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섯 번째 바이탈-424화 (423/472)

424화. 같은 사람?

“내가 힌트를 하나 주지. 손 좀 한 번 보겠나?”

정무석은 대뜸 오른손을 태경의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가 내민 오른손 한쪽 손가락 손톱 옆에는 작은 방수 밴드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태경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방수 밴드로 향하자 정무석이 곧장 말을 이었다.

“여기, 손톱 주변에 거스러미가 생겼는데 이게 그냥 두면 은근히 신경 쓰인다고 어느 마음씨 좋은 친구가 붙여 주더라고.”

“……!”

방금 정무석이 한 말에 뭔가 생각난 태경이 설마 하며 고개를 갸웃하던 찰나, 그 생각에 쐐기를 박는 말이 바로 이어졌다.

“김 선생, 발레리나의 발을 본 적이 있나?”

“……!”

“자네, 손은 열심히 노력한 발레리나의 발을 닮았어.”

정무석의 모든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경은 그가 몇 달 전, 새벽에 초음파 진료를 보러 왔던 그 노인이라는 게 기억났다.

그 당시, 진료를 보고 오른손 한쪽 손톱에 있는 거스러미에 방수 밴드를 붙여 줬더니 대뜸 손을 보며 멋진 손이라고 칭찬했었다.

기억력이 좋은 태경이 기억을 못 했던 건, 지금의 정무석을 보면 도저히 그 노인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낡고 해진 운동화에 허름한 옷차림과 모자까지 푹 눌러쓴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정갈하고 중후한 분위기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표정을 보니까 이제 기억난 거 같은데?”

“네, 새벽에 복부 초음파를 보러 오셨던 거 기억납니다. 그때랑 다른 모습이라서 몰랐습니다.”

“모르는 게 당연해. 그때는 복장이 좀 그랬지?”

“아닙니다.”

그 당시, 정무석은 지방에 있는 유기견 센터에서 봉사 활동을 마치고 새벽에 올라오는 길이었다.

그의 옷차림이 허름했던 이유는 센터에서 개들을 돌보다 보면 옷이 더럽혀지기 일쑤였기에 일부러 그런 옷을 입고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원 갔던 날이 의진이 쉬는 날이었기에 정무석은 이때다 싶어 그 옷차림으로 태경을 만나러 갔던 것이다.

“김 선생이 준 방수 밴드는 잘 사용했어. 고마워.”

“별말씀을요.”

“내가…….”

“여보? 김 선생님?”

정무석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때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장 여사가 나와 두 사람을 불렀다.

“와서 저녁 드세요.”

“김 선생, 가서 저녁 들지.”

“네, 아버님.”

“선배, 이쪽으로 앉아요. 아빠랑 무슨 이야기 했어요?”

장 여사를 도와 저녁을 준비한 의진은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했다.

“왜? 내가 김 선생한테 뭐라고 했을까 봐 걱정돼?”

“그럼, 걱정되지.”

“비밀이야. 안 그런가? 김 선생?”

“맞습니다. 비밀이야.”

“뭐지? 아빠랑 선배랑 뭔가 똘똘 뭉친 거 같은데? 선배, 진짜 비밀이에요?”

“어. 진짜로 비밀이야.”

“어어. 엄마, 아빠랑 선배 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김 선생님 배고플 텐데 그만 말 시켜. 뭘 좋아할지 몰라서 내가 이것저것 준비했는데 가짓수만 많지 먹을 게 없어요.”

먹을 게 없다는 말과 달리 식탁 위는 거의 뷔페 수준으로 다양한 반찬들이 가득했다.

잘 구워진 한우부터 쓰러진 소도 일으켜 세운다는 낙지전골과 오리 호박찜 등 그야말로 육해공 메인 요리들이 침샘을 자극했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다 좋아하는 음식인데요. 그리고 반찬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식기 전에 고기부터 먹어요.”

“와! 고기가 정말 부드럽고 맛있네요.”

태경은 장 여사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음식이 맛있지 않아도 절로 맛있다는 소리가 나왔지만, 하나같이 모든 음식이 전부 맛있었다.

“이 낙지전골 국물도 시원하고 아주 맛있습니다.”

“그래요? 입맛에 맞는다고 하니 다행이네.”

복스럽게 먹는 태경의 모습을 보며 장 여사는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김 선생님이 잘 먹어 주니까 준비한 보람이 있네요.”

“어머님 솜씨가 좋으신데요. 제가 최근 들어 먹은 음식 중에 제일 맛있습니다.”

“그 정도예요? 일 줄여 가면서 요리 공부한 보람이 있네요.”

“여보, 나도 그래요. 늘 맛있지만 오늘은 더 맛있는데?”

“엄마 나도.”

“그럼 다들 많이 드세요.”

맛있는 음식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네 사람은 기분 좋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티타임을 가졌다.

“과일이랑 차 좀 드세요. 그리고 여기 떡도 좀 드시고요.”

“웬 떡이야.”

“김 선생님이 집에 온다고 안개꽃이랑 떡 케이크를 사 왔지 뭐예요.”

“그래? 떡이 아주 맛있는데?”

“그러니까요.”

“저기 김 선생님. 어머니께서는 우리 의진이랑 만나고 있는 거 아세요?”

“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아직 보신 적은 없는 거죠?”

“아니야, 엄마. 나 선배 어머님 뵌 적 있어.”

“그래?”

“예전에 잠깐 인사만 드린 적도 있었고, 저번에 선배 만나러 병원 오셔서 그때 이야기 좀 나눴어.”

“어머니께서 의진이를 많이 예뻐하세요.”

“그래요? 우리 딸 예쁘게 봐주신다니까 감사하다. 가만있자 그러면 우리 집에 먼저 인사 온 거야?”

“응. 아직 선배 어머님 댁에 가진 않았어.”

“왜? 먼저 인사드리러 가지 그랬어.”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두 분께 먼저 인사드리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마음도 참 따뜻하시네. 의진아, 인사드리러 갈 때 엄마한테 꼭 말하고 가. 알았지?”

“네, 알았어요.”

차를 마시는 동안 태경은 주로 의진의 어머니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답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자네, 술 마실 줄 아나?”

그렇게 어느 정도 대화가 오갈 즈음 정무석이 태경의 주량을 물었다.

“네, 아버님. 조금 마실 줄 압니다.”

“당신, 김 선생님이랑 술 마시게요?”

“선배 우리 집에 처음 온 날인데 술은 다음에 해요.”

의진과 장 여사는 워낙 술에 강한 정무석 때문에 태경을 걱정했다. 태경 또한 술을 잘 마시는 편이었지만, 정무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어머님.”

“아빠, 대신 조금만 마셔요.”

“한 잔만 할게. 걱정하지 마. 누가 보면 내가 김 선생 잡아먹는 줄 알겠어.”

걱정하는 모녀를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지하에 있는 홈 바로 내려갔다.

“자네 차 가져왔지?”

“네, 아버님. 갈 때 대리 부르면 됩니다.”

“의진이랑 약속했으니 오늘은 딱 한 잔만 하는 걸로 하지. 위스키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정무석은 태경을 위해 숙취가 없고 가장 아끼는 최고급 위스키를 개봉했다.

“어때. 맛이 괜찮아?”

“뒷맛이 깔끔한데요?”

“그렇지? 이게 깔끔해서 마시기가 편해. 그나저나 김 선생님, 나에 대해 알고 있었나?”

위스키로 목을 축인 정무석은 예비 사위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니요. 정&장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두 분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놀랐겠군.”

“네, 의진이에게 처음 들은 날 놀라긴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알고 계시고?”

“오히려 저보다 어머니께서 더 놀라셨어요. 우리 집은 평범한데 그런 대단한 집안과 결혼을 진행해도 되는지 걱정하셨습니다.”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았지만, 태경 역시 여자 친구 집안에 대해 듣고 상당히 놀란 적이 있었다.

“내가 인생을 살아보니까 말이야. 평범하게 산다는 게 그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야. 오죽하면 옛날 어른들이 결혼할 때 모나지 말고 평범하게만 살라고 그런 말까지 하겠나.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자네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아닙니다, 아버님. 전 그저 평범한 의사일 뿐입니다.”

“그 발언은 너무 겸손인데? 세상천지에 전문의 자격증을 여러 개 취득하는 의사가 흔한가? 내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 50명이 채 안 되는 걸로 아는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자네 부모님께서 자식을 이렇게 훌륭하게 키우셨으니 자네 부모님 또한 평범한 분들이 아니지. 자식 농사 잘 짓기가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정무석은 태경이 기가 죽지 않도록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워낙 솔직한 성격이라 없는 말을 하지 못하는 그는, 본인이 느끼는 대로 솔직한 생각을 말할 뿐이었다.

“사실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좋게 안 봐 주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네?!”

“딸의 남자 친구인데 어떻게 좋게 보겠나? 의진이가 자네 이야기 처음 꺼낼 날 이상하게 난 좀 섭섭하더라고.”

자식은 50살이 넘어도 주름이 지고 머리가 희어져도 그 부모에게는 여전히 아이처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정무석도 그랬다.

정무석과 장 여사는 삼 남매 자식이 있었고 의진은 그들의 막내였다.

첫째, 둘째는 결혼하여 부모까지 됐지만, 부부에게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이 같았다.

내리사랑이라고 막내인 의진은 그보다 더할 것이다.

“30대 중반이 넘은 딸내미가 결혼할 남자 친구가 있다는데 그 소리가 나는 좀 서운했어. 의진이가 원래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전, 전혀 몰랐습니다.”

놀랍게도 의진은 인생에 결혼이란 걸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태경이 우리병원으로 오고 그를 좋아하고 만나게 되면서 사랑을 키우자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놈이 도대체 어떤 놈일까 하고 한참 궁금하다가 뒤를 좀 캐 봤어.”

“……!”

뒤를 캐 봤다는 소리. 그 말인즉슨 정무석이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말과 같았다.

태경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움찔하며 긴장했다.

“하하하! 김 선생 얼굴 좀 펴. 설마 내가 자네 뒷조사를 했겠나? 농담이야. 농담.”

태경의 표정이 시종일관 진지하자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농담한 거였다. 하지만 예비 장인어른과 첫 술잔을 기울이는 태경에게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지금이야 응원하지만 사실 난, 의진이가 의사 되는 걸 반대했어. 심지어 의사가 된 뒤로도 반대해서 따로 살게 된 거야. 의사가 훌륭한 직업인데 왜 반대를 했나 싶지?”

“같은 길을 가길 바라셨던 게 아닐까요?”

“자네, 사람 마음을 참 잘 아는 거 같아. 맞아. 첫째랑 둘째처럼 의진이도 우리를 따라오길 바랐어.”

모든 부모 마음이 그렇듯 정무석도 그랬다. 자식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 주고 싶었다.

같은 법조인의 길을 걸어가면 조언을 줄 수도 있고, 어려울 때 도와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룬다는 게 워낙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선뜻 응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해외 봉사에서 심적으로 힘든 일을 겪고도 다시 마취과 의사로 시작하는 딸을 보며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무석은 부모로서 그런 강단 있고 뚝심 있는 의진의 모습이 뿌듯하고 대견했다.

곁에서 보는 딸은 정말이지 의사가 천직이었다.

‘안 힘드냐?’

‘아니요. 아부지 저, 너무 재미있어요. 전 환자 보는 게 좋아요.’

늘 즐겁게 일하는 모습은 좋았지만, 항상 일에 파묻혀 사는 딸의 모습이 안타까울 때가 있었다.

아직 젊은데 더 늦기 전에 연애도 하고 좋은 사람도 만나 결혼도 했으면 하는 마음에 선 자리를 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남자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엄마. 저 만나는 사람이 있어요.’

어릴 적 눈동자를 반짝이며 아빠, 엄마를 제일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딸이 그때처럼 눈을 반짝이며 그렇게 태경의 존재를 알렸다.

“그때 의진이가 그런 말을 했어. 본인이 많이 사랑하고 의사로서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서운하기도 하면서 인간 김태경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어.”

“의진이가 현명하고 배울 점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그냥 하는 말도 잘 보이려고 하는 말도 아니었다.

우리병원 모든 직원이 의지하는 사람이 태경이라면, 그런 태경이 쉴 수 있고 힘을 주는 사람이 의진이었다.

사람이기 때문에 지치고 힘든 순간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럴 때마다 늘 힘이 되어 준 것도 의진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쉽지만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표현이다.

고마울 때 고맙다는 말, 미안할 때 미안하다는 말, 힘들 때 힘내라는 말. 그리고 사랑할 때 사랑한다는 말.

이 당연하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말들을 의진은 늘 아낌없이 표현해 줬고 태경은 이 점이 항상 진심으로 고마웠다.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

“그럼요. 편하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듣기로는 김 선생이 우리 병원 오기 전에 신화대병원에 있었다고 하던데……. 왜 나왔는지 물어봐도 되나?”

“교수 임용을 기다렸다가 떨어졌고 병원에서도 나가길 원해서 나왔습니다. 신화대병원을 나올 때 결말이 그렇게 유쾌하진 않았습니다.”

“보통 그럴 땐 나갈 수밖에 없는 자리를 만들고 등을 떠밀지. 자네, 속상했겠어.”

“그 당시에는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이 컸는데,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까 제가 잘못해서 안 뽑혔던 거 같습니다.”

“자네 지금 그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탁-

정무석이 상당히 진지한 표정과 함께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방금 말은 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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