뛰쳐나갔어. 이걸 어쩌니? 코코야, 들어와. 조심해.

“알았어요. 내가 잘 볼게.”

“코코가 누구야?”

“그게…….”

대문을 열며 답을 하려던 의진이 대답하려던 찰나,

왈- 왈-

황금색 털을 휘날리며 작은 장난감을 입에 문 골든래트리버 한 마리가 두 사람에게 뛰어왔다.

“코코야?”

왈왈-

코코는 의진의 부모님이 키우고 있는 반려견이었다.

“우리 코코 잘 있었어?”

왈- 왈왈-

“코코 앉아.”

“이 친구가 코코야?”

“네. 우리 집 막내예요. 맞다! 선배 개 안 무서워해요?”

“그럼. 내가 동물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우리도 어렸을 때 강아지 키웠어. 너, 되게 잘생겼다.”

의진의 짝을 알아본 건지 코코는 태경에게 애교를 부리며 들러붙었다.

“귀엽죠?”

“나 이렇게 큰 대형견 가까이서 처음 보는데 진짜 귀엽다.”

“아빠가 유기견 보호 센터에서 데려와서 벌써 10년째 함께 살고 있어요.”

“그래? 아버지가 동물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다.”

“네, 꾸준히 봉사활동도 다니시고 불쌍한 아이들 있으면 도와주려고 하세요. 코코야! 안 돼! 하우스!”

코코가 자꾸 태경에게 달라붙으며 가는 길을 방해하자 의진이 하우스를 외치며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선배, 이쪽이에요.”

대리석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멋진 소나무와 넓은 마당이 눈에 띄었고 곧이어 의진의 어머니가 모습을 보였다.

“의진이 왔니?”

깔끔한 단발머리에 슬랙스와 블라우스를 입은 장 여사는 우아한 말투와 함께 기품이 느껴졌다.

“엄마? 우리 왔어요.”

“어서 와. 차 막히지 않았어?”

“아니. 괜찮았어.”

“반가워요. 김 선생님. 오느라 고생했어요.”

태경을 본 장 여사는 따뜻한 미소와 함께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김태경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보네요. 바쁠 텐데 이렇게 시간 내서 와 줘서 우리가 더 고마워요.”

장 여사는 태경이 불편하지 않도록 집안일을 도와주는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켰다. 또한 의진의 언니와 오빠가 온다는 것도 다음에 오라며 말렸다.

“어서 들어가요.”

“네.”

주방으로 향한 장 여사는 차를 들고 다시 나왔다.

“모과차예요. 향도 좋고 몸에도 좋아요. 들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거…….”

“어머나! 이게 다 뭐예요?”

차를 한 모금 마신 태경은 준비해 온 안개꽃과 떡 케이크를 장 여사에게 건넸다.

“선배가 엄마 주려고 사 온 거야.”

“어머, 세상에! 내가 안개꽃을 제일 좋아하는데 고마워라.”

“이 떡도 떡집에서 다 맞춘 거래.”

“그러게. 아직 따뜻하다. 고명도 잔뜩 올라가 있고 보기만 해도 맛있겠다. 아빠가 좋아하시겠네.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뭘 이렇게 귀한 걸 사 왔어요. 정말 고마워요.”

“아닙니다. 어머님.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처음 보자마자 그러면 안 되죠. 말은 차차 편하게 할게요.”

“엄마, 그런데 아빠는?”

“아빠 급한 회의가 생겨서 지금 오시는 중이래. 아마 거의 다 오셨을 거야. 김 선생님 배고프죠? 원래 오늘 회의가 없었는데 미안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내가 우리 딸한테 두 사람이 만난다는 이야기 듣기 전에 김 선생님을 TV로 먼저 봤거든요.”

“맞네. 엄마가 나한테 인터뷰 보고 선배 칭찬했던 거 기억난다.”

“그러니까. 보면서 우리 딸 저렇게 멋진 동료랑 같이 일하는구나 싶었는데 나중에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정말? 기분 좋았어?”

“당연하지. 엄마가 그 뒤로 선보라는 말 안 했잖아.”

“그것도 맞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실물이 더 멋지네요. 인물도 좋고 성품도 좋고 어머니께서 흐뭇하시겠어요.”

“아닙니다. 어머님도 고우세요.”

“어머, 정말요? 호호호! 말도 예쁘게 잘하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태경은 점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일상적인 이야기가 오가던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딩동

“아빠 오셨다.”

아빠가 오셨다는 말에 자리에 앉아 있던 태경은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의진과 장 여사를 따라 자연스럽게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아빠 오셨어요?”

“우리 딸 왔니? 어디 보자. 연애해서 그런가, 얼굴이 아주 좋구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온 정무석은 오랜만에 보는 의진을 보며 사랑 가득한 눈길로 반가워했다.

“아빠도 얼굴 좋아 보이세요.”

“그러니. 내가 좀 늦었지?”

“당신 기다리느라 김 선생님 저녁도 아직 못 먹고 기다리고 있잖아요.”

“나도 오늘 회의가 생길 줄 몰랐어. 미안해.”

“김 선생님이랑 인사하고 옷부터 갈아입고 나오세요. 의진아, 엄마랑 얼른 상 차리자.”

“네.”

“김 선생,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장 여사와 의진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정무석이 걸음을 옮기자 뒤쪽에 서 있던 태경이 앞으로 나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의진이 아빠 정무석이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태경이라고 합니다.”

“늘 이야기만 들어서 궁금했는데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170cm 초반 키에 희끗희끗한 머리와 깔끔한 슈트를 입은 정무석은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뭔가 묵직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법조계를 대표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법조인 특유의 분위기가 확실히 있었다.

뭔가 정무석이 하는 모든 질문에 한 치의 거짓 없이 성심성의껏 정직하게 답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아버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러지. 그나저나 우리 처음 보는 건가?”

“네, 처음 보는 겁니다.”

“그래? 그거참 이상하구만. 나는 우리 김 선생이 상당히 낯설지 않은데 말이야.”

“예전에 인터뷰 때문에 방송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 아동학대 사건 말하는 거지?”

“네, 맞습니다.”

“나도 그 인터뷰를 보긴 했는데, 그때를 말한 게 아니야. 김 선생은 날 본 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말을 하네.”

“네?!”

정무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태경의 머릿속은 비상이 걸렸다.

눈동자를 이쪽저쪽 움직이며 혹시나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분명히 날 보신 게 확실한데.’

‘어디지? 학회? 아니야. 학회에서 뵐 수가 없잖아.’

사람을 잘 기억하는 스타일이라 분명 만났다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주친 적이 없는 것만 같았다.

“자네, 표정을 보니까 생각이 잘 안 나는 거 같군.”

“제가 아버님을 뵌 적이 있나요?”

“물론이지. 나는 우리가 손까지 잡은 사이여서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자네는 아닌가 보지.”

‘손을 잡았다고?’

여자 친구의 아버지이자 미래 장인어른이 될 정무석의 말에 태경은 안정됐던 긴장감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서 봤지?’

‘설마 병원인가? 아닌데. 그러면 의진이나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등줄기에 땀이 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다시 한번 생각하던 그때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정무석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큰 소리로 기분 좋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자네가 날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저와 만나셨다고 하셨는데 혹시 그때 제가 아버님께 실수를 한 건 아닌지……?”

“실수라니. 자네가 어디 실수할 사람인가. 실수가 아니라 감동을 줬지.”

감동이라니. 저런 소리를 들으니까 태경은 뭐가 뭔지 더 복잡해졌다.

“이 모습으로는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을 거야.”

“……?”

“잠깐 옷 좀 갈아입고 와도 되겠나?”

“그럼요.”

태경이 소파에 앉아 깊이 있는 생각을 이어 가던 중 방에 들어갔던 정무석이 거실로 나왔다.

“김 선생?”

“네, 아버님.”

“내가 힌트를 하나 주지. 손 좀 한 번 보겠나?”

정무석은 대뜸 자기 오른손을 태경의 앞으로 쑥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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